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 히어로 118화
“아, 그래요? 그럼 어쩔 수 없죠, 뭐. 조심히 들어가세요, 형.”
“그래. 섀도우 워커.”
난 설우가 보는 앞에서 섀도우 워커의 능력을 사용했다.
내 몸이 바닥의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어 갔다.
설우는 이미 여러 번 이런 광경을 봐왔던지라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무사히 저택을 빠져나와 정원에 깔린 그림자를 따라 움직였다.
정원의 담벼락 한편엔 큰 나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 그림자를 따라 담벼락을 넘어섰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어진 그림자 속을 헤엄치듯 움직였다.
내가 그림자 밖으로 나온 건, 저택에서 한참 떨어지고 난 뒤였다.
“휴, 그럼 카시아스를 만나러 가볼까.”
카시아스의 초대
집으로 돌아오는 길.
어디로 가면 카시아스를 만날 수 있을지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어제처럼 알아서 날 찾아왔다.
카시아스와 내가 만난 건 집 근처 버스 정류장이었다.
[왔구나.]
지금 버스 정류장 근처에는 아무도 없다.
카시아스와 나 단둘뿐이다.
그런데도 카시아스는 내게 텔레파시를 보내고 있었다.
왜?
입에 소시지를 물고 있어서 말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카시아스가 내게 다가와 어깨에 폴짝 뛰어올랐다.
그러더니 소시지를 우물거리며 씹어 먹었다.
“너 그거 누가 줬냐?”
[편의점 알바생이 귀엽다고 주더군.]
“편의점 알바생? 내가 알바 하던 거기?”
[그래.]
“근데…… 이 시간에는 점장님이 계실 텐데?”
[일주일 전부터 수, 목요일엔 낮 시간에도 알바생을 쓴다.]
“그렇구나. 전혀 몰랐네. 근데 알바생이 되게 착한가 봐. 너처럼 못생긴 고양이한테 소시지를 다 주고.”
[고양이 이빨이 꽤나 날카롭다는 건 알고 있나?]
“알지.”
[물리기 싫으면 닥쳐.]
“참나. 내 몸에 네 이빨이 박히기나 하겠냐? 이 몸은 강철이라고 강철.”
[……깜빡했다.]
그러고서 카시아스는 다시 소시지를 먹는 데 열중했다.
근데 지금 아주 중요한 사실 하나를 잊어버린 것 같은데.
“집이 어딘지 알려줘야 할 거 아냐.”
[너희 집에서 가까워. 죽 가다가 오른쪽.]
시키는 대로 도로변 보도블록을 밟아 죽 걷다가 오른쪽으로 꺾었다.
[또 직진.]
우리 집으로 가려면 여기서 횡단보도까지 걸어간 뒤, 길을 건너야 한다.
그리고 좁은 골목으로 들어서면 된다.
카시아스는 횡단보도를 건너지 말고 계속 걸어가라 했다.
한 5분 정도 걸었을까.
[스톱.]
눈앞에 큰 교차로가 나왔다.
[다시 오른쪽.]
이번에도 오른쪽으로 꺾어서 걸었다.
조금 걷다 보니 소시지를 다 먹고서 손을 핥던 카시아스가 어깨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지금부터는 따라와.]
난 카시아스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갔다.
그녀는 대로변을 걷다가 횡단보도에서 길을 건넜다.
그리고 보도블록 좌측으로 난 좁은 길로 들어섰다.
온통 낡은 건물을 둘러싼 담벼락으로 만들어진 좁은 골목길은 우리 집 주변의 환경과 엇비슷했다.
“근데 여기…… 사람이 사는 동네이긴 한 거야?”
그나마 우리 동네 건물들은 좀 낙후되긴 했어도 사람이 살았다.
하지만 이 동네 건물은 하나같이 철거하기 직전의 모습이었다.
“한두 가구 정도 사는 것 같아. 나머지는 다 빈집이야.”
보는 사람이 없는 골목에 들어서니 카시아스는 육성으로 말을 했다.
“곧 철거당하겠네.”
“그렇겠지.”
“너도 이런 후진 집에 살고 있는 거야?”
“아니.”
“그럼 어디에 살고 있는 거야? 더 들어가야 돼?”
“다 왔어.”
카시아스가 멈춰 서서 오른쪽을 바라봤다.
