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 히어로 116화
“……공작님?”
루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려왔다.
“그래요. 저는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약혼자가 있는 몸이니 그 마음을 숨겨야 했습니다. 당신을 지켜주겠다는 명목하에 가문에 들인 것도 그렇게나마 곁에 두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솔직해져야겠습니다. 더 이상 전 멜레사를 제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
“제 마음이 향하는 곳은 루, 당신입니다. 당신을…… 가져야겠습니다.”
루의 입이 다시 닫혔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왜 우는 건지, 눈물의 의미가 무얼 뜻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불안해졌다.
“루…… 만약 제 마음이 일방적인 것이라면…….”
“아니요.”
다시는 열리지 않을 것 같았던 그녀의 입이 너무도 쉽게 열렸다.
그녀와 나의 시선이 어지럽게 얽혔다.
루가 천천히 손을 내밀어 내 뺨을 어루만졌다.
“그런 게 아니에요. 오히려 전…… 제 마음이 일방적인 것이라고만 생각했었어요. 그래서…… 그래서 떠나려 했어요. 이 마음이 너무 아파서. 너무 괴로워서.”
“루…….”
루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안았다.
이것으로 됐다.
나도, 그녀도 그동안 속에만 품고 있던 마음을 확인했다.
이제 루를 지옥으로 몰아넣었던 것들을 처리해야 하는 일만이 남았다.
루를 조심스레 밀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공작님?”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무얼…… 하시려구요?”
“나를 기만한 이들에게 단죄를 내릴 겁니다. 봐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을 테니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알겠어요. 공작님 말대로 따를게요.”
루는 내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날 막지 않았다.
그녀도 우리 사이에 방해가 되는 모든 것들을 지우고 싶은 것이리라.
몇 달간 마음속에서 곪아 터진 상처는 그녀를 조금 더 독하고 강한 여인으로 만들었다.
* * *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반 남작과 멜레사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모습 그대로 사색이 되어 날 바라보고 있었다.
둘이 있던 방 안은 환락에 취해 내뿜었던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다.
내 손엔 검이 들려 있었다.
“고, 공작님. 이러지 마세요.”
“가, 각하! 이, 이건 오해가……!”
“닥쳐라!”
내 일갈에 둘 다 입을 다물었다.
반 남작은 사시나무 떨 듯 몸을 떨어댔다.
“감히 나를 기만해? 네놈은 목숨이 열 개라도 되는 모양이구나!”
“가, 각하! 제, 제발…… 제발 자비를 베푸시옵소서!”
“내가 지금 자비를 베푼다면 난 세상의 조롱거리가 될 것이다.”
“하, 함구하겠습니다! 절대로 이번 일을 발설하지 않겠습니다!”
“함구하겠다?”
“그렇습니다! 이번 일이 밖으로 새어 나가면 각하께서는 필시 세상의 조롱을 받게 될 것이옵니다!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셋만 입을 다문다면 이번 일은 없는 일이 되옵니다! 하나 저를 처단하시오면 이 일은 세상 모든 이가 알게 될 것이옵니다!”
반 남작은 살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열심히 혀를 놀렸다.
가소로운 놈.
나는 이미 지옥 같은 인생을 살아봤던 인간이다.
고작 세상의 조롱 따위가 두려워 그런 말을 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냐?
“네 녀석의 목숨을 살려준 대가로 평생 네가 입을 다물 거라는 보장을 어찌 하느냐. 나는 널 단죄하여 약혼녀 하나 간수 못 한 덜떨어진 공작이라는 조롱은 두렵지 않다. 하나! 약혼녀를 탐한 자를 살려둔 못난 사내라는 조롱은 듣기 싫다. 그러니 네 목을 베야겠다.”
“가, 각하!”
반 남작이 바닥에 털푸덕 주저앉아 뒤로 엉금엉금 물러났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마지막 발악이 되었다.
서걱!
“……!”
“꺄아악!”
반 남작의 머리가 바닥에 굴렀다.
