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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 히어로-119화 (119/153)

데일리 히어로 119화

그런 의미에서 난 우리 가족을 믿는다.

가족을 위해서 내 목숨을 던질 수 있고, 가족도 내게 그리해 줄 것이라 생각한다.

같은 기준으로 두고 봤을 때 카시아스는?

……이 얄미운 여자한테 이런 감정이 드는 걸 별로 인정하기는 싫지만.

“믿어.”

“……믿는다고?”

“그래, 믿어. 누군가를 믿는다는 건 어려운 일이야. 그래서 진지하게 생각해 봤는데, 나는 너를 믿어. 그게 확실해.”

“어떻게 단정 짓지?”

“나한테 무슨 일이 있을 때 넌 네 목숨을 걸고 지켜줄 것 같거든.”

“…….”

그 말을 들은 카시아스의 눈빛에 옅은 슬픔이 맺혔다.

“왜 그래?”

카시아스는 내게서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뭐야, 자꾸 분위기만 이상하게 만들고. 집에 게임기 없어? 가구들은 하나같이 삐까뻔쩍하구만. 아, 게임기는 없어도 컴퓨터는 있지? 그럼 온라인 게임이라도 해야겠다. 혼자 노는 데는 그것만 한 게 없지.”

“유지웅.”

“자꾸 왜 불러. 정들려고 그러네.”

“정들지 마.”

“뭐?”

“그리고 날 믿지도 마.”

“그건 네가 강요할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믿고말고는 내 문제야. 난 너라는 사람이 지금껏 내게 해온 행동들을 기반으로 판단한 거야. 널 믿을 수 있다고. 한번 믿었으면 그것으로 끝이야. 설사 널 믿었는데, 네가 날 사지로 끌고 간다 해도 후회 안 해. 어쨌든 널 믿은 내 잘못인 거니까.”

“나 같은 걸 믿었다간 분명히 후회할 거야.”

“그건 그때 가서 얘기하자. 아무튼 컴퓨터나 좀 보여줘.”

난 소파에서 일어나 컴퓨터가 있는 방을 수색하려 했다.

그런데.

덥석.

“……?”

뒤따라 일어선 카시아스가 뒤에서 날 와락 껴안았다.

말로만 듣던 백허그를 절대 그럴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던 카시아스에게서 받게 되었다.

한데…… 기분이 묘했다.

뭐지? 이 익숙한 듯한…… 느낌은.

“유지웅.”

“……너 어디 아프냐.”

“대답해. 유지웅.”

“응.”

“고마워.”

“나도 고마워. 늘 고마워하고 있어. 내게 이런 힘을 준 네게.”

“그리고 미안…… 해.”

“갑자기 왜 이렇게 감성 터지는 건데?”

“마지막으로…… 다시는 내 앞에서 등 보이지 마.”

마지막 얘기는 조금 섬뜩하게 들릴 수도 있을 것 같은 대사다.

하지만 카시아스는 그런 나쁜 뜻으로 얘기한 게 아니었다.

“떠나가는 사람의 등을 많이 봤구나…….”

그것은 순전히 내 짐작이었다.

하지만.

“……응.”

카시아스는 정곡을 찔린 모양이었다.

난 날 붙잡고 있던 그녀의 팔을 풀고 돌아섰다.

그리고 두 손으로 그녀의 뺨을 잡아 고개를 들어 올리게 했다.

우리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카시아스. 난 네 곁에서 떠날 일 없으니까 그런 바보 같은 소리는 하지 마.”

“지웅아…….”

난 카시아스에게 포근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빨리 컴퓨터 어디 있는지나 말해줘.”

“…….”

퍽!

“컥!”

카시아스의 무릎이 내 다리 사이를 걷어찼다.

내 피부는 강철이지만 그 속은 강철이 아니다.

충격이 다리 사이의 중요한 부분에 마구 전해지며 숨이 턱턱 막혔다.

카시아스는 고통에 겨워하는 날 내버려 두고 소파에 다시 앉아 텔레비전을 켰다.

마침 텔레비전에서는 일일 드라마 재방송이 하는 중이었는데 거기서 나오는 여자의 대사가 오묘했다.

―어머, 어떡해! 알이 깨졌어!

……아니야!

내 알은 깨지지 않았어!

내 알은 건재해!

* * *

“…….”

“…….”

카시아스와 난 아무 말 없이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만 시청했다.