놀랍게도 거기엔 지금까지 봐왔던 것과 동떨어진 저택이 떡하니 버티고 서 있었다.
“얼레?”
그것은 신축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보이는 2층 저택이었다.
넓은 정원도 깔끔하게 관리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담벼락도 이 집을 둘러싸고 있는 것만 새것처럼 튼튼하고 깔끔했다.
“여기야?”
저택에 두었던 시선을 카시아스에게 돌리며 물었다.
그런데 조금 전까지 바닥에 붙어 있던 고양이는 사라지고 육감적인 몸매를 가진 여인이 서 있었다.
나보다 머리 하나가 작은 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
그리고 흰 탱크톱과 청 핫팬츠, 허벅지까지 오는 검은 스타킹을 착용한 그녀는 카시아스였다.
지금 이것이 바로 카시아스 본신의 모습이었다.
“예고도 없이 변신하지 마.”
“변신한 게 아니라 변신을 푼 거야.”
“아, 그렇지.”
카시아스가 대문을 열어 정원으로 들어섰다.
“들어와.”
“응.”
그녀의 뒤를 따라 가자니 자꾸만 시선이 엉덩이에 닿는다.
‘나도 20살 청춘이라는 건가, 역시.’
아니, 단순히 청춘의 홍역을 겪어야 할 시기이기에 이러는 건 아니다.
여태껏 영혼의 퀘스트를 하며 거친 사내들의 인격을 많이 묻혀왔다.
그러다 보니 내 성정도 변해 전보다 거침없이 여인의 몸을 훑어보게 되는 것 같았다.
바로 지금처럼.
“엉덩이 그만 봐.”
카시아스가 못 참겠는지 말했다.
하지만 난 평소라면 생각도 못 했을 방식으로 대처했다.
“보이는데 어떻게 안 봐.”
“뭐?”
카시아스가 멈춰 서서 날 돌아봤다.
그러자 내 시선은 위로 슬쩍 올라가더니 그녀의 가슴께에 멈췄다.
카시아스는 어이가 없다는 듯 팔짱을 꼈다.
“너 지금 뭐하냐?”
“가슴 봤는데.”
“그게 상식적으로 할 말이냐?”
“레이브란데를 탓하고, 나한테 레이브란데의 인과율을 시전한 널 탓해. 영혼의 퀘스트를 하는 바람에 이 지경이 된 거니까.”
“그거 몇 번 했다고 순진하던 애가 마초로 변했군.”
“마초라고 할 것까지야. 그냥…… 조금 더 본능에 솔직해졌다고 할까?”
내가 겪었던 세상에서 남자들은 여인들의 몸을 아무렇지 않게 훑곤 했다. 여자들 역시 그런 남자들의 시선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즐기는 여자들이 과반수였다.
그렇다 보니 그 세계를 살아가는 사내들의 인식 자체가 여인의 몸을 훑는 건 당연하다는 식이었다.
게다가 하나같이 좀 마초였는가?
전부 어마어마한 마초들이었다.
그런 인격을 몇 번이나 거친 데다, 그중 두 번은 여자가 되는 경험도 했다.
솔직히 지금 카시아스의 가슴이나 엉덩이를 빤히 바라보는 건 남성의 성적 궁금증 때문만은 아니다.
내 안에 남아 있는 여인의 인격은 그 예쁜 엉덩이와 가슴을 보며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그것은 흥분과는 다른 감정이었다.
아무튼 지금 내 상태를 한마디로 정의하기엔 복잡하기 그지없다.
정상이 아니라는 얘기다.
난 카시아스가 내 대꾸에 뭐라고 더 쏘아붙일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젓고서 저택의 현관문을 열었다.
그녀를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저택 내부 역시 외관 못지않았다.
그다지 길지도 않은 복도 벽을 나 같은 예술 문외한은 전혀 알 수 없는 기괴한 그림들이 액자에 담겨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난해하고 기이하고 제멋대로인 도형들의 집합체 같은 그런 그림을 왜 구입해서 걸어놓는 건지 나는 모르겠다.
예술가들에겐 일반인이 이해할 수 없는 그들만의 영역이라도 있는 모양이다.
하긴 예전의 어떤 미술가는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하얀 캔버스를 ‘무상화’란 제목으로 전시했는데, 어마어마한 가격에 팔렸다지?
