데일리 히어로 151화
클리아는 눈으로 내게 말했다.
‘나를 궁금해해 줘서 고마워요.’
그녀는 오른손에 들린 권총을 자신의 머리에 댔다.
길고 흰 그녀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겼다.
탕!
클리아의 머리가 퍽 하고 터졌다.
붉은 머리카락에 붉은 피가 엉켰다.
옆으로 무너지는 클리아의 모습이 슬로우 모션처럼 느리게 보였다.
그녀는 죽음의 순간 엷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다 정리됐군.”
카시아스의 말이었다.
“응.”
난 짧게 대답했다.
무슨 말을 할 힘도 없었다.
심신이 너무나도 피곤했다.
“돌아가자.”
카시아스가 내 어깨위로 훌쩍 뛰어오르며 말했다.
“응.”
돌아가자.
이 미친 공간에서 나가, 돌아가자.
집으로.
* * *
다운 타운 사건 이후 일주일이 흘렀다.
그동안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냥 내 방에 틀어박혀 가만히 누워 있었다.
배가 고프면 먹고, 잠이 오면 자고, 대소변을 배출하고 싶으면 화장실에 갔다.
그것 말고는 하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카시아스도 날 찾아오지 않았다.
머리가 멍했다.
지금은 한차례 태풍이 휩쓸고 간 뒤 고요와 적막만 남은 기분이다.
‘설열음…….’
그 이름 세 글자가 계속해서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녀는 다운 타운의 지배자였다.
다운 타운을 발전시키려 했고, 새로운 노아의 방주로 만들려 했다.
아버지와 선조의 뜻을 이어받아, 지구의 모든 생명을 죽이려 했다.
하지만 광기에서 멀어지며 모든 것을 멈추려 했다.
그러기 위한 수단으로 내가 이용된 것이다.
난 그녀가 집필한 짤막한 시나리오 속 주인공이었다.
그게 억울한 건 아니다.
잘못된 길에 들어섰다는 걸 알았는데도 스스로 멈출 자신이 없어서 날 이용한 그녀에게 오히려 연민이 느껴진다.
주머니에 들어 있던 포털을 두 개를 꺼냈다.
하나는 다운 타운의 3구역으로 갈 수 있는 포털, 다른 하나는 2구역으로 갈 수 있는 황금 포털이었다.
지금도 이 포털을 이용해 다운 타운에 내려가면 설열음이 그 차가운 표정으로 내 앞에 나타날 것 같았다.
물론 그럴 일은 없다.
그녀는 죽었다.
클리아에게 심장을 찔렸다.
아…… 맞다.
난 클리아에게 대답을 듣지 못했다.
그녀가 왜 다운 타운에 발을 들인 것인지.
어떠한 연유로 귀족의 작위를 얻어 2구역에서 살고 있었던 것인지.
그녀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다.
왜 설열음을 죽인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다만 내가 확실히 느낀 건 클리아의 마지막 순간 그녀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씁쓸하고 아팠다는 것뿐이다.
이제 다운 타운은 없다.
나는 그곳에서 나오기 전 3구역의 콜로세움도 모조리 파괴했다.
더는 살아남은 사람도, 멀쩡한 건물도 없었다.
이제 땅속 세상의 기이했던 이야기들은 잊어야 할 때다.
계속 나 혼자 속에 품고 놓지 못해봤자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다.
늘 그랬다.
세상은 내게 냉정했다.
아니, 모든 사람에게 냉정했다.
주변 상황 탓을 하는 이는 끝끝내 불행 속을 걷게 된다.
내가 바뀌지 않으면 주변도 바뀌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바뀌면 주변 상황은 놀라운 변화를 보여준다.
일주일 동안 공허 속에 묻혀 있었으면 충분하다.
전부 털어내고 내 생활을 찾아야 할 때다.
그리고…….
“마인드 탭.”
이름 : 유지웅
소속 : 지구, 대한민국
성별 : 남
나이 : 20
영력 : 40/40
영매 : 44
아티팩트 소켓 5/5
보유 링크 : 743,729
우리 회사 직원들이 일을 갈수록 열심히 하는 모양이다.
