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 히어로 145화
[흠…… 그래. 그럼 혼자 가지 뭐.]
설열음은 나와 카시아스가 텔레파시를 나누는 동안 간절함이 담긴 시선을 내게 보냈다.
난 마지못해 수긍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정말?”
“그래.”
내 대답에 설열음이 갑자기 날 와락 끌어안았다.
“왜 이래!”
내가 기겁하며 그녀를 밀어내니, 그녀가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역시 넌 좋은 녀석이었어.”
“그만 좀 해라. 고양이 조금 빌려준 것 가지고.”
“아니. 이 고양이…… 보통 고양이가 아니야.”
그리 말하며 설열음이 카시아스를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뭐지?
카시아스의 정체가 들킨 건가?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설열음이 말을 이었다.
“내가 전에 키웠던 고양이랑 정말 많이 닮았어.”
얼씨구?
갑자기 힘이 쫙 빠진다.
설열음은 예전에 고양이를 키운 적이 있다고 했었다.
그리고 그 고양이 이름이 달봉이었다.
그래서 카시아스의 이름도 달봉이라고 지어준 것이다.
아무튼 뭘 눈치챈 건 아니라서 다행이다.
“달봉이랑 즐거운 시간 보내라. 난 2구역으로 갈 테니.”
“그래. 잘 갔다 와. 이왕이면 2구역에서 살인도 하고, 강간도 하고, 강도 짓도 좀 하면서 느긋하게 놀다 와. 그만큼 난 달봉이랑 같이 있을 시간이 늘어나는 거니까.”
……그게 할 소리냐.
설열음과 말을 섞다 보면 나까지 이상한 사람이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무튼 나 간다.”
난 서류 봉투에서 새로운 포털을 꺼냈다.
생김새는 기존의 포털과 똑같았다.
다만 색이 달랐다.
2구역으로 통하는 포털은 황금색이었다.
난 포털을 작동시킨 뒤, 차원의 문을 열었다.
근데 차원의 문을 열자마자 발을 들이기가 싫어졌다.
“저기 설열음.”
“응?”
“속 뒤집어지지 않는 포털은 없냐?”
“그런 거 없어. 최대한 빨리 익숙해지는 게 방법이야.”
“바라지도 않았다.”
난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차원의 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또 한 번 속이 뒤집어지는 경험을 하고 말았다.
제2구역
울렁거리는 속을 달래가며 차원의 문을 통해 2구역에 들어섰다.
“끄으으.”
나는 뱃가죽을 움켜쥐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가 있는 곳은 도시의 광장 같은 장소였다.
그렇게 화려하지도, 그렇다고 소소하지도 않은 광장엔 요란한 복장의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광장의 중앙엔 넓은 호숫가 자리했고, 바닥엔 잔디가 깔려 있었다.
잔디가 없는 곳은 사람이 다니는 길이었다.
광장의 곳곳에는 쉬어 갈 수 있는 벤치가 마련되어 있었다.
광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건물들이 응집해 있는 게 보였다.
그곳이 주택가인 모양이다.
나는 주택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 길지 않은 길을 걷는 동안 별의별 사람과 사건을 다 만났다.
제2구역은 무법 지대이며, 사람의 욕망만이 분출되는 곳이라고 설열음은 말했다.
그 말이 딱 맞았다.
발가벗고 다니는 이들을 보는 건 예삿일도 아니었다.
길거리 한복판에서 낯뜨거운 정사를 벌이는 남녀가 수두룩했다.
그 많은 이들 중 한 남성은 여인과 몸을 섞는 와중 갑자기 나타난 괴한에게 칼을 맞아 쓰러졌다.
그리고 괴한은 짝을 잃은 여인을 강간했다.
여인은 처음에는 괴로워했으나 나중에는 그것을 즐겼다.
이후, 괴한이 극도의 쾌락을 맛본 후, 여인은 괴한의 손에 들린 칼을 빼앗아 괴한의 목을 그어 버렸다.
그리고 칼에 묻은 괴한의 피를 희희낙락하며 핥았다.
정말 온전한 정신으로 있기가 힘든 도시였다.
주택가에 도착했다.
이곳에 지어진 집들은 그리 크지 않았다.
잘 쳐줘야 열다섯 평 남짓.