그러다 내가 사과 주스를 다 마시면 카시아스는 빈 잔을 가져가서 다시 사과 주스를 채워왔다.

그렇게 벌써 일곱 잔을 마셨더니 속이 울렁거린다.

―정말이야? 정말 안 깨졌어? 괜찮은 거야?

텔레비전에서는 달걀을 부화시키려는 소녀가 알이 깨졌는지 안 깨졌는지 소년에게 묻고 있었다.

근데 어째 저 말…… 나한테 하는 것 같냐.

―괜찮아, 안 깨졌어.

그럼 안 깨졌지.

―어? 아닌데? 여기 깨져서 줄줄 새잖아!

―아, 정말!

……그런 불안한 대사 치지 마.

아무튼 정말 할 게 더럽게 없다.

괜히 초대해 달라고 한 건가 싶은 후회까지 밀려온다.

카시아스의 눈치를 살피니 그녀도 딱히 텔레비전에서 방영 중인 드라마가 재미있어서 보는 것 같진 않았다.

나랑 똑같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뿐이다.

그렇다고 하루 종일 이렇게 가만히만 있을 수는 없는 일.

난 일어나서 주방 쪽으로 향했다.

그러자 텔레비전을 보다 망부석이 된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꼼짝도 않던 카시아스가 고개를 돌려 날 바라봤다.

이윽고 그녀는 엉덩이를 떼더니 내 뒤를 따라왔다.

“뭐하려고?”

카시아스가 물었다.

“나 오늘 점심도 못 먹었어. 출출해 죽겠는데 물배만 잔뜩 차서 쓰겠냐고. 뭐라도 만들어 먹어야지.”

“요리 잘해?”

이 여자가 왜 이래?

“나 리조네랑 마르펭의 능력 가지고 있는 남자야.”

리조네의 능력은 절대미각, 마르펭의 능력은 요리 실력이다.

“아, 그랬지.”

두 영혼의 도움으로 지금 춘천 전역을 휩쓸어 버린 닭발 옆차기의 히트 메뉴! 오일 닭발을 개발한 게 나라고.

난 손을 싹싹 비비며 말했다.

“그럼 냉장고에 뭐가 있는지 볼까?”

냉장고를 천천히 개봉했다.

그런데 그 안에는…….

“뭐야 이게.”

아무것도 없었다.

오로지 사과 주스만 한 열 병 정도가 담겨 있을 뿐이다.

이건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텅텅 비어 버렸다.

“이럴 거면 대체 냉장고는 왜 산 거야?”

“구색이지.”

“참 쉽게 얘기한다. 전기세 아까워.”

“아깝지 않을 만큼 돈은 넉넉히 있으니 걱정 말아.”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 우리나라 전기 그 자체가 아깝다고.”

“니네 나라지, 우리나라는 아니다.”

“…….”

그냥 한 대 때릴까?

무슨 초딩을 상대하는 기분이다.

“후, 안 되겠다. 같이 나가자.”

“어디를?”

“어디긴 어디야. 마트지.”

“정 배고프면 그냥 뭘 배달시켜 먹어도 돼. 아니면 식당에서 사 먹든가.”

“집들이 선물이라 생각하고 그냥 먹어. 맛있게 만들어줄 테니까.”

원치 않은 동행

카시아스와 집을 나섰다.

이 근방에는 마트가 없었다.

가장 가까운 마트가 차로 10분 정도 걸린다.

우리는 택시를 잡기 위해 도로변에서 기다렸다.

“왜 굳이 요리를 해주겠다는 거야?”

“그런 게 사람 사는 정이라는 거야.”

“정…… 이라. 유독 한국에 사는 사람들이 그런 걸 많이 따지는 것 같더군.”

“정이 없으면 사람 사는 세상이냐, 그게.”

“난 잘 모르고 자라서.”

“대체 어떤 삶을 산 거냐, 너는.”

“그냥 혼자서 언제나 늘, 항상, 누가 뭐라고 하든 나의 길을 걸었지.”

“듣기만 해도 주변 사람들이 다 혀를 내두르며 도망갔을 것 같다.”

“하여튼 난 허례허식 같은 거 귀찮다.”

“요리 한번 해주겠다는데 그게 무슨 허례허식까지 운운할 일이라고.”

나는 카시아스와 평소처럼 투닥거렸다.

