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일리 히어로-127화 (127/153)

데일리 히어로 127화

그러고서 이연희는 내 뺨에 입을 쪽 맞췄다.

순간 이성재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유미란은 그런 줄도 모르고서 박수를 쳐 댔다.

“꺅~ 너무 타오르신다, 두 분. 그럼 좋은 시간 보내세요.”

“네~ 그쪽두요.”

이후로 난 이연희와 연인인 척 연기를 하며 술자리를 즐겼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성재의 표정은 점점 더 안 좋아졌다.

말수도 확 줄었고 계속해서 이연희를 신경 쓰기 시작했다.

그러다 결국 유미란이 성을 냈다.

“성재 씨! 지금 나 앞에 두고 뭐하는 거예요? 나랑 있는 거 지루해요?”

“응? 아, 아니. 그런 거 아닌데.”

“됐어요. 저 갈게요. 내일 연락해요.”

유미란은 벌떡 일어나 바람처럼 술집을 나갔다.

그러자 이성재가 우리 쪽으로 다가와 이연희에게 말했다.

“저기…… 잠깐 얘기 좀 하자.”

“무슨 얘기? 여기서 해. 아니지, 나랑 얘기하기 전에 네 애인부터 잡으러 나가야 하는 거 아니야?”

“됐고, 얘기 좀 해.”

“싫어.”

이성재는 이를 빠득 갈더니 이연희의 팔목을 확 잡아당겼다.

“아! 아파! 왜 이래!”

“잠깐만 얘기 좀 하자고!”

하, 저 새끼 안 되겠네.

지가 바람피워서 자기 여자 버릴 땐 언제고, 이제 딴 남자 품에 안겨 있으니까 질투 난다 그거야?

더러운 새끼.

“이거 안 놔?”

“나오라고!”

난 벌떡 일어나 이성재의 멱을 틀어쥐어 내 쪽으로 확 당겼다.

이성재가 반사적으로 반항하려 했지만 감히 내 힘을 어쩌진 못했다.

“뭐, 뭐야!”

“뭐긴 뭐야, 연희 남자 친구지, 씨팔새끼야.”

“지금 욕했냐?”

“그럼 넌 지금 내 여자 건드렸냐? 한번 이 자리에서 뒤져 볼래?”

난 이성재의 눈을 매섭게 노려봤다.

이성재는 그런 내 시선을 마주 보려 하다가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기 싸움에서 대번에 밀린 것이다.

“한 번만 말한다. 연희 놔라. 안 그러면 당분간 밥 못 씹게 만들어준다.”

이성재가 바들바들 떨다가 이연희의 팔목을 놓았다.

난 이성재의 멱을 휙 밀치며 놓았다.

쿠당탕!

이성재가 비틀거리다가 볼썽사납게 엉덩방아를 찧었다.

녀석은 완벽한 패배자의 얼굴로 힘없이 일어서 술집을 나갔다.

이연희는 그런 이성재의 뒷모습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난 그런 이연희에게 말했다.

“따라가고 싶으면 따라가요.”

아직 이연희는 이성재에게 미련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의뢰도 한 것일 테지.

미련이 없으면 복수 같은 것도 할 마음이 들지 않는다.

한데 내 얘기에 들려온 이연희의 대답은 의외였다.

“아니요. 조금도 따라가고 싶지 않아요, 저딴 인간. 그냥 통쾌해서 지켜봤어요.”

띠링!

―바람피운 전 남친에게 복수하고 싶어 했던 연희 씨의 소원을 들어주었네요~! 연희 씨는 지금 진심으로 통쾌해하는 중이랍니다~! 선행을 쌓아 1링크가 주어집니다.

그녀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럼…… 다행이구요.”

이제 슬슬 돌아가야겠네.

“아무튼 의뢰는 이걸로 끝난 거죠? 그럼 이만 가볼게요.”

테이블을 나서려 하는 내 팔을 이연희가 덥석 잡았다.

“그냥 가시게요?”

“네?”

“조금만 더 있다 가면 안 돼요?”

……뭔가 일이 이상하게 꼬이는 것 같은데.

“전 의뢰를 끝마치면 의뢰인과 사적인 시간을 따로 보내지 않아요.”

“그럼 지금부터 나 의뢰인 안 할게요. 그냥…… 오들리 씨한테 제법 호감 있는 여자 할게요. 그럼 어때요?”

하아, 이거 참 난감하네.