아무튼 카시아스는 그런 예술적 안목이 있는 모양이다.
복도가 끝나는 곳에서 마주한 거실 내부는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냉장고, 텔레비전, 에어컨, 전자레인지, 가스레인지 등등 모든 가전제품이 최신식이었다.
하나같이 지금 텔레비전에서 광고를 때리고 있는 물건들이다.
그뿐인가?
가죽 소파는 딱 봐도 어마어마한 가격을 자랑할 것 같았다.
장롱도, 협탁도, 테이블과 의자도 고풍스러움을 한껏 뽐내는 것들만 배치해 놓았다.
심지어 테이블 밑에는 양탄자도 깔려 있다.
“편한 곳에 아무 데나 앉아.”
이거 부담스러워서 편하게 있을 수 있겠어?
하지만 주인이 허락했으니 최대한 편하게 있어야겠지.
난 소파에 몸을 묻었다.
“역시 비싸니까 다르네.”
비싸면 그 값을 한다더니 소파는 내 엉덩이와 허리를 편안하게 감싸주었다.
“너 정말 잘해놓고 사는구나.”
카시아스는 그녀답지 않게 내게 주스 한 잔을 내오는 성의를 보였다.
“먹어. 비싼 사과 주스야.”
“사과 주스가 비싸봤자지.”
난 주스를 한 모금 마셨다.
꿀꺽.
“어?”
이거 엄청 맛있다.
“완전 맛있는데?”
“그렇겠지. 한 병에 만이천 원짜리니.”
“뭐, 뭐라고? 무슨 사과 주스가 한 병에 만이천 원이나 해?”
“말했잖아, 비싼 거라고.”
“아무리 그래도 정도가 있지.”
“부자들은 다 그렇게 먹어.”
“갑자기 지독한 괴리감이 밀려온다.”
카시아스가 내 옆에 풀썩 앉았다.
“초대했으니까 됐지?”
“응, 뭐…….”
“그럼 이제 알아서 놀다 가.”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말이야, 방귀야?
사람 초대해 놓고 알아서 놀다 가라니?
“손님이 찾아오면 집주인이 같이 놀아줘야지. 알아서 놀다 가라는 게 말이 돼?”
“……몰라.”
“몰라? 뭘 몰라?”
“손님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모른다고.”
카시아스는 말을 하며 뺨을 긁적였다.
내가 지금껏 보아왔던 그녀의 모습 중, 가장 어색해하는 모습이었다. 아니, 어색해하는 것 자체가 처음이다. 난 카시아스의 이런 모습 처음 본다.
그건 그렇고 손님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모른다는 건 또 무슨 얘기냐고!
“난 네 말이 도통 이해가 안 간다.”
“그러니까. 난 내 집에 누군가를 들여본 게 처음이란 말이다.”
“당연히 그렇겠지. 네가 지구에 와서 친구를 사귀었냐, 애인을 만들었냐. 그저 내 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니면서 괴롭혔잖아.”
“아니. 내가 살던 세상에서도 손님을 집에 들인 적 없어.”
“……너 왕따였냐?”
“…….”
카시아스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가만 생각하더니 이번엔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고?”
“이쪽 세상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게 맞겠지. 누구와도 친해지지 못했으니까.”
“하긴 이해가 바로 되긴 해. 네 성격 누가 받아주겠냐. 몇 마디만 주고받아도 분통 터지게 만드는 신묘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 넌데.”
“……그래. 내가 생각해도 나 같은 사람…… 받아주기 힘들 것 같아.”
……난 농담으로 한 얘긴데, 갑자기 왜 진지하게 받는 거야?
개그를 치면 애드립으로 받아쳐야지 그걸 다큐로 끌고 가면 안 되는 건데.
이러면 상황이 이상해지고, 나만 나쁜 사람 되잖아.
“카시아스. 내 말은…….”
“지웅아.”
“……어?”
“넌…… 나를 믿어?”
갑자기 그런 걸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난감해진다.
믿는다?
사람이 사람을 믿는다?
그건 쉬운 문제가 아니다.
누군가는 타인을 믿는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니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믿는다는 건…… 그러니까 내 입장에서 믿는다고 말하는 것의 정의는 그 사람에게 내 목숨조차도 맡길 수 있어야 한다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