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 히어로 131화
“일 안 하세요. 가끔 막노동 같은 거 나가시긴 해요.”
“그럼 계속 집에 있는 거야?”
“누가 술 사준다 그러면 나가고…… 그렇지 않으면 집에서 술 마셔요.”
술?
아버지가 술을 좋아한다고?
“혹시…… 민지야. 아버지가 술을 마시지 않았을 때도 엄마한테 손찌검 하고 그랬니?”
민지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니요. 술 안 마시면 절대 안 그러셔요. 오히려 매일 엄마랑 나한테 미안하다고만 하시죠. 그런데 술만 들어가면 거칠어져요. 문제는 술이 깨어 있을 때보다 취해 있을 때가 더 많다는 거예요.”
“결국 술이 문제네.”
“……네.”
일단 가정 폭력을 근절하려면 민지 아버지가 술을 끊게 만들어야 한다.
사실 이게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난 이것을 쉽게 해결할 수 있다.
이번에 새로 산 능력 중 아주 유용한 것이 있었으니까.
이제 남은 건 엄마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민지야. 일단 민지네 집으로 가자. 안내 좀 해줄래?”
“네.”
뜻밖의 사람
민지를 따라서 민지네 집에 도착했다.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들이 가득한 작고 복잡한 동네의 한편에 민지의 집이 있었다.
민지는 이른바 판자촌이라 불리는 동네의 허름한 집에서 살고 있었다.
어른은 허리를 굽히고 들어가야 하는 낡은 철문이 민지의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였다.
“안에 아버지가 계시니?”
“어젯밤에 안 들어오셨는데…… 지금은 들어오셨는지 모르겠어요.”
난 집 안에서 들리는 소리에 집중했다.
하지만 집 안은 고요했다.
누군가의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민지의 아버지가 아직 귀가하지 않은 것이다.
“내 예감에 아직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은 것 같다, 민지야.”
“제가 볼게요, 잠깐만요.”
민지가 문손잡이를 잡아당겼다.
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잠겨 있는 모양이다.
“아빠 아직 안 들어오셨어요.”
“어떻게 알아?”
상덕이가 물었다.
“아빠는 집에 들어와서 문단속을 하는 법이 없거든요. 근데 잠겨 있잖아요. 제가 아침에 학교 올 때 잠그고 나왔거든요.”
그렇구나.
민지는 열쇠로 잠긴 문을 열었다.
우리는 민지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섰다.
“실례하겠습니다.”
상덕이가 예의상 허공에다 말을 흘렸다.
민지의 집 내부는 무척 좁았다.
거실과 쪽방 하나, 화장실 하나가 달린 아주 작은 집이었다.
거실과 방에 놓인 가구들도 별게 없었다.
텔레비전과 냉장고, 이불장과 옷장.
큰 가구는 그게 전부였다.
싱크대에 식기류도 가짓수가 적었다.
어찌 되었든 난 방에 있는 물건들에서 사라진 엄마의 행방에 대한 힌트를 얻어야 했다.
“민지야. 엄마가 자주 입었던 옷이 뭔지 아니?”
“네.”
“그것 좀 보여줄래?”
“왜요?”
“의외로 그런 데서 힌트가 나오기도 하거든. 이를테면 주머니를 뒤져 봤더니 엄마가 생전 가지 않았던 장소의 입장권 같은 게 나온다든가.”
“입장권?”
“이를테면…… 동물원이나 영화관 같은?”
“아…….”
뭔가 좀 백 퍼센트 납득이 어려운 설명이었다.
급하게 지어내려다보니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아직 순진한 민지는 이 어설픈 설명에도 다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옷장을 열었다.
민지가 망설임 없이 원피스 하나를 골라 내게 가져왔다.
“이게 엄마가 가장 자주 입던 거예요.”
“오케이.”
자, 이제 씰의 능력 사이코메트리를 시전해야 할 때다.
‘제발 여기에 단서가 있어야 할 텐데.’
사이코메트리는 1일 1회 제한이 걸리는 능력이다.
만약 원피스에서 별다른 기억을 읽어내지 못한다면 민지의 엄마를 찾는 일은 내일로 미뤄야 할지도 모른다.
난 민지가 준 원피스의 주머니를 뒤지는 척하며 낮게 읊조렸다.