그리고 그런 우리 두 사람 곁을 지나가는 남정네들은 하나같이 카시아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다들 카시아스를 한 번 보고, 날 한 번 보고, 다시 카시아스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떻게 저런 미인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건지 그 방법 좀 알고 싶다는 제스처였다.

사실 미모만 놓고 보자면 카시아스는 내 주변 여인들 중 톱이다.

박인비나 유주 누나는 물론이고…… 미안한 얘기지만 아랑이보다도 예쁘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확실히 그렇다.

하지만 문제는 저놈의 성격이다.

저런 성격으로는 아무리 겉모습이 예뻐봐야 평생 남자 친구 같은 거 생기지 않는다.

애교도 없고, 무뚝뚝하고, 제멋대로 말하고, 행동하고.

그런 애인을 곁에 두고 오래도록 사랑할 수 있는 남자는 단언컨대 없다.

“카시아스. 데브게니안에서 연애해 본 적 있어?”

“아니.”

거봐라.

내 말이 틀림없지.

“그런 건 없지만…… 서로 좋아하는 게 아닐까……라고 생각했었던 사람은 한 명 있었어.”

“……뭐? 그런 사람이 있었다고?”

“그래.”

“아니, 동물이라든가 그런 거 말고. 사람 말이야, 사람.”

카시아스가 매서운 눈초리로 날 노려봤다.

“알았어, 농담 안 할게. 근데 정말 그런 사람이 있었던 말야?”

“있었어. 한 명.”

“누군데?”

“말할 수 없다.”

“뭐? 왜?”

“그런 걸 말해서 뭐해. 말해봤자 넌 몰라.”

“어차피 모르면 말해줘도 되는 거 아니야?”

“말하기 싫다. 됐어?”

뭐야.

왜 저렇게 자기 얘기 하는 걸 꺼리는 거야.

나에 대한 건 속속들이 알고 있으면서 혼자서만 비밀투성이다.

생각해 보니 내가 카시아스에 대해 아는 건 극히 일부분의 정보뿐이었다.

평소엔 검은 고양이라는 거.

여자라는 거.

데브게니안 대륙에서 온 대단한 마법사라는 거.

어떠한 목적이 있어서 내게 레이브란데의 인과율을 시전했다는 거.

……그게 전부다.

아, 오늘 알게 된 사실 세 가지.

돈이 엄청 많고 집도 좋다는 것.

친구가 없다는 것.

서로 좋아했을 거라 짐작되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것들 말고 더 이상은 아는 게 없다.

뭔가 따지고 보니 엄청 손해 보는 기분이다.

“근데 카시아스.”

“말해.”

“내가 쉰 개의 영혼을 다 모으게 되면 그때는 말해줄 거야? 네 목적.”

“그때는…… 내가 말 안 해도 절로 알게 될 거다.”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그나저나 택시는 왜 이렇게 안 와?

장소를 옮길까? 하고 생각하던 그때였다.

택시 말고 다른 것이 다가왔다.

“그만 좀 쫓아오라고!”

저 멀리서 금발 머리 여인이 앙칼진 음성으로 소리치며 우리 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여인의 뒤를 어떤 남자가 쫓는 중이었다.

“쫓아오지 말라니까!”

뒤돌아 소리치던 여인이 고개를 정면으로 두었다. 그리고 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순간 우리 둘 다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녀는 금은방집 사장님 딸 박인비였다.

인비가 외간 남자에게 쫓기는 와중에도 날 알아보고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꺅~! 지웅아~!”

“…….”

이거 인사를 받아줘야 돼, 말아야 돼?

인비는 그런 내 고민 따위 깡그리 무시한 채 후다닥 코앞까지 다가와 대뜸 내게 팔짱을 꼈다.

그러자 남자는 인비와 내 앞에 서서 헐떡대며 물었다.

“헉! 헉! 뭐야? 갑자기 이게 뭐하는 거야? 당신 누구야?”

대략 20대 중후반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가 내게 반말로 물었다.

아무리 내 나이가 어리다고 해도 초면에 지켜야 하는 예의라는 게 있는 법이다.

한데 반만을 지껄이니 기분이 별로였다.

게다가 다분히 시비조였다.

인비는 내 팔을 자기 가슴에 더 꽉 끌어당기며 말했다.

“내 남친이야.”

“뭐? 네가 남친이 어디 있어? 조금 전까지 내가 남친이었잖아!”

“넌 싫증났어. 그래서 끝내자고 한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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