이연희는 기대감 가득한 시선을 내게 던졌다.

그 시선이 내게는 그대로 부담이었다.

“연희 씨. 죄송한데 저 만나는 여자 있어요.”

“네? 애인이 있었어요?”

“네.”

“아…… 그랬구나.”

이연희가 실망스런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잠시 말이 없던 그녀는 한숨을 푹 쉬며 체념하듯 투덜거렸다.

“그럼 그렇지. 이렇게 괜찮은 남자한테 여자가 없을 리 없지. 그쵸?”

“괜찮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알았어요. 더 치근거리지 않을게요. 아무튼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다음에 또…… 볼 일은 없는 거죠?”

“아마도요.”

이연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잘 가요. 저는 혼자서 술 좀 더 즐기다 가야겠네요.”

아마 이연희도 심정이 복잡할 것이다.

이성재에게 통쾌하게 복수는 했다.

그런데 그러는 와중에 내게 마음이 생겼다.

하지만 난 애인이 있다는 말로 이연희의 마음을 단칼에 거절했다.

짧은 순간 여러 가지 상황을 겪었으니 술이 좀 필요하긴 하겠지.

“적당히 마시다 들어가세요.”

“걱정하지 말고 얼른 가요.”

이연희가 손을 휘휘 저었다.

나는 더 이상 그녀의 인생에 간섭하지 않기로 했다.

가볍게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 술집에서 나왔다.

서울의 밤거리는 제법 쌀쌀했다.

불야성을 이루는 거리엔 사람들로 가득했다.

한 사람에겐 하나의 역사가 존재한다고 들은 적이 있다.

이토록 많은 사람들에게도 하나같이 그들의 역사가 쓰이고 있겠지.

나는 그 사람들의 역사에 스쳐 지나가는 도우미 정도의 역할만 하면 된다.

이미 영혼의 퀘스트로 숱한 사람의 역사를 고스란히 뒤집어썼다.

더 이상은 타인의 역사 속에 깊이 관여하기가 싫다.

그럴 여력도 없다.

얼른……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 * *

오늘은 목요일.

그리고 또 다른 의미를 붙이자면 대망의 졸업식 날이다.

드디어 청소년의 딱지를 떼고 사회인이 되는 경계선에 서게 된 것이다.

기분은 좀 싱숭생숭했지만 졸업식이라고 해서 뭐 특별할 건 없었다.

어렸을 적 인터넷에서 봤던 것처럼 졸업식 날 후배들이 선배에게 밀가루를 뿌린다거나 교복을 가위로 자른다거나 하는 과격한 이벤트도 없었다.

틀에 박힌 졸업식 과정이 지루하게 흘러갔을 뿐이다.

졸업식을 마치고 상덕이, 아랑이와 셋이서 학교 근처 분식집으로 향했다.

그냥 이대로 집에 들어가기가 아쉬워서 뭐라도 먹고 가기로 한 것이다.

아랑이는 분식집에 들어가자마자 먹고 싶은 메뉴를 속사포처럼 주문했다.

십여 분 후, 우리 테이블 앞엔 떡볶이 5인분과 어묵 4인분, 순대 3인분, 김밥이 종류별로 다섯 줄, 튀김 3인분, 쫄면, 돈가스가 놓였다.

테이블이 모자라서 옆 테이블 하나를 더 붙였다.

그 많은 메뉴에 상덕이의 입이 쩍 벌어졌다.

“이, 이걸 다 먹어?”

“너 아랑이 몰라서 그런 소리 하냐?”

“잘 먹겠습니다~!”

아랑이는 해맑은 얼굴로 젓가락을 놀리기 시작했다.

상덕이와 나도 음식들을 먹었다.

서로 오가는 말없이 한참 음식을 먹던 와중 아랑이가 상덕이에게 물었다.

“상덕아. 너는 졸업하면 뭐할 거야?”

“응? 나는…… 그냥 지금 하는 일 하려고.”

“너 일해?”

“응.”

“무슨 일 하는데?”

“그게~”

상덕이 이 자식이 아무 생각 없이 우리 일 얘기를 꺼내려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난 일순간 상덕이를 죽일 듯 노려봤다.

그 시선을 받은 상덕이가 일순 굳어 버렸다가 열심히 머리를 굴리더니 이런 대답을 내놓았다.

“어, 엄마 도와서 알바 해!”