“사이코메트리.”
순간 원피스에 각인된 기억들이 내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쫙 펼쳐졌다.
그 옷을 입은 민지 어머니의 얼굴이 보였다.
민지만큼이나 예쁜 얼굴이었다.
모전여전이라더니.
민지 어머니는 이 옷을 입고 일을 나간 적은 없었다.
주로 가족끼리 외식을 하거나, 나들이를 가거나 그럴 때 즐겨 입었던 것 같다.
한데…… 가족이 보이지 않는 장소에서도 이 옷을 입고 있었다.
민지와 민지 아버지가 아닌 어느 늙은 할아버지와 작은 단칸방에서 민지 어머니는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디지?
저기가 어디인 거야?
나는 원피스에 담긴 민지 어머니의 기억을 열심히 뒤적였다.
그러자 민지 어머니가 홀로 어딘가를 향하는 영상이 떠올랐다.
집에서 나와 판자촌을 떠나, 십 분 정도를 걸어서 다른 동네에 들어서더니 작은 단독주택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단독주택 1층 측면에 딸린 작은 방으로 향했다.
바로 거기에 늙은 할아버지가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는…… 민지 어머니의 친아버지였다.
“…….”
거기까지. 원피스에 담긴 기억은 더 읽을 수 없었다.
‘민지 어머니의 친아버지가 가까운 곳에 살고 있다고?’
민지는 자기 어머니는 외가 쪽과 인연을 끊다시피 하고서 아버지와 결혼했다고 말했다.
그럼 이 상황은 뭐가 어떻게 된 것일까?
‘어쨌든 민지 어머니가 친아버지와 함께 있을 가능성이 높아.’
물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일단 찾아가 봐야겠다.
“민지야.”
“네?”
“내가 급하게 어딜 좀 갔다 와야 할 것 같아. 그러니까 민지는 여기 있는 상덕이 오빠랑 같이 밖에서 영화라도 보고 있어.”
“아…… 저 아빠 오시기 전에 국 끓여놔야 하는데.”
“밥?”
“네. 아빠는 국 없으면 밥을 잘 못 드세요. 항상 해장을 하고 싶다고 하시거든요.”
하아.
이 어린 것이 벌써부터 주방에서 아빠 밥상 차릴 걱정을 하다니.
“그건 내가 해결해 줄게.”
난 냉장고를 열었다.
그리고 쓸 만한 재료들을 꺼냈다.
내가 꺼낸 재료들은 계란, 쪽파, 양파, 다시마, 건멸치, 건표고버섯이었다.
그것을 가지고 싱크대로 오니 민지가 다가와 물었다.
“국 끓이시게요?”
“응. 소금이랑 후추는 있지?”
“네.”
민지가 싱크대 옆의 서랍을 열어 소금과 후추를 꺼내 주었다.
“됐어. 이거면.”
“그걸로 무슨 국을 끓이시게요?”
“잘 봐. 별거 아닌데도 끝내주게 맛있을 테니까.”
난 칼을 들어 쪽파는 잘게 썰고 양파는 껍질을 한 겹만 벗긴 뒤 반을 딱 잘랐다.
그리고 냄비에 물을 넉넉히 받아 건멸치, 건표고버섯, 다시마, 두 조각 낸 양파를 넣고 육수를 우렸다.
그러는 동안 계란 두 개를 그릇에 탁 깨서 잘 풀었다.
계란에는 소금 간을 아주 약하게 했다.
이거면 일단 기본 준비는 끝났다.
아울러 이 요리의 장점은 기본 준비를 끝내는 순간 요리의 팔십 퍼센트가 완성된다는 것이다.
이제 육수가 제대로 나올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보글보글.
시간이 조금 흐르고 물이 끓었다.
그 상태로 오 분가량 더 있다가 육수 재료들을 꺼내서 버리고 풀어놓은 계란을 육수에 빙 두르듯이 끼얹었다.
그다음 젓가락으로 살살 저어주니 계란이 예쁘게 퍼지며 아주 부드럽게 익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잘게 썬 쪽파를 넣고 조금 더 끓인 뒤, 소금으로 간을 하고 후추로 풍미를 더했다.
그렇게 간편한 계란탕이 완성되었다.
민지는 내 옆에서 눈을 초롱초롱 빛내고 있었다.
