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 히어로 150화
난 당장 포털을 사용했다.
포털에서 기계적인 음성이 들려왔다.
―포털을 준비합니다. 함께 넘어갈 매개체를 눈으로 스캔하거나 직접 만져 주십시오. 5초 동안 아무런 행동이 없을 경우 본인만 넘어가도록 설정합니다.
당연히 나는 혼자서만 이용할 생각이었다.
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5초가 지나자 내 앞엔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이 들어갈 수 없는 차원의 문이 열렸다.
“안 돼!”
설열음이 놀라서 내게 달려들었다.
난 그녀의 후두부를 강하게 때렸다.
“아…….”
털썩!
일격에 정신을 잃은 설열음이 바닥에 쓰러졌다.
“너와는 나중에 대화를 나눠야겠어.”
나는 쓰러진 설열음을 놔두고 차원의 문으로 들어섰다.
이제는 공간 이동의 어지러움에 많이 익숙해져 있었다.
* * *
1구역에 들어섰을 때 제일 먼저 느낀 감정은 혼란스러움이었다.
1구역은 그다지 넓지 않은 연구실 같은 분위기의 돔 형태로 만들어진 곳이었다.
1구역의 중앙엔 거대하고 복잡한 구조의 슈퍼컴퓨터가 놓여 있었다.
슈퍼컴퓨터의 뒤편으로는 커다란 창이 있었다.
창 너머로 핵실험을 진행하고 있는 실험실의 내부 구조가 보였다.
그리고 1구역의 벽은 전부 수족관 형태의 실험관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실험관 안에는 인체 실험 중인 마루타가 산소호흡기를 낀 채 들어가 있었다.
이것이 1구역의 전부였다.
이미 설열음의 기억 속에서 한번 본 장소지만, 직접 겪어보니 피부로 와 닿는 게 달랐다.
“슈퍼컴퓨터를 망가뜨리면 모든 것이 끝난다.”
1구역의 보안은 의외로 허술한 편이었다.
포털만 잘 지키면 그 누구도 1구역에 들어설 수 없었기에 다른 보안 장치를 따로 해두지 않았다.
이것 역시 설열음의 기억 속에서 알아낸 것이므로 확실한 사실이다.
난 주먹을 말아 쥐고 슈퍼컴퓨터를 마구잡이로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쾅쾅쾅쾅쾅쾅쾅!
퍼엉!
결국 슈퍼컴퓨터는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큰 폭음을 흘리며 터졌다.
슈퍼컴퓨터가 동작을 멈추자 1구역을 밝혀주던 빛이 모조리 점멸되었다.
“끝인가.”
뭔가 허무했다.
힘들게 1구역까지 왔는데, 막상 일을 해결하는 건 얼마 걸리지 않았다.
난 어둠 속에서 다시 포털을 작동해 1구역에서 빠져나왔다.
레이브란데의 인과율
1구역에서 차원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나오니 2구역의 광장이었다.
설열음은 여전히 기절해 있었고, 카시아스는 그녀의 곁에 앉아 있었다.
2구역의 살아남은 모든 귀족은 광장에 모여 있었다.
클리아도 이제는 레스토랑 건물에서 나와 광장에 서 있었다.
나는 1구역으로 안내하는 포털을 손으로 비벼 부서뜨렸다.
이것 말고는 1구역으로 갈 수 있는 또 다른 포털은 없다.
내가 부순 것이 유일한 포털이었다.
이제 1구역은 영원히 봉쇄되어 버린 공간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내가 해결해야 할 일은 설열음에 대한 처우였다.
그녀와 그녀의 아버지, 그리고 이 실험을 이어온 이들은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지었다.
이를 아는 건 오로지 나 하나다.
2구역에 있는 귀족들도 다운 타운의 진정한 존재 의의를 모른다.
그저 2구역에 지어진 저택을 사놓으면 언젠가 엄청난 혜택이 돌아온다는 정도만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그녀를 단죄할 수 있는 건 나밖에 없다.
하지만 망설여진다.
조금 전 그렇게 많은 이들을 아무렇지 않게 죽여놓고 설열음을 죽이는 건 왜 망설이게 되는 건지 모를 일이다.
설열음에게 인간적인 정이 든 건 아니다.
사적인 감정이 그녀를 단죄치 못하게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뭔가 석연치 않음이 계속 내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뭘까.
