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일리 히어로-122화 (122/153)

데일리 히어로 122화

유주 누나는 다시 말을 이었다.

“아랑 씨. 뭐 이상한 오해 같은 거 하는 건 아니죠?”

“네? 아뇨, 그런 거 안 해요.”

“이럴 거면 애초에 여자 친구도 같이 부르지 그랬어? 평소에 자주 연락 안 하니?”

“특별한 일이 없으면 하루에 전화 한 통 정도……?”

난 솔직하게 얘기했다.

그러자 유주 누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면 안 돼. 여자는 사랑을 먹고사는 존재라고. 내 남자한테 연락이 뜸하면 얼마나 서운한지 알아? 오늘도 아랑 씨가 아무런 사정도 모르고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 길에서 마주치면 얼마나 당황스럽겠어. 그렇지?”

생각해 보니 그것도 그렇다.

“그렇네요. 사실 제가 연애는 처음이라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몰라서…….”

“그럼 그건 너보다 조금 더 연애 선배인 내가 가르쳐 줘야겠네. 아랑 씨는 연애 좀 해봤어요?”

“아니요. 이번이…… 처음이에요.”

“그래요? 혹시 지금 바빠요? 다른 약속 있다거나.”

“아니에요. 친구랑 얼굴 보고 집에 들어가려던 참이었어요.”

“마침 잘됐네요. 아랑 씨도 그럼 같이 가요. 내가 아랑 씨한테도 연애 코치 해줄게요. 그래도 되죠, 시아 언니?”

유주 누나가 카시아스에게 물었다.

카시아스는 늘 그렇듯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좋을 대로.”

“잘됐다. 그럼 그렇게 하는 걸로!”

“아…… 정말 그래도 되는지.”

“집주인이 된다 그랬는데요, 뭐. 그리고 지웅이 여자 친구를 여기서 이렇게 마주쳤는데 혼자 쏙 빼놓고 가는 것도 그림이 이상하잖아요.”

“그래. 집들이 같이 가자, 아랑아.”

나까지 나서니 아랑이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실례할게요.”

결국 그렇게 난 여자 넷과 예정에도 없던 카시아스의 집들이를 하게 되었다.

* * *

쏴아아아.

탁탁탁탁.

사들고 온 재료들을 씻고 다듬으며 요리를 시작했다.

마르펭의 요리 실력 덕분에 단 한 시간 만에 무려 네 가지의 음식을 완성시킬 수 있었다.

내가 만든 건 크림 파스타와 매시트포테이토를 곁들인 와인 소스 스테이크, 해산물 크림 리조또, 그리고 매콤한 토마토 비프 스튜였다.

음식들을 테이블에 세팅하고 나니 카시아스를 제외한 나머지 여인들은 모두 환호성을 내질렀다.

“꺄아~! 완전 맛있겠다! 지웅이 너 장난 아니다? 여자 친구만 아니었으면 오늘 내가 자빠뜨리는 건데.”

“지웅아, 너 원래 이렇게 요리 잘했니? 어디 레스토랑에 온 것 같아.”

“잘 먹을게, 지웅아. 오일 닭발 이후로 지웅이가 만든 요리는 처음이네?”

차례대로 인비, 유주 누나, 아랑이의 반응이었다.

“다들 맛있게 드세요.”

여자들은 잘 먹겠다고 합창을 한 뒤, 열정적으로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어머어머! 어떻게 이런 맛이 나지? 내가 태어나서 먹어봤던 크림 파스타 중에서 이게 제일 맛있어~! 비법이 뭐야? 응? 응? 가르쳐 주라~!”

인비가 호들갑을 떨어댔다.

유주 누나도 놀란 눈을 하고 음식에 대한 칭찬을 이어나갔다.

“나 스테이크 미디움레어 먹는 거 제일 좋아하는데. 진짜 잘 구웠다. 매시트포테이토도 정말 부드럽고 간이 딱 맞아.”

카시아스는 별 다른 말없이 먹는 데만 집중했다.

난 아랑이를 바라봤다.

엄청난 대식가이자 먹을 것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내 여자 친구는 어떤 평을 내릴지 궁금했다.

“요리들이 하나같이 정말 맛있어, 지웅아. 특히 크림 리조또랑 스튜가 대박이야. 이렇게 맛있으면 20인분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대성공이다.

너무 뿌듯해서 입이 귀에 걸릴 것 같다.