“와…… 오들리 님 정말 요리 잘하시네요?”
“맛 좀 볼래?”
“네!”
“응!”
난 민지한테 말한 건데 상덕이까지 달려든다.
숟가락으로 국을 조금 퍼서 후~ 불어 민지의 입에 넣어주었다.
국을 맛본 민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와~ 정말 맛있어요!”
“그치?”
“네!”
“자, 이제 국도 완성했으니 나가볼까?”
그러자 상덕이가 한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나는 안 줘?”
“좀…… 적당히 좀 하자, 인간아.”
“에이씨.”
상덕이의 덜떨어진 행동을 본 민지가 픽 하고 웃음을 흘렸다.
하여튼 상덕이의 저런 면이 가끔은 분위기 전환에 도움이 된다는 게 아이러니다.
* * *
민지를 상덕이에게 맡겨놓고 나는 원피스의 기억 속에서 보았던 집을 찾아갔다. 아마도 민지 어머니의 친아버지는 이 저택의 단칸방에서 월세살이를 하고 있는 듯했다.
일단 여기에 민지 어머니가 있는지 없는지부터 알아내야 한다.
“투명화.”
루의 능력 투명화로 내 모습을 감췄다.
가볍게 월담을 한 다음, 건물의 우측으로 돌아갔다.
기억 속에서 봤던 작은 쪽문이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투명화를 했다고 한들 그 문을 그냥 열고 들어갈 순 없었다. 그래서 그림자에 동화하기로 했다.
“섀도우 워커.”
내 몸이 문틈 사이에 드리워진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림자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간 다음 그림자에서 빠져나왔다. 어차피 투명화 상태인지라 그림자에서 빠져나와도 상관없었다.
작은 단칸방 안에는 민지의 어머니와 그 어머니의 친아버지가 나란히 이불을 덮고 앉아 텔레비전을 보는 중이었다.
‘빙고!’
민지의 어머니 행방은 찾았다.
그러나 내가 어머니를 데려가려고 한들 절대로 따라오려 하지 않을 것이 뻔했다.
오히려 날 이상한 사람 취급하겠지.
‘민지의 아버지가 어머니를 데려오도록 만들어야 해.’
그게 최상의 시나리오다.
난 다시 섀도우 워커를 시전해서 단칸방을 빠져나온 뒤, 저택의 담장을 넘었다.
‘이제 아버지를 찾아서 설득해야 할 때군. 아니, 설득이 아니지. 술 먹으면 개 되는 인간 강제 교화시키는 거지.’
* * *
민지의 아버지를 만나려면 민지의 집에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민지도 아버지가 어디에 계시는지 모르니 말이다.
민지의 집으로 향하던 중에 상덕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영화 잘 보고 있냐?
바로 답장이 왔다.
―응.
―뭐 보냐.
―…… 어린이 애니메이션.
―ㅋㅋㅋㅋㅋ
―왜 웃어?
―아니, 너 고생할 게 뻔히 보여서. 재미없겠다.
―재미있는데?
―…… 재미있다고?
―응.
―민지도 재미있게 봐?
―아니. 조금 전에 살짝 따분하다 그랬어.
―그럼 나와서 다른 거 하고 놀아, 인마.
―싫어. 내가 재미있어.
……아니 뭐 이런 덜떨어진 놈이 다 있어?
―민지 하고 싶은 대로 좀 따라줘.
―야. 지금 한창 이야기 본론으로 진입하는 중이니까 이제 메시지 보내지 마.
―이 새끼야, 네가 애냐? 민지 의견 좀 잘 따라주라니까!
―즐.
즈, 즐?
이 자식 이거 어느 시대에서 온 놈이야?
즐이라니?
그게 언제 적 유행언데…… 하여튼 종잡을 수 없는 인간이다.
* * *
민지의 집에 도착했다. 문이 잠겨 있는 걸로 봐서 민지의 아버지는 아직도 집에 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난 집 앞을 서성거리며 계속 시간만 보냈다.
그렇게 한 시간쯤 지났을 때였다.
부다다다다당―
저 멀리서부터 시끄러운 바이크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더니 검은색 바이크 한 대가 맹렬한 속도로 달려오더니 내 앞에서 급정거했다.
‘뭐야?’
난 놀라서 바이크를 몰고 있는 사람을 슥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