레이브란데의 인과율도 이제 끝낼 시간이다.
* * *
난 영력을 50까지 업그레이드시킨 뒤, 소울 스토어에 접속했다.
라헬은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날 반겼다.
“어서 오세요, 지웅 님. 꼭 일주일 만이네요.”
“내가 살 수 있는 영혼들을 보여줘.”
“얼마든지요.”
라헬이 손가락을 튕기자 여섯 개의 영혼이 허공에 나타났다.
“그럼 가장 왼쪽에 있는 영혼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아~”
“아니, 됐어.”
“그런가요?”
“이 영혼들…… 지금 내 영력과 링크로 전부 살 수 있는지만 말해줘.”
“가능합니다만.”
“그럼 모두 사겠어.”
라헬이 하얗게 웃었다.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라헬은 양팔을 쫙 펼쳤고, 여섯 개의 영혼이 내게 날아와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축하드립니다, 지웅 님. 이로써 쉰 개의 영혼을 모두 모으셨네요.”
“……응.”
끝이다.
레이브란데의 인과율이 드디어 끝났다.
“그럼 이게 우리의 마지막 만남이 되겠네요.”
그렇겠지.
더 이상 소울 스토어를 찾을 이유가 없으니.
“끝까지 수전노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남은 링크는 어차피 필요 없을 테니 모두 수거해 가겠습니다.”
“그래. 더는 필요 없지.”
그런데 한 가지 기분이 좀 나쁜 건.
“수거해 가려면 이 마법을 만든 레이브란데가 수거해 가야지, 왜 네가 주인처럼 수거해 가겠다는 거야?”
그러자 라헬이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제가 주인이니까요.”
“넌 소울 스토어의 주인이지.”
“아니, 그게 아니라 이 마법의 주인이 저라는 말입니다아~”
“……어?”
뭐야?
저 녀석이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내가 멍해 있는데, 라헬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다시 정식으로 인사드리지요.”
라헬은 한 손을 뒤로 빼고 다른 손은 가슴에 얹더니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저로 말할 것 같으면 레이브란데의 인과율을 만든 장본인이자, 죽어서는 스스로의 마법에 갇혀 소울 스토어를 운영하고 있는 환영의 괴짜. 레이브란데 라헬이라고 한답니다.”
“……!”
레, 레이브란데?
라헬이…… 레이브란데였어?
그럼 여태껏 난 이 마법을 만든 사람과 만나고 있었던 거야?
“네가…… 레이브란데였다니.”
라헬이 굽혔던 허리를 펴고 히죽거렸다.
“놀라실 거라 생각했지요.”
“왜 숨겼지?”
“숨긴 적 없습니다. 물어보지 않아서 대답하지 않았을 뿐.”
당연히 물어볼 일이 없지.
애초부터 스스로의 이름을 라헬이라 밝히고 레이브란데를 타인인 양 얘기해 왔으니, 본인이 혹 레이브란데가 아니냐는 물음이 나올 리가 없잖은가.
‘그러고 보니 일전에 라헬에게서 뿜어져 나왔던 그 심상찮은 기운…… 그건 그가 레이브란데였기에 가능했던 거였어.’
이제야 당시의 상황이 이해가 된다.
라헬은 가볍게 박수를 쳤다.
짝짝짝짝짝.
“다시 한번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지웅 님. 이것으로 모든 영혼을 모았고, 카시아스는 그녀가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게 되었네요.”
그래.
카시아스.
비로소 그녀의 목적이 무언지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소울 스토어에서 나가면…….
“지웅.”
내가 밖으로 나갈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라헬이 날 불렀다.
“응?”
내 시선이 절로 라헬의 얼굴로 향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더 이상 내가 알던 라헬은 존재치 않았다.
나를 보고 서 있는 건 한없이 가벼웠던 라헬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의 무게를 짊어진 레이브란데였다.
“레이…… 브란데.”
“그동안 이 괴짜를 상대하느라 고생 많았어.”
지금껏 내게 존대를 해오던 그였다.
한데 갑자기 바뀐 말투와 하대가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잘 맞는 옷을 입은 듯 어울렸다.