무엇이 앞을 가로막는 것일까.
고민하고 있던 그때.
기절했던 설열음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거짓말처럼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날 응시하며 무감정하게 말했다.
“왜 안 죽이고 있어?”
“뭐?”
“날 죽이려 했던 거 아니야? 그런데 왜 안 죽인 거냐고.”
순간 큰 해머로 뒤통수를 두들겨 맞은 듯했다.
“너…… 기절한 척했던 거냐.”
“설마 그 정도에 진짜 기절할 거라고 생각한 거야?”
“버틸 수 있을 만큼 가볍게 가격하진 않았는데.”
“사실대로 얘기해 줄게. 네가 당했어.”
내가 뭘 당했다는 건지 모르겠다.
설열음은 주먹 쥔 오른손을 내밀었다.
“나한테는 두 가지 능력이 있어.”
그녀가 검지를 폈다.
“하나, 미래를 보는 눈.”
뭐……?
미래를 본다고?
점쟁이도 아니고 그런 게 가능한 건가?
“둘.”
설열음이 중지를 폈다.
“메모리 컨트롤.”
메모리 컨트롤? 기억을 조종한다는 얘기인가?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남의 기억을 내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는 거지. 지웅이 넌 내 기억을 훔쳐봤겠지. 그래서 내가 다운 타운의 지배자라는 것도, 1구역에 가는 방법도 알아낼 수 있었을 테고.”
“……!”
“상황이 이렇게 되리라는 건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어. 난 미래를 볼 수 있으니까. 하지만 내게는 한 가지의 미래가 아니라 여러 갈래의 미래가 보여. 내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모든 미래들이 보이지. 다행스럽게도 이건 내가 원하는 미래였어. 네가 다운 타운을 파괴하는 것.”
내가 지금 설열음의 계획대로 움직였다는 말이야?
꼭두각시처럼?
“하지만 이런 미래를 만들기 위해서는 내게 메모리 컨트롤의 능력이 필요했지. 그게 지금의 미래를 손에 넣기 위한 필요조건이었어. 메모리 컨트롤이 없었다면 이런 상황은 오지 않았을 거야. 난 네가 내 기억을 훔쳐보는 순간 반대로 네 머릿속 기억 속에 접속했어. 그리고 네가 훔쳐본 내 기억들 중, 인체 실험을 통해 강인한 육신을 얻었다는 걸 지워 버렸지.”
“왜…… 그런 짓을 한 거지?”
“그 사실을 알았더라면 넌 날 연약한 보통의 여자로 보지 않았겠지. 제대로 싸워서 날 죽였을 가능성이 높아. 그게 내가 봤던 또 다른 미래니까. 하지만 난 내 두 눈으로 꼭 보고 싶었어. 다운 타운의 멸망을. 1구역의 파괴를. 그래서 이제 만족해. 얼마든지 죽여도 좋아.”
설열음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
“저의가 뭐야? 왜 네가 다운 타운의 멸망을 바라는 건데?”
“광기에서 멀어졌거든.”
광기.
그래, 늘 그놈의 광기가 문제다.
“처음에는 이곳이 진정 천국이 아닌가 생각했었어. 그래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열심히 1구역의 연구를 진행시켜 나갔지. 내가 생각하는 것이 진리다. 내가 바라는 것이 곧 모든 이들의 염원이다. 그렇게 믿어왔어. 그러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 보니 난 지구의 평화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내 신념을 위해서만 연구를 이어나갔던 것이라는 걸 깨달았어. 하지만 내 손으로 아버지가 대를 이어 연구해 온 모든 것을 파괴할 순 없었어.”
“그래서…… 날 이용했다?”
“미안하지만, 그래. 우리 달봉이…… 이 고양이도 보통 고양이가 아니지? 난 그래서 달봉이에게 힌트를 주었어. 1구역에 머무는 상부의 사람들과 연락하는 척하며 이런저런 주요 정보를 흘렸지. 사실 가짜야. 너도 1구역에 갔다 와봐서 알겠지만 상부의 사람 같은 건 없어. 오로지 나 혼자 슈퍼컴퓨터를 관리할 뿐이지.”
쉽게 믿기 힘든 말이었다.
하지만 설열음의 말은 앞뒤가 모두 들어맞았다.