그런데 인비가 아랑이의 어깨를 탁 치며 말했다.

“어머 너무 과장이 심하다. 아무리 맛있어도 그렇지 어떻게 20인분을 먹니? 남자 친구가 만들었다고 너무 추켜세우는 거 아니야?”

“아니에요. 정말 20인분 먹을 수 있어요.”

“풋! 네가 박태환이니? 그렇게 많이 먹게.”

그건 인비가 아랑이를 잘 몰라서 하는 말이다.

아랑이는 정말로 20인분을 먹을 수 있는 여자다.

지금도 음식을 가장 많이, 그리고 빨리 먹고 있는 사람은 아랑이…… 가 아니네?

내 생각과 달리 포크와 숟가락을 제일 바쁘게 놀리는 건 카시아스였다.

그녀는 쉬지 않고 손과 입을 움직였다.

아랑이가 그런 카시아시를 슬쩍 보더니 질 수 없다는 듯, 전보다 더 빠르게 음식들을 먹기 시작했다.

그러자 카시아스도 속도를 높였다.

아랑이는 더 높였다.

갑자기 두 여인의 신경전이 펼쳐졌다.

처음엔 음식을 즐기던 인비와 유주 누나는 멍하니 두 사람을 바라보기만 했다.

결국 5분도 지나지 않아 내가 차린 모든 음식이 동이 나 버렸다.

카시아스와 아랑이가 포크를 내려놓고 시선을 마주쳤다.

둘 사이에서 불똥이 튀는 것 같았다.

‘아랑이가 이런 데에 목숨 걸다니…….’

늘 음식을 즐기기만 했던 아랑이였다.

그런데 경쟁자가 생기니 알 수 없는 승부욕에 불타고 있었다.

아니 근데 아랑이는 그렇다 치고 카시아스는 왜 아랑이랑 경쟁하는 거야?

“좀 먹네?”

카시아스가 말했다.

“제가 먹부림은 좀 하거든요.”

아랑이가 받아쳤다.

“언제 제대로 날 잡고 밥이나 먹으러 가지?”

“좋아요. 언제든 괜찮아요.”

다시 한번 두 여인 사이에서 불똥이 튀었다.

……부탁이니까 그런 걸로 싸우지 마, 둘 다.

* * *

이상한 집들이가 끝나고 우리는 카시아스의 집에서 나왔다.

그때까지도 아랑이와 카시아스의 사이는 알 수 없는 냉기가 흐르고 있었다.

“오늘 정말 잘 먹었어, 지웅아. 초대해 주셔서 감사했어요, 시아 언니.”

집 앞에서 유주 누나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나도 즐거웠어요~ 시아 언니~! 담에 또 올게요!”

뒤이어 인비도 작별 인사를 했다.

아랑이와 카시아스는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다가 약속이라도 한 듯 고개를 휙 돌렸다.

생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아랑이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많이 당황스러웠다.

“카시아스, 그만 가볼게. 다음에 봐.”

“가라.”

그 말을 남겨두고 카시아스는 집으로 들어갔다.

유주 누나와 인비는 먼저 떠났고, 나는 아랑이와 둘이 잠시 길을 거닐었다.

“아랑아, 괜찮아?”

“미안, 지웅아. 놀랐지?”

“응…… 조금.”

“정말 미안해.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그렇게 먹는 사람을 처음 만나 봐서 그랬나 봐.”

하긴 아랑이만큼 먹을 수 있는 사람은 보기 드물지.

카시아스의 밥통이 얼마나 큰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먹는 속도는 정말 빨랐고, 접시를 싹 비우고 나서도 포만감이 전혀 없는 얼굴을 보면 대식가이긴 한 모양이다.

“근데 지웅아.”

“응?”

“어쩐지 조금 즐겁기도 했어.”

말을 하며 아랑이가 방긋 미소 지었다.

“즐거웠다고?”

“응. 이상한 승부욕이 일긴 했는데, 한편으로는 재밌더라고. 그래서 다음번에 그분 꼭 한번 다시 만나보고 싶어.”

……참 여자들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뭐, 무작정 카시아스를 기분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보단 나으려나?

설우의 계획

토요일 오전.

나는 일찍부터 집에서 나왔다.

택시를 타고 춘천역으로 향했다.

돈을 지불하고 내려 미리 예매해 둔 기차표를 들고 ITX에 몸을 실었다.

목적지는 종로.