이제는 그 전의 모습이 되레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너는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렇지만은 않을 거야. 전에도 말했듯이 카시아스가 너를 내 마법의 대상으로 선택한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지.”
그 이유가 뭔지 정말 궁금했다.
곧 그 궁금증이 다 풀리겠지.
“여기서 나가 카시아스와 마주하게 되면 더 큰 시련을 겪게 될 거야. 네가 50개의 영혼을 다 모았고, 넌 그 힘으로 선행을 해왔으며 그 덕분에 성불하지 못했던 영혼들은 무사히 성불하게 되었지. 그게 내가 바라던 바이기도 했어. 불쌍한 영혼들을 구제해 주는 것. 그 대신 이 마법을 누군가에게 시전한 이에게는 그의 소원 한 가지를 들어주는 것. 카시아스가 선택한 넌 모든 영혼을 모아 전부 성불시켜 주었어. 그러니 난 카시아스의 소원을 들어줘야겠지.”
전 같았으면 이게 뭐냐고 난리 쳤을지도 모르겠다.
선행을 쌓아 영혼 모은다고 개고생한 건 난데 왜 카시아스의 소원을 들어주냐며 바락바락 따졌겠지.
하지만 지금은 내 처지에 대해 잘 안다.
카시아스가 내게 레이브란데의 인과율을 시전하지 않았다면 내 인생은 시궁창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난 영혼의 힘도 얻었다.
그렇게 많은 것을 받아놓고 더한 걸 바라면, 그건 어리광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 카시아스는 그럴 자격이 있어.”
레이브란데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난 자연스레 그 손을 마주 잡았다.
“잘 가라, 유지웅. 짧은 시간 동안 즐거웠다.”
“나도…… 레이브란데.”
레이브란데는 하얀 미소를 지었다.
나도 덩달아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소울 스토어가 사라졌다.
레이브란데도 사라졌다.
다운 타운에 이어, 내가 겪어왔던 또 하나의 이상한 세계가 끝이 났다.
카시아스의 목적
카시아스는 날 찾아오지 않았다.
내가 카시아스를 찾아갔다.
그녀는 문단속을 그리 철저히 하는 타입이 아닌 모양이다.
카시아스의 집 앞에 도착해 노크도 없이 문을 열었는데, 잠겨 있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섰다.
고요했다.
마치 사람이 살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거실에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식당으로 향했다.
카시아스는 거기에 있었다.
테이블에 앉아 홀로 술을 마시는 중이었다.
물론,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녀의 집은 넓었고, 멋졌고, 고풍스러웠다.
집에 들인 가구 하나하나도 비싼 것들뿐이다.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지만 만약 그녀가 술을 먹는다면 와인이 어울릴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테이블에 놓인 술은 다름 아닌 소주였다.
반 정도 남은 소주병이 하나, 비어 버린 소주병이 열 개다.
저렇게나 많이 마셨는데 카시아스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내가 부엌에 들어섰는데도 눈길조차 주지 않고 안주 하나 없이 소주를 잔에 따라 연거푸 들이켰다.
난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손님이 왔으면 뭐라도 대접해야 하는 거 아니야?”
카시아스가 우리 집에 찾아올 때마다 했던 단골 멘트다.
내 입에서 그 말이 나오자 카시아스는 피식 웃었다.
“왜 왔어.”
이 여자가 취했나.
“레이브란데의 인과율…… 끝났어. 모든 영혼을 다 모았어.”
“그러니까!”
쾅!
카시아스가 술을 비운 잔을 테이블에 힘껏 내리찍었다.
퍽! 하며 유리잔이 산산조각 났다.
카시아스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날 노려봤다.
“그러니까…… 왜 왔냐고. 레이브란데의 인과율이 끝났다는 걸 내가 몰랐을까? 그런데도 널 찾아가지 않았다면 눈치껏 여기 오지 말았어야 할 거 아니야!”
대체 이 반응은 뭐지?
정말로 심하게 취하기라도 한 건가?
“카시아스. 왜 이래? 너 지금 이상한 거 알아? 왜 화를 내는 건데? 좋아해야 되는 거 아니야? 네가 그렇게 바랐던 일이잖아? 이걸 원해서 내게 마법을 시전한 거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