그녀는 카시아스가 보통의 고양이는 아니라는 걸 알고, 있지도 않은 상부 사람들과 연락하는 척 거짓 정보를 흘렸다.
그리고 그것을 카시아스에게 전해 듣게 된 내가 다운 타운을 멸망시켰다.
모든 것이 그녀가 원했던 그대로 진행되었다.
“그러고 보니 난 네 기억 속에서 달봉이라는 고양이를 본 적이 없어.”
“맞아. 그건 메모리 컨트롤로 지운 게 아니야. 거짓말이었으니까. 난 고양이를 키워본 적이 없어. 그냥 연기한 것뿐. 그런데 나중에는 달봉이가 정말 귀여워지긴 했어.”
“……언제부터 이런 일을 계획한 거지?”
“너와 처음 만났던 날, 네가 있음으로 변하게 되는 내 미래들이 보이면서.”
그러니까 첫 대면에서부터 지금까지 난 설열음의 손에 놀아났다 이 말인 건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하지만 설열음은 내 기분 따위 아랑곳 않고 제 할 말만 해댔다.
“이제 다 끝났어. 내가 널 갖고 논 기분이겠지? 사과할게, 미안해. 그러니 그만 날 죽여.”
“……아니, 죽이지 않아. 끝까지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 마음은 없어. 그렇게 죽고 싶다면 자살을 하든가 해.”
“역시 그럴 줄 알았어.”
뭐야.
이것 역시 예견된 미래였던 건가?
“마지막에 넌 날 안 죽여. 하지만 난 죽어. 그렇지만 자살을 하는 건 아니야. 날 죽이는 사람은…….”
갑자기 붉은빛 한 줄기가 날 스쳐 지나갔다.
아니, 빛이 아니었다.
빠르게 움직여서 그리 생각했을 뿐, 날 스쳐 지나간 그것은 붉은 드레스를 입은 사람, 클리아였다.
클리아는 설열음의 앞에 섰다.
그리고.
푹!
손에 들고 있던 단검으로 그녀의 심장을 찔렀다.
“그래, 클리아. 난 네 손에 죽었어. 이게 내가 본 마지막 미래야. 이제 정말로…… 끝났어.”
환하게 웃는 설열음의 입에서 피가 흘렀다.
그녀의 마지막 순간은 이제껏 그녀를 알고 지내던 중, 가장 맑고 순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털썩.
설열음은 대가 부러진 허수아비처럼 고꾸라졌다.
그녀의 몸이 미세한 경련을 일으키다 빠르게 굳었다.
클리아가 몸을 돌려 날 바라보았다.
“계속 지켜봤어요.”
“알고 있어요.”
그녀는 지금 내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을까?
어떤 말을 하려는 걸까?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었죠.”
“미꾸라지 한 마리가 물을 흐리는 날 말인가요?”
내 농담에 클리아가 피식 웃었다.
“그래요. 이곳의 참 즐거웠는데…… 무언가 이게 아닌 것 같다는 기분은 가슴 한편에서 떠나질 않고 절 괴롭혀왔죠. 다운 타운은 커다란 결핍의 세상 같았어요. 하지만 그 결핍을 직시하지 못하게 만들죠. 본능대로만 행동하다 보면, 모든 근심 걱정을 잊게 되거든요.”
“클리아. 당신은 왜 여기에 왔죠?”
내가 왜 이런 질문을 던진 건지는 모르겠다.
그저, 그녀의 말을 듣고 있자니 절로 나온 질문이었다.
하지만 클리아는 그 질문이 퍽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아주 확실하고 명백하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대답했다.
“나를 궁금해해 줘서 고마워요.”
클리아가 말을 마치며 풍만한 가슴 사이에서 권총 두 자루를 꺼내 들었다.
내 머리를 향하고 있던 두 개의 총구가 엑스 자로 교차했다.
이어, 불을 뿜었다.
탕탕탕탕탕탕탕탕!
“악!”
“끄악!”
“크, 클리아! 미쳤어! 아악!”
클리아는 광장에 있던 모든 이를 쏴 죽였다.
그것은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누구도 클리아가 이런 행동을 할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때문에 대처할 수가 없었다.
다들 죽음을 맞았다.
이제 2구역에 살아남은 이는 나와 클리아, 그리고 카시아스 셋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