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 히어로 140화
라헬이 손가락을 딱 튕겼다.
그러자 내 앞에 아주 익숙한 아티팩트 하나가 나타났다.
영롱한 빛을 품고 있는 자두만 한 크기의 동그란 구슬.
그건 바로 루의 후회 퀘스트를 하다 보았던 ‘영혼의 보옥’이었다.
마제스의 신전에 모셔두고 꼭꼭 감춰두었던 바로 그 신물이다.
“영혼의 보옥?”
“그렇습니다, 지웅 님. 제가 지웅 님께 보여 드린 아티팩트는 바로 영혼의 보옥입니다! 이 보옥의 능력에 대해서는 잘 알고 계시겠죠?”
“알지.”
직접 루가 되어 영혼의 보옥을 집어 삼켰던 나다.
그 능력을 모를 리가 없다.
보옥의 능력은 원하는 이의 기억을 읽게 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거 루가 먹은 거 아니야?”
내 물음에 라헬이 검지를 좌우로 흔들었다.
“루가 보옥을 먹었던 건 현실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랍니다. 지웅 님께서 퀘스트를 진행하며 가상의 공간에서 먹었던 것이지요.”
“아, 그렇지.”
내가 머리를 탁 치니, 라헬은 바로 아부를 떨었다.
“역시 지웅 님은 완벽하시네요. 갖출 것을 다 갖춘 분이 이런 백치미까지!”
어째 이번 건 단순한 아부라기보다는 나를 좀 비꼬는 것 같지만 넘어가자.
“그래서 가격은 얼마야?”
라헬은 여전히 뒤로 누워 다리를 올린 자세로 전혀 힘들어하는 기색 없이 대답했다.
“마제스의 신전에서 고이 모셔져 왔던 영혼의 보옥은 단돈! 20만 링크입니다!”
라헬이 가격을 부르면 일단 의심부터 하고 봐야 한다.
내가 링크를 많이 들고 왔을 때 지극히 공손해지는 건 맞지만 지독한 수전노, 장사치의 기질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안 사.”
“후회 안 하시겠어요? 영혼의 보옥이라구요, 지웅 님. 이게 얼마나 좋은 아티팩트인지 잘 아시잖습니까요? 헤헤헤.”
“가격이 터무니없이 비싸. 20만 링크라니? 절대 안 사.”
“좋습니다! 특별히 사분의 일 디스카운트해서 단돈 15만 링……!”
“꺼져.”
“……그럼 얼마를 원하시는지 제시 좀 해주시면 안 될까요?”
“8만 링크.”
내 말에 누워 있던 라헬이 벌떡 일어나서 입을 쩍 벌렸다.
“지웅 님. 그건 너무한 처사입니다. 저도 이문이 남아야 장사를 하죠.”
“9만 링크. 더는 안 돼.”
“그럼…… 14만 9999링크 어떠신지?”
“장난해? 기분 잡치는데 그냥 돌아갈까?”
내가 휙 뒤돌아서자 라헬이 내 옷깃을 덥석 잡았다.
“아이고, 왜 이러십니까요. 제가 감히 지웅 님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면 백번 사죄드리겠습니다! 그럼요!”
“그럼 얼마까지 줄 건데?”
“14만 링크면 어떻겠습니까?”
계속 가격을 깎는 걸 보니 애초부터 높게 부른 모양이다.
난 라헬의 눈을 쏘아보며 날카롭게 말했다.
“야, 솔직히 말해.”
“네? 뭐를 말입니까?”
“원가 얼마야.”
“하아, 알겠습니다. 역시 지웅 님은 속일 수가 없군요. 영혼의 보옥은 사실 13만 5천 링크입니다아.”
라헬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서 한숨을 푹 쉬었다.
“어떻게 이문 좀 더 남겨먹으려고 했는데, 역시 지웅 님은 속일 수가 없네요.”
웃기고 있네.
내가 13만 5천 링크가 원가라고 하면, 아 그렇구나! 하고 넙죽 줄 줄 알았냐?
“13만 링크!”
“오케이 콜!”
“뭐라고?!”
“감사히 받겠습니다~!”
라헬이 희희낙락하면서 영혼의 보옥을 내게 넘겼다.
완전히 당했다.
녀석의 표정을 보니 계획대로 되었다는 얼굴이었다.
13만 링크도 아마 엄청나게 높게 부른 모양이다.
“하아.”
호구가 된 고객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한숨뿐이구나.
남은 건 18만 링크.
