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 히어로 146화
조커가 바닥에 떨어진 칼을 주워 들고 천천히 일어났다.
그의 손에 들린 칼이 아름다운 선을 그렸다.
이윽고 훤히 드러난 조커의 가슴에 붉은 선혈이 생겨났다.
횡으로 엷게 벌어진 상처 속에서 붉은 선혈은 쉼 없이 흘러내렸다.
마치 그의 가슴이 한 편의 화폭이 된 것만 같았다.
왜 그렇게 보이는지 모를 일이다.
그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광기의 표출이었다.
한데 난 그것을 받아들였고, 심지어 그것이 아름답기까지 했다.
조커는 엄지로 피를 찍어 살짝 핥았다.
그의 입가에 피처럼 비린 미소가 어렸다.
“절대 변하지 않아.”
마지막 한마디를 킹에게 던진 조커가 뒤돌아 떠났다.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내게 킹은 말했다.
“광기에 물들어 이성을 잃는 것보다 더 무서운 건, 광기를 동경하게 되는 것이네.”
또다시 킹은 나를 현실로 끌어내 주었다.
“광기를…… 동경한다고? 내가?”
오늘 처음 본 사람이다.
그리고 나를 도와줬던 사람이다.
게다가 나보다 훨씬 연륜이 많아 보이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나는 킹에게 아무렇지 않게 반말을 하고 있었다.
더 이상한 건, 이런 내 모습에 그 어떤 거부감도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킹도 딱히 그것을 가지고 뭐라 하지 않았다.
다만, 내 물음에 답해줄 뿐이었다.
“그래. 자네는 이미 조커의 광기를 동경하고 있네.”
“그럴 리가.”
“너무 올바르게만 살아온 사람들의 특징이지. 그들은 사실 가슴속 한편에 일탈을 품고 있다네. 자네 역시 그렇겠지. 그러한 욕망을 차츰차츰 알아간다면 스스로에게 아주 좋은 변화를 가져오지만, 지금처럼 극에 치달은 광기를 마주하게 되면, 정신없이 빨려 들어가 버리지. 그 결과는…… 사람을 극단으로 밀어 넣게 된다네.”
반박할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서는 킹에게 반박하고 싶은 대사들이 소용돌이처럼 맴돌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는 않았다.
“왜 그런 줄 아나?”
“…….”
이제 조커의 모습은 너무 멀어져 작은 점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가 어느 골목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순간.
“극에 치달은 광기는 순수하니까.”
킹의 한마디가 내 뒤통수를 강하게 후려쳤다.
내 시선이 절로 킹에게 향했다.
“순수하다는 것이 무얼까. 티 하나 없이 맑고 깨끗한 것이겠지. 그렇다면 그것은 선(善)이라는 말로 정의된 것들에만 적용할 수 있는 단어일까? 아니지. 조커의 광기도 티 하나 없이 맑고 깨끗하다네. 순수한 광기지. 사람은 순수한 것에 끌리게 마련이네. 심지어 일탈을 가슴에 품고 살았던 자네는 그 순수한 광기에 더더욱 끌리겠지.”
“…….”
대체 뭘까.
여기에 살고 있는 이 사람들은 어떻게 된 이들일까.
내가 2구역에 온 지 하루가 지난 것도, 반나절이 흐른 것도 아니다.
이 작은 도시에서 고작 한 시간 남짓 거닐었을 뿐이다.
그런데 며칠은 여기에 머물렀던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짧은 시간 동안 너무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껴서, 시간이라는 것이 무의미해졌다.
이곳에 사는 인간들은 그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동물 같은 이들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동물이 어때서?
오히려 인간보다 순수한 것이 동물들이다.
스스로의 욕망을 욕망하며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그게 동물이다.
인간은 다르다.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씩 거짓을 말하고 자신을 속이며 가식 속에 살아간다.
그러나 여기에선 그 모든 것들이 사라진다.
거짓과 가식을 벗어던져 버린 순수함의 결정체들이 모여 있다.
조커도 그렇고, 킹도 그랬다.
지나가며 마주친 모든 이들이 그러했다.
무법 지대.
그것은 순수의 지대와 다르지 않았다.