그런 집들이 빼곡하게 붙어 열을 지어 있었다.
주인이 있는 집에는 문패가 걸려 있었고, 주인이 없는 집에는 문패가 없었다.
아직 팔리지 않은 집인 것이다.
주택가에 존재하는 주택은 대략 삼백여 채 정도 되어 보였다.
그중 이백여 채 정도가 팔려 나갔다.
남은 주택은 백 채도 안 된다.
그러니 귀족들이 콜로세움에서 어떻게든 돈을 따기 위해 혈안이 되는 것이다.
‘제2구역은 광장과 주택가로 나뉘어 있어.’
그 외에 다른 특별한 점은 찾을 수가 없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1구역으로 통하는 입구 같은 것도 존재치 않았다.
기껏 역한 멀미를 참으며 왔건만 이렇다 할 수확이 하나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다음을 기약해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던 와중 누군가가 내게 다가왔다.
얼굴이 새하얀 중년의 백인이었다.
그는 입꼬리를 쫙 찢은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차림새는 꼭 중세 시대의 귀족을 보는 듯했다.
터벅터벅 내 앞까지 걸어온 그가 말했다.
“내가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아나?”
“글쎄.”
새하얀 백인이 고개를 모로 꺾었다.
그는 내 전신을 빠르게 훑고 다시 말했다.
“널 죽일까 말까 고민하는 중이야. 왜 고민하는 걸까? 왜 그러는 걸까?”
“글쎄.”
난 계속 같은 대답만 내놓았다.
만약 지상에서 이런 일을 겪었다면 그냥 무시해 버렸을 것이다.
누가 봐도 이 사람은 정상인의 범주에서 벗어난, 미치광이나 다름없었으니까.
하지만 제2구역은 다르다.
여기에 있는 모든 이들은 미쳐 있다.
바보들의 세상에선 정상인 사람이 바보 취급을 당한다.
지금의 내가 딱 그렇다.
“그러지 말고 고민해 봐, 응? 재미있잖아. 내가 널 죽이고 싶다고 말했잖아. 그런데 반응이 왜 그렇게 미적지근해? 더 죽이고 싶어지잖아.”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화도 나지 않는다.
저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건가?
난 새하얀 백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도 슬슬 널 죽이고 싶어지니까 더 이상 화 돋우지 않는 게 어때?”
그러자 새하얀 백인이 턱을 쩍 벌리고 과장된 포즈로 웃어젖혔다.
“아하하하하하하하하! 아하하하! 아하! 아하하하하하하!”
고개를 뒤로 잔뜩 꺾고 한참 동안 웃던 백인이 갑자기 웃음을 딱 그쳤다.
“죽이고 싶어? 나를? 왜? 나의 어떤 말이 널 화나게 했지? 아니면 내 태도 때문인가? 그것도 아니면 외모가 맘에 안 들어서? 내가 백인이라서? 인종차별자인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은 확실하게 해줄 수 있다.
“네가 먼저 날 죽이고 싶다고 했으니까.”
“아하! 그런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렇지. 그럴 수 있지. 근데 네가 날 죽일 수 있을까? 응? 난 내가 널 죽일 수 있을 것 같은데? 아, 그 전에 내가 널 왜 죽이고 싶어 했는지에 대해서 들어봐. 아주 간단한 이유야. 딱 봐도 네가 이곳을 처음 방문한 촌뜨기 같거든! 그래서 죽이고 싶었어!”
그게 어떻게 죽이고 싶은 이유가 되는 걸까.
이 녀석은 그저 내게 시비를 걸고 싶었던 게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는 것조차도 시간 낭비인 것 같다.
“귀찮으니까 그만하고 네 갈 길 가라.”
“아니, 아니. 그럴 순 없지. 나는 널 죽이고 싶고, 너도 날 죽이고 싶어 하잖아? 그러니까 우리 둘 중 한 명이 죽기 전까지는 누구도 움직일 수 없어.”
난 새하얀 백인을 사납게 쏘아봤다.
“그럼 네가 죽으면 되겠네.”
“그래? 어떻게 죽일 건데? 한번 해봐! 응? 해보라고!”
녀석이 두 손으로 상의를 잡고 확 당겼다.
그러자 단추가 두두둑 튿어지며 털이 덥수룩한 맨가슴이 드러났다.