“그럼 지웅 님께서 살 수 있는 영혼들을 보여 드리도록 하지요~ 영력을 40까지 올려 오셨으니, 딱 거기에 걸맞은 놈들도 준비하겠습니다요~”
라헬이 손가락을 튕겼다.
녀석의 앞에 11개의 영혼들이 나타났다.
“우선 11,000링크의 영혼들부터 소개하겠습니다~ 왼쪽에 있는 영혼의 이름은 알렉사. 능력은 ‘체인지 애니멀’이랍니다.”
“능력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봐.”
“뭐, 말 그대로입니다. 원하는 동물로 변신할 수 있는 능력이죠~ 어떤 동물이든 자신이 한 번이라도 봤던 동물이라면 전부 변신할 수 있어요.”
그건 나쁘지 않은 능력인데?
“알렉사는 살아생전 이 능력으로 1인 서커스단을 운영하며 많은 돈을 벌었죠. 나중에는 작위까지 사게 되었답니다. 그리고 모국과 다른 국가 간에 전쟁이 터졌을 때는, 여러 가지 동물로 변신해 적진의 동향을 파악하고 옴으로써 모국이 승전보를 올리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우기도 했지요. 국왕은 그를 전쟁 영웅으로 임명하기까지 했답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억울하게 죽었겠지?”
“빙고. 아주 어이없고 비참하게 죽었지요. 알렉사의 취미는 새로 변신해 나무에 앉아 다른 새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바람을 음미하는 것이었지요. 하루는 궁전에서 새로 변신해 다른 새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전날 숙취로 머리가 너무 아팠던 국왕은 조잘조잘 쉬지 않고 떠드는 그 새가 알렉사인지도 모르고 화살로 쏴 죽였답니다.”
“……뭐? 알렉사는 왜 안 피한 거야?”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몰랐을 가능성이 높겠죠. 알렉사의 능력은 동물로 변하는 것뿐이랍니다. 기본적으로 육신의 능력이 뛰어나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죠. 더불어 원하는 동물로 변하고 나면 육신의 모든 기능이 변한 동물과 똑같아집니다. 그 시절에 활로 새를 잡는 거야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이었지요. 게다가 국왕은 사냥에 일가견이 있었답니다~”
“그래서 화살에 맞아 죽었다?”
“그렇지요. 하지만 한편에서는 이런 이야기도 들려오곤 한답니다. 국왕은 그 새가 알렉사인 줄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알렉사를 중하게 썼지만, 그의 입지가 빠르게 커지자 두려워 한 국왕이 숙취를 핑계로 알렉사를 죽여 버렸다는 것이죠.”
“신빙성이 있는 추측이야?”
“국왕은 전날 밤 그렇게까지 과음하지는 않았다는 하인들의 증언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나중에서야 그 사실을 털어놓은 것이지만.”
하여튼 이래저래 황당한 죽음을 맞는 이들이 많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라헬이 했던 후자의 얘기가 더 진실이 아닐까 싶다.
이미 난 그 세계를 살아가는 여러 인물에게 동조화된 경험이 있다.
해서 데브게니안 대륙의 귀족들이 얼마나 지독하고 냉정한지 잘 알고 있다.
“좋아, 다음.”
“오른쪽에 있는 영혼의 이름은 키르윤. 능력은 일루전이랍니다. 사람에게 환상을 보여주죠. 아주 리얼하고 사실 같은 그런 환상을 말이에요. 키르윤은 이 능력으로 숱한 사람들을 미쳐 버리게 만들었답니다.”
“키르윤은 뭐하던 인간이었지?”
“딱히 직업은 없었답니다. 돈이 필요하면 아무 집이나 들어갔지요. 그리고 집주인을 지독하게 무서운 환상 속에서 헤매게 하고 금품을 훔쳤지요. 그러니 직업이랄 게 딱히 뭐가 필요했을까요?”
“그렇겠네. 근데 환상이나 최면이나 비슷한 능력 아니야?”
내겐 이미 캐러반의 능력인 최면술이 있다.
그리고 해결하기 까다로운 의뢰 하나를 최면술의 도움으로 깔끔하게 해결했었다.
거짓을 진실되게 만든다는 점에서 환상은 최면과 비슷한 게 아닐까?
내 물음에 라헬은 검지를 세워 양옆으로 흔들었다.
“다르답니다.”
“어떻게?”
