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 히어로 121화
가혹한 집들이
혜성마트에 도착했다.
혜성마트는 총 3층으로 되어 있었다.
식료품 코너는 1층이었다.
나는 카트를 끌고 매장을 돌며 요리에 필요한 재료들을 담았다.
인비와 카시아스는 그런 내 뒤를 그냥 따라왔다.
요리 재료에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는 듯했다.
인비의 수다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하지만 카시아스는 그녀를 철저히 무시했다.
카시아스의 반응이 영 재미없었는지 그녀는 곧 내게 다가와 팔짱을 끼고 이런저런 얘기를 조잘대기 시작했다.
“그래서 내가 ‘우리 사이 오늘로 끝내는 거야!’라고 했지.”
인비의 얘기는 대부분 연애에 관련된 것뿐이었다.
대체 이 여자는 남자를 몇 명이나 만나고 다니는 건지 모르겠다.
지금 잠깐 동안 내가 들은 얘기 속에 등장하는 남자만도 열 명이 넘었다.
‘빨리 장 보고 들어가자.’
그것만이 인비에게서 벗어나는 길이다.
카트에 요리 재료들이 제법 쌓였다.
이제 두세 가지만 더 담으면 그럴듯한 음식을 할 수 있을 듯했다.
한데 저 앞에 익숙한 뒷모습의 여인이 카트를 밀고 가는 게 보였다.
‘누구지?’
잠시 고민하던 난, 그 뒷모습이 유주 누나라는 걸 알았다.
이런 데서 유주 누나를 보게 되다니!
반갑고 기쁜 마음에 옆으로 후다닥 달려갔다.
“유주 누나~!”
누나의 이름을 부르며 얼굴을 확인했다.
그런데.
“…….”
“누나…… 울어요?”
유주 누나는 울고 있었다.
유주 누나가 얼른 눈물을 닦고 거짓 미소를 지었다.
“아, 지, 지웅아.”
“누나, 왜 울고 있어요?”
“아니야. 그냥 하품했어.”
“하품한 사람이 눈물을 그렇게 주륵주륵 흘려요?”
“진짜 하품한 거라니까.”
택도 없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다른 여자가 울었다면 모른 체하고 넘어가겠지만 유주 누나의 눈물은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다.
유주 누나의 집안 형편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유주 누나가 데일리 히어로 사이트에 올린 고민을 해결해 주다 우연찮게 알게 된 것이다.
유주 누나는 아버지랑 둘이 살고 있다.
아버지는 일용직 일을 하며 힘들게 돈을 벌어 오신다.
당시에는 사채 빚까지 있었다.
그 사채 빚은 다행히 내가 다 해결해 주었다.
사채업을 하는 녀석들을 직접 찾아가 한바탕 뒤집어놓았었다.
대부업체 우두머리인 조철희는 그 이후로 나와 악연으로 엮여서 지금은 내 쫄따구 노릇을 하고 있다.
아무튼 그때 큰 사건은 다 해결을 했다.
그래서 앞으로 누나의 아버지한테 무슨 사고만 없으면 어떻게든 살아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물론 살아나간다는 게 앞으로 닥쳐올 인생에 어떠한 고통도 없으리란 보장은 될 수 없다는 걸 안다.
어찌 되었든 유주 누나의 환경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 보니 누나가 대충 얼버무린다고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게다가 유주 누나는 약한 사람이 아니다.
눈물도 헤프지 않다.
그런 사람이 정신을 놓고 울었다는 건 분명 큰일이 생겼다는 것이다.
“누나. 말해봐요. 무슨 일이에요?”
“아무것도 아니야, 정말.”
누나가 끝까지 대답을 회피했다.
그러자 갑자기 인비가 끼어들었다.
“우와~ 또 예쁜 언니 나타났네?”
유주 누나가 당황해서 뒤로 슬쩍 물러났다.
“누, 누구……?”
유주 누나는 그제야 내 일행들을 확인하고서 전보다 더 당황해 버렸다.
“아…… 혼자 온 게 아니었구나.”
“네. 어쩌다 보니…….”
“안녕하세요, 한유주라고 해요.”
“저는 박인비예요. 이쪽은 시아 언니구요. 그런데 지웅이랑은 어떻게 알아요?”
“지웅이랑 편의점에서 같이 알바했던 사이에요.”