머리를 잃은 놈의 몸뚱이가 피를 뿌리며 옆으로 넘어갔다.
난 서슬 퍼런 시선을 멜레사에게 돌렸다.
그녀가 돌연 무릎을 꿇고서 두 손을 모아 싹싹 빌었다.
“사, 살려주세요. 제발 이러지 마세요. 이, 이건…… 그러니까 실수였어요. 술이 과했나 봐요. 고, 공작님께서는 저를 사랑하시잖아요. 사랑으로…… 하, 한 번만 눈 감고 넘어가 주세요!”
사랑?
처음부터 그런 건 없었다.
“멜레사.”
“네, 네 공작님!”
“늦었소.”
“……네?”
“당신의 목을 베고 브리안 백작가와의 전쟁을 선포하겠소. 이미 명분은 더 찾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할 테니!”
“고, 공작님! 제발 이성을……!”
난 지금 충분히 이성적이다.
서걱.
“…….”
툭. 데구르르.
멜레사의 머리도 바닥에 떨어져 뒹굴었다.
그녀의 눈이 두어 번 깜빡였다. 그러고는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쩍 벌어진 입을 벙긋거리다가 절명했다.
몸뚱이는 반 남작의 몸뚱이가 그랬던 것처럼 힘없이 쓰러졌다.
이것으로 끝이다.
남은 건 브리안 백작가가 어찌 나오는지 보고 거기에 대처하는 일뿐이다.
하나 겁날 건 아무것도 없다.
브리안 백작가의 힘은 강하지 않다.
게다가 명분도 내게 있다.
그들은 함부로 움직일 수 없을 것이다.
* * *
루와 함께 로드리만 공작가로 돌아왔다.
우리 두 사람은 내 방 발코니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아 술을 주고받았다.
지금은 술의 힘이 조금 필요했다.
그녀에게나, 나에게나.
루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술이 강한 여인이었다.
벌써 화주를 두 병이나 같이 비웠는데도 흐트러진 모습 하나 보이질 않았다.
다만 얼굴은 조금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난 비어 있는 그녀의 잔에 술을 채워주며 물었다.
“앞으로 힘든 일이 계속 벌어질지도 모릅니다. 견딜 수 있겠습니까.”
루가 호수처럼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공작님, 저는 이 저택에 오게 된 이후부터 줄곧 힘들었어요. 차라리 세계가 멸망해서 죽어 버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사랑이라는 건 사람을 아프고 힘들게 만들더군요. 태어나서 이토록 괴로웠던 적이 없었어요. 그러니 앞으로 공작님만 제 곁에 계셔주신다면 어떠한 역경이 닥쳐와도 헤쳐 나갈 자신이 있어요.”
“……고맙습니다.”
“그보다…… 이제 말을 편히 놓으셔도 될 텐데요.”
“……알겠소.”
“그것도 높인 거잖아요.”
“이건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요.”
“알았어요. 저도 그 정도까지는 양보할게요.”
루가 날 바라보며 환히 웃었다.
필시 내 얼굴 담긴 미소도 그녀와 닮아 있겠지.
행복하다.
그래, 내가 바란 건 이런 행복이었다.
이제 되었다.
이것으로 된 것이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져도 내게 후회는 없다.
띠링!
―제서스의 진실 퀘스트를 완료하셨네요~ 제서스와 루는 앞으로 행복한 나날을 보내게 되겠죠? 선행을 쌓아 특전으로 히든 소울 ‘제서스 로드리만’이 귀속됩니다.
띠링!
퀘스트 종료.
일체화되었던 영혼의 기억에서 분리되어 루의 영혼 속으로 재접속합니다.
두 번의 기계음이 들린 후, 나는 제서스의 육신 안에서 빠져나왔다.
제서스와 루는 서로를 사랑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허공을 부유하던 내 주위로 환한 빛이 일었다.
그리고 눈앞의 광경이 변했다.
* * *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마제스의 신전에 멍하니 서 있었다.
루…… 나는 루다.
영혼의 보옥을 삼키고 제서스의 기억을 읽었다.