“최면은 내가 상대의 의식 속으로 침투해 그를 변화시켜 놓는 것이랍니다. 즉 내부를 바꿔 버리는 것이죠. 하지만 환상은 사람의 내부를 바꿔 놓진 못한답니다. 외부의 모든 것들을 바꿔 버림으로써 상대방을 현실 인지 불능 상태로 만드는 거지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
라헬이 시선을 따로 그룹 지어진 두 개의 영혼으로 돌렸다.
“이 영혼들은 13,000링크와 35의 영력이 필요하답니다. 오른쪽 영혼의 이름은 바넷사. 능력은 화 속성 상급 마법 인페르노(Inferno). 그는 떠돌이 방랑 마법사였답니다. 재산이 산처럼 많거나 명망 높은 귀족은 아니었지만 삶의 행복 지수로 따지자면 누구보다 행복한 인생을 살았던 이였죠. 그는 평생을 여행자로 살면서 그 무엇으로부터도 자신을 억압하지 않았으니까요.”
이제 불행한 과거가 나올 차례겠지.
“하지만 죽음에 이르는 순간 자신의 흔적을 남길 존재가 없다는 것이 한탄스러웠던 거죠. 바넷사에겐 자식이 없었거든요. 아, 남자가 아닌 여자였답니다.”
“그게 한이 돼서 레이브란데와 계약을 맺었다?”
“그렇죠.”
만약 바넷사의 영혼의 퀘스트를 하게 되는 날엔 애 하나라도 낳아줘야 할 분위기군.
그건 절대 사양이다.
“그 옆에 영혼은?”
“이 영혼의 이름은 로캄. 능력은 수 속성 상급 마법 샤워(Shower)랍니다. 왕실마법사였고 전쟁에서도 혁혁한 공을 세웠죠. 재산도 많았고 명성도 드높았답니다. 하지만 그는 마법사들의 전당인 빛의 탑에 평생 한 번도 발을 들일 수 없었죠.”
“왜?”
“로캄은 뱀파이어와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하프 뱀파이어였으니까요. 그렇다고는 해도 그에게 흡혈의 욕구가 있는 건 아니었죠. 뱀파이어처럼 반영구적인 삶을 사는 존재 역시 아니었구요. 햇빛을 두려워하거나 성수에 맞으면 몸이 타들어 가지도 않았답니다. 뱀파이어보다는 인간의 유전자를 더 많이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이죠. 그래서 왕실에서는 그를 왕실마법사로 들였으나, 빛의 탑에서는 뱀파이어의 피가 섞인 로캄을 동료로 인정하지 않았답니다.”
하프 뱀파이어라.
특이한 경우이긴 하군.
하지만 뱀파이어보다 인간에 더 가까운데 매몰차게 내치는 건 좀 너무한 처사가 아닌가 싶다.
“오케이. 다음.”
라헬이 따로 무리 지어 있는 세 개의 영혼을 가리켰다.
“이 영혼들은 15,000링크와 37의 영력이 필요하답니다. 왼쪽부터 소개해 드리죠. 이름은 샤를라임. 능력은 지 속성 상급 마법 어스(Earth)랍니다. 그 옆에 있는 영혼의 이름은 메이, 능력은 풍 속성 상급 마법 스톰(Storm)이지요. 마지막 영혼의 이름은 라이. 능력은 뇌 속성 상금 마법 썬더(Thunder)고, 메이와 자매지간이랍니다.”
“셋 다 마법사네?”
“네. 그런데 이들은 살아생전 아주 악명 높은 사악한 마법사들이었어요. 셋이 늘 무리 지어 다니며 못된 짓이란 못된 짓은 전부 벌이고 다녔죠. 세상 사람들은 그들을 다크메이지(Dark Mage)라고 불렀답니다.”
“그런데 왜 레이브란데와 계약했대? 죽는 순간 지금껏 벌인 악행이 후회되기라도 했나?”
라헬이 손가락을 딱 튕겼다.
“빙고!”
“……맞아?”
“그렇답니다. 사실 그들에겐 각각 한 명의 자녀가 있었더랬죠. 게다가 전부 아들이었어요. 당연한 얘기지만 남편도 있었구요. 그런데 국가에서 이 다크메이지들에게 대대적인 토벌령을 내린 뒤, 큰 전쟁이 발발했는데, 그때 남편과 아이가 모두 죽임을 당하고 말았죠. 다행스럽게도 세 마법사는 전부 살아남았답니다. 하나, 핏줄을 잃은 슬픔에 살아도 사는 게 아닌 하루하루가 반복되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