“아~ 그렇구나. 그런데 왜 울었어요?”
“그냥 하품해서 그런 거예요.”
“에이, 아닌 것 같은데. 사실대로 얘기해 봐요. 분위기 보니까 지웅이는 유주 언니가 얘기할 때까지 물고 늘어질 것 같은데. 우리 때문에 불편한 거면 자리 비켜 드릴게요.”
“아니요, 그럴 필요 없어요. 지웅아. 만나서 반가웠어. 다음에 밥이나 한 끼 먹자.”
“누나 잠깐만 저 좀 봐요.”
난 유주 누나의 팔을 잡고 인비와 카시아스에게서 멀리 떨어졌다.
“왜 이래, 지웅아. 네 일행분들한테 실례잖아.”
“누나 부탁이니까 사실대로 얘기해 줘요. 무슨 일이에요?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면 도울게요.”
내가 집요하게 물어보니 유주 누나는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저었다.
“네가 안다고 도울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집안 문제예요?”
“아니.”
집안 문제가 아니라고?
그럼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
유주 누나가 눈물을 흘릴 만한 일이 뭐가 있지?
……혹시.
“진호 형이랑 싸웠어요?”
유주 누나는 진호 형이랑 연애하는 사이다.
나한테 직접적으로 말한 적은 없지만, 난 그들이 그런 사이라는 걸 편의점을 지나다가 우연히 알게 되었다.
내 물음에 유주 누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너…… 그걸 어떻게…….”
“알고 있었어요. 둘이 사귀는 거. 편의점 지나가다가 둘이서 보통 사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는 스킨십을 하던 걸 봤거든요.”
“그래…… 그랬구나.”
“진호 형이 힘들게 하는 거예요?”
“아니…… 그게 아니라…… 헤어졌어.”
“네? 아니 사귄 지 얼마나 되었다고 헤어져요?”
“남녀 사이가 그렇더라…… 그냥 어제까지만 해도 아무 문제 없이 잘 지내다가 오늘은 작은 문제로 투덕거리게 되고…… 그게 내일은 큰 싸움이 돼서 헤어지고…… 모르겠어. 연애는 나한테 너무 어려운 것 같아.”
하아, 유주 누나의 집안 문제가 해결되니 연애 문제가 속을 태우는구나.
아무래도 유주 누나를 이대로 혼자 두면 안 될 것 같았다.
“누나, 나랑 같이 가요.”
“어디를?”
“저 뒤에 시아라고 인비가 소개했던 사람 보이죠?”
“응.”
“지금 그분 집에 가서 뭘 좀 만들어 먹으려던 참이었어요.”
“어? 그럼 가서 만들어 먹어. 내가 거길 어떻게 가니.”
“그럼 혼자서 계속 울 거예요?”
“아니야, 나 이제 안 울어. 괜찮아.”
“거짓말하지 마요. 그냥 오늘은 내가 하자는 대로 해요.”
나는 유주 누나를 다시 카시아스와 인비가 있는 곳으로 끌고 왔다.
“카시아스. 부탁이 있는데.”
“그 여자도 같이 데려가자고?”
카시아스는 이미 내가 어떤 얘기를 하려는지 다 파악을 한 이후였다.
“응. 안 될까?”
카시아스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을 대로 해.”
“고마워. 역시 카시아스가 짱이야. 누나, 이제 됐죠? 같이 가는 거예요.”
“하지만…….”
“그렇게 해요.”
유주 누나가 머뭇거리다가 카시아스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민폐 끼쳐서 죄송합니다.”
“괜찮아. 별로 신경 안 써.”
“우와~ 역시 시아 언니 멋져. 사람이 이렇게까지 쿨할 수가 있는 거야?”
“그럼 유주 누나가 먹을 것도 생각해서 1인분을 더 사야겠네.”
“잠깐.”
다시 카트를 밀고 가려는데 인비가 내 앞을 막아섰다.
“왜?”
“2인분 더 사. 나도 갈 거야.”
“너는 왜 따라오려 그래? 집에 가.”
“싫어. 시아 언니! 나도 갈래요. 괜찮죠?”
카시아스는 유주 누나 때완 확연히 다른 반응을 보였다.
“탐탁잖아.”
“엥? 왜요!”
“넌 말이 너무 많아.”