혼란스러웠다.
내가 왜 2구역에 왔는지도 잊어버릴 만큼 어지러웠다.
툭.
킹의 크고 투박한 손이 다시 내 어깨에 얹혀졌다.
“혼란스러워 말게.”
킹은 내 속내를 전부 꿰뚫어 본 듯 말했다.
“자네는 그저 이런 세상도 있구나 하는 것을 알고 받아들이면 그뿐이야. 굳이 자네가 이 세상에 물들 필요도, 그럴 이유도 없네. 자네가 혼란스러워하는 건, 지금까지 생각해 왔던 스스로의 가치관이 무너졌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말일세, 내가 겪는 세상이 내 가치관과 상반된다고 혼란스러울 까닭이 없어. 그럴 수도 있지. 그렇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면, 그뿐이야.”
“하지만…….”
“자네는 새로 전학 간 학교에서 만난 친구들이 그전 학교에서 알고 지내던 친구들과 다르다고 해서, 혼란스러워할 텐가? 혹은 그들을 전에 알던 친구들과 같은 모습으로 바꿔놓으려 할 텐가? 아니면 자네도 그들처럼 바뀌려 할 텐가?”
“아…….”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네. 서로가 서로를 인정함으로써 친목을 다지게 되는 것뿐. 자네가 이 세상을 바꾸지 않아도, 자네가 이 세상에 맞게 바뀌지 않아도, 문제 될 건 아무것도 없네. 자네는 그저 여기에 온 스스로의 목적을 실천하고 가면 된다네.”
킹은 내 어깨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점점 멀어져 갔다.
조커도 킹도 사라지고 난 다시 이 이상한 세상에 혼자 남겨졌다.
마음이 한결 가볍고 편해졌다.
더 이상 혼란스럽지도 어지럽지도 않았다.
길게 느껴졌던 짧은 시간 동안 기이한 꿈을 꾼 듯한 기분이었다.
* * *
내가 여기에 온 것은 제1구역으로 잠입할 방법을 찾기 위해서다.
그것을 다시 상기시켰다.
조커와 킹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냥 돌아가려 했지만, 지금은 조금 더 조사해 보기로 마음을 바꿔먹었다.
여전히 내 주변의 사람들은 스스로의 욕망을 욕망하기에 바빴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똑같았다.
동물의 왕국이 따로 없었다.
난 2구역의 구석구석을 헤집고 다녔다.
그다지 크지 않은 도시는 조금만 걸어도 끝이 드러났다.
이미 한번 확인했던 터지만, 이곳에 1구역으로 갈 수 있는 입구는 어디에도 없었다.
주택가를 빠져나와 다시 광장으로 향했다.
나는 분수대 근처 벤치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광장의 한편에는 커다란 레스토랑이 있었다.
중식, 한식, 일식, 양식, 그리고 그 외 다른 세계 모든 요리들을 파는 곳이었다.
나는 갑자기 허기가 느껴져 식당에 들렀다.
식당 내부는 제법 고풍스러운 분위기로 꾸며져 있었다.
가운데에 넓은 홀이 존재하고, 그 주변으로 3층까지 이어진 테라스가 있었다.
홀과 각 층의 테라스마다 적당한 간격을 두고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테이블의 반 이상은 식사를 하는 손님들로 채워졌다.
난 빈 테이블 아무 곳에나 앉았다.
곧 턱시도를 입은 종업원이 다가와 물었다.
“무엇을 드시고 싶으신가요?”
“무엇이든 있습니까?”
내가 물었다.
종업원이 만들어진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렴요.”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일식 요리가 먹고 싶어졌다.
“돈코츠 라멘 가능합니까?”
“아무렴요. 그걸로 드리겠습니다.”
“아, 가격은 어떻게 하죠?”
주문을 받고 돌아서려던 종업원이 다시 내게 만들어진 미소를 보였다.
“제가 결례를 범했네요. 처음 오신 손님이라는 걸 알았는데도 가장 기본적인 것을 알려드리지 못했으니. 손님, 우리 레스토랑의 모든 음식과 술, 음료는 무료입니다.”
종업원은 다시 뒤돌아 리드미컬한 걸음으로 사라졌다.