“어머니가 무슨 일 하시는…… 아 맞다! 상덕이네 어머니, 지웅이네 가게서 주방 보시지?”

“응.”

“나 바본가 봐. 그걸 깜빡하고. 어머님이 닭발 하나는 정말 기가 막히게 만드시잖아.”

“무슨~ 지웅이가 레시피를 다 만들어서 그렇지.”

“아무리 레시피가 좋아도 손맛 없으면 음식 맛있게 안 나와. 어머니 진짜 대단하신 거야.”

아랑이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상덕이가 헤벌쭉 웃었다.

“그, 그런가? 하하.”

“그럼~ 근데 거기서 상덕이도 알바 하고 있었어?”

“어? 어, 어…… 그, 가, 가끔씩 가서 주방일 도와주고 그래.”

“그랬구나. 그럼 상덕이는 주방 보조로 일하다가 어머니 은퇴하시면 주방장 되는 거겠네?”

“그, 그런 셈이지.”

“멋있다, 상덕이. 나 가면 닭발 많이 줘야 돼?”

“얼마든지! 하하하하!”

……애쓴다, 애써.

아무튼 상덕이의 거짓말 덕분에 분위기가 좀 화기애애해졌다.

이후로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분식을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 * *

분식집에서 나와 상덕이는 먼저 집으로 가버렸다.

나와 아랑이는 둘이서 거리를 조금 거닐기로 했다.

“지웅아.”

“응?”

“사실은 너한테 물어보고 싶었거든.”

“뭘?”

“졸업하고 나면 뭐할 건지.”

“아, 그거.”

“생각해 둔 거 있어?”

“나야 뭘 하든 먹고는 살지 않을까? 정 할 게 없으면 음식점을 차려도 될 테고.”

“그렇겠다. 지웅이는 요리 솜씨가 끝내주니까. 근데…… 그 전에 먼저 꼭 해야 하는 게 있잖아.”

“꼭 해야 하는 거?”

“응.”

아랑이가 날 빤히 바라보았다.

난 그녀가 무얼 얘기하는 건지 뒤늦게 알아챘다.

“혹시 군대 말하는 거야?”

아랑이는 씁쓸한 미소를 머금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걱정됐었구나.

하긴, 우리나라에서 미필들이 연애를 하게 되면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게 바로 그 군대지.

하지만 나는 별로 해당되지 않는 얘기다.

“그래 가야지. 근데 난 군대 안 가.”

내 대답을 들은 아랑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안 간다고? 군대를?”

“응.”

“농담하지 마. 그런 게 어디 있어?”

그리 말해놓고서 아랑이는 아차! 싶은 얼굴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혹시…… 몸이 어디가 안 좋은 거야?”

“아니. 보다시피 아주 건강해. 몸 안 좋아서 면제받는 일은 없을걸.”

“그럼 왜 안 가는데?”

“우리 아버지가 실은 국가유공자야.”

“국가…… 유공자?”

이 나이대의 여자들은 국가유공자가 뭔지 잘 모르겠지.

“응. 북파공작원이라고 알아?”

“알지.”

“우리 아버지 북파공작원이었거든.”

아랑이가 화들짝 놀라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에? 거짓말!”

“진짜야.”

“나 너무 놀랬어.”

“왜?”

“그런 분들이 있다는 건 알았는데…… 설마 내 남친의 아버지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으니까. 뭐랄까…… 소설 속에서나 등장하는 인물을 직접 대면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그런 기분?”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을 열심히 설명하려 애쓰는 아랑이의 모습이 귀여웠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아랑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아랑이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하하. 지금은 그냥 나이 드신 아버지야. 아무튼 그래서 우리 아버지 국가유공자거든. 국가유공자의 자식 중 한 명은 군대 가는 대신 육 개월 공익 생활 하는 걸로 대체돼. 그러니까 훈련소 한 달간 갔다 오면 그 다음부터는 우리 동네 시청이나 뭐 그런 데서 잡일 하게 되는 거지.”

“그렇구나…… 다행이다!”

아랑이가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며 내게 팔짱을 꼈다.

그 바람에 나는 좀 경직되고 말았다.

여태껏 이런 식으로 스킨십을 해온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걱정했다고.”

“왜? 나 군대 가면 기다릴 자신 없어서?”

“아니~ 보고 싶은데 못 보면 그것도 슬프잖아.”

왜 그럴까.

오늘의 아랑이는 평소와 많이 달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