“알았어요, 말 줄일게요! 그러니까 따라가게 해줘요, 네? 부탁이에요. 제발요. 이렇게 빌게요. 내가 언니 얼마나 좋아한다구요! 유주 언니한테 했던 것처럼 쿨하게 허락해 줘요! 그래요 사실 언니가 좋은 것도 있지만, 지웅이가 해주는 음식 먹어볼 기회가 또 언제 오겠냔 말예요. 그리고 여기까지 같이 왔는데 갑자기 나만 쏙 빼놓고 가면 왕따 당하는 기분 든단 말예요. 제가 기분 상해서 자살이라도 하면 어쩌려 그러세요? 그렇다고 협박하는 건 아니에요. 그러니 제발 저도 같이…….”
카시아스의 이마에 힘줄이 빠득 하고 올라왔다.
“그만!”
카시아스가 인비의 말을 막았다.
“데려갈 테니 그만 떠들어!”
“꺅~! 고마워요, 언니!”
인비가 카시아스의 팔에 덥석 매달렸다.
카시아스는 그런 인비의 행동까지 제지하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인비도 참 대단하다.
수다 떠는 게 싫어서 데려가지 않겠다고 했더니, 그걸 역이용해서 데려가게끔 만들다니.
아무튼 여차저차 해서 결국 모두가 함께 카시아스의 집으로 가게 되었다.
요리를 4인분이나 해야 한다니.
졸지에 바빠지게 생겼네.
* * *
마트에서 나와 택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4인분이나 되는 요리 재료를 산지라 내 양손엔 짐이 가득했다.
무거운 건 아니었지만 여자 셋 사이에서 혼자 짐을 들고 있자니 그림이 뭔가 좀 이상했다.
카시아스와 인비는 애초부터 짐을 들겠다는 마음 자체가 없었다.
그나마 착한 유주 누나가 짐을 나누어 들자고 했다.
하지만 거절했다.
가뜩이나 마음도 무거울 텐데 양손까지 무거울 필요는 없으니까.
“마트 앞인데 왜 이렇게 택시가 안 오냐.”
한참 택시를 기다리고 있는데, 오라는 택시는 안 오고 의외의 사람이 왔다.
“지웅아?”
낯익은 이 목소리.
어제도 전화 통화를 하며 들었던 목소리.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아랑이였다.
“아랑아.”
“어디 가?”
“아, 지금…… 사람들이랑…….”
뭐라고 하지?
원래는 카시아스의 집에 초대받아 둘이서 먹을 요리 재료를 사기 위해 나왔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인원이 불어났다.
그것도 전부 여자들로만.
그렇다 보니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 집들이 가는 중이야!”
그래, 집들이!
그게 가장 좋은 변명이지.
“집들이?”
“응.”
“와, 또 예쁜 언니 등장이네.”
인비가 그새를 못 참고서 나섰다.
“언니 아니거든. 나랑 동갑이야.”
“아~ 그렇구나. 안녕? 난 박인비라고 해.”
“아, 저는 연아랑이에요.”
아랑이가 얼떨떨하게 자기소개를 했다.
“연아랑? 어쩜 이름도 예쁘네. 지웅이랑은 무슨 사이?”
“같은 고등학교 다녀요.”
“그래~? 반 친구야?”
“네.”
“여자 친구는 아니고?”
그 물음에 아랑이가 머뭇거리며 내 눈치를 봤다.
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랑이는 마주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대답했다.
“여자 친구…… 맞아요.”
“뭐어?!”
인비가 화들짝 놀라 펄쩍 뛰었다.
그러더니 대뜸 내 멱을 쥐었다.
“너 여자 친구 있다는 얘기 왜 안 했어!”
“안 물어봤잖아. 그리고 오늘 너랑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거든? 그런 얘기까지 할 여유가 어디 있었어?”
그때 유주 누나가 아랑이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랑이라고 했죠? 저는 한유주예요. 지웅이랑은 편의점에서 알바 하다가 알게 된 사이구요.”
“아,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지웅이한테 이렇게 예쁜 여자 친구가 있는 줄 몰랐네요. 지웅이, 너 이러기야?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어쩜 나한테 아무 말도 안 할 수가 있어? 소개 좀 미리 시켜주지.”
유주 누나가 괜히 너스레를 떨었다.
아무래도 여자 친구 앞에서 다른 여자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는 나 때문에 분위기가 어색해질 걸 염려한 모양이다.
^직^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