“무료라고?”
이렇게 큰 레스토랑을 무료로 운영하다니.
하긴…… 다운 타운이 콜로세움에서 벌어들이는 어마어마한 수입을 생각하면 이 정도 서비스는 아무것도 아니겠지.
난 음식을 기다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러 사람이 함께 앉은 테이블도, 둘이서 단란하게 자리한 테이블도, 나처럼 혼자 온 사람이 고독을 씹고 있는 테이블도 있었다.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다 붉은 드레스를 차려 입은 매혹적인 여인과 눈이 마주쳤다.
여인도 나처럼 혼자였다.
난 시선을 피하려 했는데, 여인이 뜻 모를 미소를 짓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물었다.
“같이 앉아도 될까요?”
딱히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네.”
내 허락이 떨어지자 여인은 교태가 넘치는, 그러나 우아한 몸짓으로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여인의 입술은 그녀가 걸친 드레스만큼 붉었다.
그녀는 테이블에 깍지 낀 손을 테이블에 올려, 그 위에 턱을 괴고 날 바라보았다.
애교살이 도톰한 눈이 보기 좋은 곡선을 그렸다.
“클리아예요.”
“네?”
“제 이름.”
“아, 저는…….”
본명을 말해야 하나?
아니면 여기서 사용하는 닉네임?
잠시 고민한 뒤, 입을 열었다.
“어벤저라고 해요.”
“어벤저…… 많은 무게감이 느껴지는 이름이네요.”
“그렇게 무겁진 않아요.”
“무슨 음식을 주문했죠?”
“돈코츠 라멘이요.”
“일본 요리네요. 저도 즐겨 먹어요.”
난 여인의 외모를 다시 살폈다.
붉은 머리카락, 붉은 눈동자, 커다란 눈과 오뚝한 코. 작고 도톰한 입술, 하얀 피부.
전체적으로 보면 동양인 같기도, 서양인 같기도 했다.
어느 한쪽이라고 확실히 정의 내리기 어려운 외모였다.
이 여자는 왜 갑자기 내게 온 걸까.
무슨 대화를 나누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단순히 호감 때문이었을까?
내가 생각의 홍수에 빠져 있을 때 클리아의 입이 열렸다.
“저한테는 안 물어보세요?”
“네?”
“무슨 음식 주문했는지.”
“아, 무슨 음식을 주문했죠?”
클리아가 고혹적인 미소를 베어 물었다.
그리고 나른한 음성으로 속삭이듯 말했다.
“돈코츠 라멘.”
나랑 같은 메뉴다.
우연인가?
“정말인가요?”
내가 질문했을 때, 좀 전의 종업원이 돈코츠 라멘 두 그릇과 초생강, 락교를 가지고 왔다.
그가 정성 어린 동작으로 가지고 온 음식들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즐거운 시간 되시기를.”
종업원이 떠나자 클리아는 고개를 살짝 꺾으며 얘기했다.
“맞죠?”
“그러네요.”
“처음이죠? 여기.”
“네.”
“드셔보세요. 맛있을 거예요.”
클리아의 권유에 수저를 들고 라멘을 먹었다.
우선 국물을 한 숟갈 떠먹었다.
맛있었다.
면을 맛보았다.
역시 맛있었다.
인스턴트 라멘이 아니었다.
리조네의 절대미각은 이 돈코츠 라멘이 정성 들여 끓인 사골 육수에 수타면으로 만든 것임을 바로 알게 해주었다.
“맛있네요.”
“그렇죠?”
“네. 이렇게 제대로 된 라멘을 만들려면 시간과 정성이 많이 필요할 텐데, 이 레스토랑의 다른 음식들도 기대가 되네요.”
내 말에 클리아가 진정 행복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고마워요.”
“네?”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느닷없이 뭐가 고맙다는 거지?
그러고 보니 그녀는 앞에 놓인 라멘에 손도 대지 않고 있었다.
순간 나는 그녀가 누구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이제 알았네요.”
“무엇을 말이죠?”
“당신이 이곳의 지배인이군요.”
클리아가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그럼 당신도 귀족인가요?”
“네, 당신처럼.”
“이곳은…… 언제부터 관리한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