“여기를 칼로 찌를 건가? 하지만 칼은 갖고 있지 않은 것 같은데?”
“칼은 없지만 널 죽이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지.”
턱.
새하얀 백인의 목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새하얀 백인이 칼로 내 손목을 내려쳤다.
캉!
하지만 칼날은 내 피부에 흠집도 내지 못했다.
새하얀 백인의 얼굴에 광기 어린 미소가 걸렸다.
“크으…… 켁! 크흐흐! 재미있…… 어……!”
녀석은 숨이 턱턱 막히는 와중에도 웃음을 흘렸다.
광인이다.
정상이라고 할 수 없다.
죽여야 한다, 이런 녀석은.
꾸우욱!
새하얀 백인의 목을 쥔 손에 더 힘이 들어갔다.
“끄르르르…….”
새하얀 백인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
이제 조금만 더 힘을 주면 놈의 목이 부러질 참이었다.
그런데.
턱.
누군가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고, 난 새하얀 백인을 놓아주었다.
새하얀 백인은 땅에 털썩 쓰러져 목을 잡고 켁켁댔다.
하나, 그 와중에도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제야 난 내 정신을 되찾아준 이를 바라보았다.
그는 거대한 덩치의 털보였다.
그 역시도 백인이었다.
걸치고 있는 옷은 다른 인간들에 비해 그나마 수수한 편이었다.
청바지에 운동화, 그리고 위에는 맨살에 슈트 하나만 걸치고 있었다.
털보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그의 입에서 걸쭉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타인의 광기에 물들어 이성을 잃지 말게.”
……그랬다.
난 딱히 저 새하얀 백인을 죽일 이유가 없었다.
평소의 나라면 절대 이런 자리에서 사람을 죽이겠다는 마음은 먹지 않았을 것이다.
콜로세움에서야 어쩔 수 없었지만…….
아니, 정말 어쩔 수 없었었나?
그때부터 나는 계속 타인의 광기에 물들어가고 있었던 게 아닌가?
갑자기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졌다.
털보의 시선이 새하얀 백인에게 향했다.
“조커!”
새하얀 백인을 털보는 조커라고 불렀다.
조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서 털보를 바라보았다.
“또 쓸데없이 나서는군, 킹.”
킹.
이 사람의 이름이 킹인가 보다.
“그렇게 죽고 싶다면 네 손에 든 칼로 네 심장을 찔러라! 남에게 살인의 무게를 덮어씌우려 하지 마라!”
킹이 호통치자 조커는 키들거리며 웃었다.
“크크큭! 내가 왜? 뭣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하지? 아, 물론 죽고 싶은 건 맞아. 그 망할 콜로세움에서 모든 재산을 탕진했고, 제2구역에 집을 사겠다는 꿈같은 건 잡을 수 없는 망상이 되어 버렸지. 난 다 잃었어. 전부 잃어버렸단 말이야? 그런데 내 손으로 내 목숨까지 끊으라고? 아하하하하하! 이봐, 킹! 남의 일이라고 너무 쉽게 얘기하는 거 아니야?”
그랬군.
조커는 애초부터 날 죽일 생각이 아니었다.
자기를 죽여주길 바라고 시비를 걸었던 것이다.
킹은 조커의 멱을 잡아 위로 확 들어 올렸다.
그리고 자신의 얼굴을 조커의 얼굴에 바짝 들이댔다.
“조커, 넌 크게 착각하고 있어. 진정 타인의 손에 죽으면 좋을 것 같나? 그건 타인이 네 생명을 빼앗는 짓이야. 넌 여태껏 모든 것을 빼앗겼다 생각하고 살아왔지. 그런데 남은 네 목숨마저도 타인에게 빼앗기겠다는 건가? 어리석기 그지없군.”
킹이 조커를 바닥에 내던졌다.
털썩.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조커가 다시 일어날 생각도 않고 웃었다.
“크크크큭. 어리석다? 그래 맞아.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말이야, 킹. 세상 모든 이가 전부 어리석어. 신 아래 존재하는 인간들은 전부 똑같단 말이야. 어차피 도토리 키 재기야. 거기서 거기라고. 내게 그럴듯한 논리를 들이대서 억압하려 하지 마. 네가 뭐라 해도 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