그가 얼마나 날 사랑했었는지 알게 되었다.
나 혼자 했던 가슴 아픈 사랑이 아니었다.
그것을 확인하고 나니 앞으로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게 되었다.
제서스가 내 마음을 확인하고, 나와 그의 사이를 이간질시키려 했던 멜레사의 본 모습을 알게 된다면 그는 필시 나를 택할 것이다.
멜레사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이건 내가 겪어왔던 고통에 대한 보답이다.
나도 행복해야 할 권리가 있다.
그리고 그 행복을 내가 가지고 싶다.
“더 이상…… 도망가지 않아.”
난 신전에서 나왔다.
집으로 돌아와 다시 떠날 채비를 하고 길을 나섰다.
제서스를 보러 갈 것이다.
“제서스…… 당신도 나처럼 레이브란데와 영혼의 계약을 하셨던 것이군요.”
비록 내가 보게 된 그의 기억 중 일부는 그가 나처럼 레이브란데와 계약을 맺음으로써 새롭게 쓰게 된 역사였으나,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의 마음을 확인했으니 그걸로 됐다.
나는 행복을 잡으러 갈 것이다.
띠링!
―‘루의 후회’ 퀘스트를 완료하셨네요~ 루는 이제 더 이상 예전의 연약한 여인이 아니랍니다. 그녀가 제서스 로드리만과 재회하게 된다면 이후부터 그녀의 인생은 행복으로 가득해지겠죠? 선행을 쌓아 1,023링크가 주어집니다.
띠링!
더블 퀘스트 종료.
일체화 되었던 영혼의 기억에서 분리되어 현실로 복귀합니다.
나는 다시 한번 타인의 육신에서 빠져나왔다.
루는 씩씩한 걸음으로 자신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나저나 한 번에 두 사람의 인생을 살았더니 정신이 하나도 없네.’
지금껏 내가 겪었던 퀘스트 중 가장 힘든 건 아니었으나 감정과 정신의 소모가 제일 컸다.
그래서 피로가 확 밀려왔다.
환한 빛이 일었다.
그 빛은 날 비로소 가상의 세상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설우의 계획
현실로 돌아왔다.
카시아스는 여전한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끝났냐.”
녀석이 물었다.
“응.”
“순식간이군.”
순식간?
그건 오로지 카시아스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얘기다.
내가 영혼의 퀘스트를 수행하는 동안 현실 속 시간은 멈춰 버린다.
카시아스에게는 눈 깜빡할 찰나도 되지 않는 순간이겠지만, 내겐 어마어마한 시간이 흘러갔다.
“히든 소울을 얻었어.”
“히든 소울?”
“응. 저번에는 히든 소울을 특전으로 주는 게 아니라 발견하는 데서 끝났었거든. 그러고는 직접 사게끔 만들더니 이번에는 그냥 주네.”
“누구의 영혼이었지?”
“제서스 로드리만.”
“신검…… 아니 광검의 영혼이군.”
“아니, 그 사람은 신검이야. 자기가 되고 싶어서 미치광이가 된 게 아니라고.”
순간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조금 전까지 제서스의 삶을 살았기에, 너무 감정이입이 되어 버린 모양이다.
하지만 카시아스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아무튼 제서스의 영혼을 얻게 되었다면 그건 호재야. 데브게니안 대륙 전체를 통틀어 가장 강한 전설의 검사가 그였으니까.”
“동의해. 대단한 사람이었어.”
“그런데 발생한 퀘스트는 루의 영혼과 관련된 것 아니었나?”
“맞아. 그녀의 퀘스트를 진행하다 보니 연계 퀘스트로 제서스의 것이 하나 더 뜨더라구. 그래서 더블 퀘스트가 되어 버렸어. 루의 퀘스트 안에 히든 퀘스트가 숨어 있었던 거지.”
“마인드 탭을 열어봐. 제서스의 영혼이 갖고 있는 힘이 뭔지 궁금하다.”
나도 그게 궁금해서 말하지 않아도 그럴 참이었다.
“마인드 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