ITX를 타고 가다가 청량리에서 내려 일반 전철로 갈아타면 된다.

오늘은 로열 그룹이 종로에서 사랑의 밥차를 끌고 와 노숙자들에게 무료 급식을 나누어 주는 봉사 활동을 하는 날이다.

사실 다 허울일 뿐이다.

정말 노숙자들을 위하는 마음 같은 걸 가진 사람은 없을 게 뻔하다.

모두 보여주기식이다.

로열 그룹의 이미지를 좋게 만들기 위한 이벤트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노숙자들에겐 무료 급식 한 끼가 정말 소중한 것일 테지.

그럼 보여주기 식이라도 이런 봉사 활동을 하는 게 나은 걸까, 아니면 노숙자들을 이용하는 행위니 하지 않는 게 나은 걸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머리가 아파왔다.

사실 난 이런 식의 생각을 잘 하지 않는 편이다.

아무리 깊이 생각해 봐도 정답 같은 게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난 생각하는 걸 그만두고 좌석에 몸을 묻었다.

잠이나 자자.

* * *

한 잠 푹 자던 와중 기분이 싸해서 눈을 떴다.

차창 너머 보이는 배경이 가만히 멈춰 있었다.

내가 잠들기 전까지 보았던 뻥 뚫린 자연 경관이 아니었다.

꽉 막힌 지하철도 내부였다.

황급히 열차 안, 안내 문구를 봤더니 청량리역이었다.

“헉!”

난 깜짝 놀라 열린 기차 문이 닫히기 전 후다닥 내렸다.

“휴우.”

다행히 기차는 내가 내리자마자 문을 닫고 떠났다.

사람이 육감이라는 게 있긴 있는 모양이다.

아무튼 무사히 청량리에서 내려 1호선으로 갈아타 종로로 향했다.

오늘 로열 그룹이 봉사 활동을 하기로 한 장소는 종로의 서린 공원이었다.

내가 도착한 시간은 10시.

아직 공원엔 사랑의 밥차가 도착하지 않았다.

하지만 노숙자들은 상당히 많았다.

벌써 로열 그룹이 오늘 여기서 무료 급식 봉사를 한다는 걸 알고 있는 듯했다.

난 공원을 거닐며 느긋하게 시간을 보냈다.

한 시간이 지났다.

11시가 넘어갈 때쯤, 음식을 가득 실은 사랑의 밥차가 공원 안으로 들어섰다.

그에 노숙자들이 우르르 몰려들자 어디서 나타난 건지 까만 양복을 아래위로 걸친 경호원들이 그들을 줄 세웠다.

이윽고 밥차의 짐칸이 열렸다.

그 안에는 로열 그룹의 사람이자 현 시의원을 하고 있는 곽정철 의원과 보좌관을 비롯,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곽정철 의원은 누가 봐도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노숙자들과 일반 시민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와 동시에 여기저기서 플래시 세례가 터졌다.

찰칵! 찰칵!

이 기자들은 또 어디에 숨어 있다가 갑자기 나타난 건지 모르겠다.

밥차에서 배식 준비를 하는 동안 곽정철 의원은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고 사진을 찍었다.

곽정철 의원이 밥차에 실린 음식들을 하나하나 먹어보며 정말 맛이 좋다고 하는 영상을 어느 방송국 뉴스 VJ가 카메라에 담았다.

그렇게 30분 정도가 흐르고 나서 모든 배식 준비가 끝이 났다.

노숙자들이 줄을 선 차례대로 배식을 받기 시작했다.

곽정철 의원은 그런 노숙자들에게 밥을 퍼 담아주며 일일이 악수를 청했다.

그렇게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쯤, 로열 그룹의 사장이자 백설우의 아버지인 백천호가 나타났다.

백천호의 등장에도 곽정철 의원은 열심히 밥만 펐다.

배식을 하는 데 완전히 정신이 팔려 백천호가 오거나 말거나 신경 쓸 틈조차 없다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내 눈엔 연출을 하는 티가 팍팍 났다.

백천호는 곽정철 의원을 멀리서 흐뭇하게 바라봤다.

그런 백천호의 모습도 카메라에 담겼다.

그렇게 10분 정도가 지난 후, 백천호가 곽정철에게 다가갔다.

그제야 곽정철은 백천호를 뒤늦게 발견했다는 듯 반갑게 맞아주었다.

두 사람이 포옹하고 악수하는 장면 역시 수많은 카메라에 담겼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