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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 히어로-115화 (115/153)

데일리 히어로 115화

다음 날.

내 가문은 나와 멜레사의 여행 준비로 분주했다.

시종들은 새벽부터 일어나 여행에 필요한 짐들을 마차에 실었다.

루도 시종들과 그 일을 거들었다.

아침나절이 되어서 모든 준비가 끝났다.

나와 멜리사, 그리고 루는 마차 안에 올랐다.

멜레사는 내 옆에 팔짱을 끼고 앉았고, 루는 우리 맞은편에 앉았다.

“당신과 처음으로 떠나는 여행이라 너무 설레네요.”

멜레사는 평소보다 더 교태 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루의 심사를 뒤틀리게 하기 위해서였다.

루는 최대한 우리 쪽을 쳐다보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리고 담담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마차는 빠르게 달렸다.

반 포이르 남작의 저택은 마차로 딱 반나절이 걸린다.

오늘 밤에는 반 포이르 남작의 저택에서 머물게 되는 것이다.

아울러 멜레사의 거짓된 행복도 오늘 밤에 끝을 맺는다.

전생에 루의 인생을 망가뜨렸던 반 포이르 남작으로 인해서.

* * *

반 포이르 남작에게는 미리 전갈을 넣어둔 후였다.

저녁 무렵 우리는 반 남작의 저택에 도착했다.

반 남작은 그 돼지 같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머금고 우리를 반겨주었다.

“신검 제서스 로드리만 공작 각하. 이 누추한 곳까지 행차해 주시어 가문의 영광으로 생각하는 바입니다.”

가문의 영광이라.

그 영광이 오늘 네 가문을 피바다로 만들어놓는다 해도, 그리 말할 수 있을까?

“우리가 이렇게 보는 게 이번으로 세 번째인가?”

반 포이르 남작과는 일전에 연회장에서 두 번 정도 마주친 적이 있었다.

물론 난 그의 안 좋은 소문에 대해 익히 알고 있던지라 굳이 연을 맺으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반 남작은 자신을 철저히 무시하는 내게 와서 어떻게든 눈도장을 박으려고 주접을 떨어댔었다.

당시 냉랭하기만 했던 내가, 이렇게 몸소 자신을 찾아왔으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 물음에 반 남작의 얼굴엔 화색이 돌았다.

“기억해주셨습니까? 저는 저 같은 미천한 귀족 따위 안중에도 없는 줄 알았습니다.”

“그럴 리가.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네.”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난 그에게 멜레사를 소개했다.

“인사하게. 내 약혼녀 멜레사일세.”

멜레사를 바라보는 반 남작의 눈동자에 일순 욕정이 일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반 남작은 멜레사의 가슴과 골반을 빠르게 훑었다.

놈은 멜레사를 품고 싶어 한다.

색에 환장한 인간인 만큼 멜레사가 조금만 틈을 보이면 발정한 개마냥 달려들 것이다.

반 남작이 헤벌쭉 미소 지으며 멜레사에게 인사를 건넸다.

“처음 뵙겠습니다. 브리안 백작가의 영애 되시죠? 듣던 대로 대단한 미인이시로군요. 이거, 제서스 공작 각하가 너무나 부러워지는걸요? 하하하하하!”

반 남작이 크게 웃었다.

웃는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하고 기름기가 좔좔 흐르는 게 딱히 보기 좋은 비주얼은 아니다.

하지만 멜레사는 그런 반 남작을 보며 재미있다는 듯 함께 웃었다.

그건 처음 대면한 사람에 대한 예의 따위에서 나온 웃음이 아니었다.

멜레사는 너스레 떠는 반 남작을 보며 진정 즐거워하고 있었다.

짐승은 짐승을 알아본다.

반 남작도 멜레사도 짐승이다.

늘 욕정에 목이 말라 있는 철저한 짐승이다.

인사를 나눈 둘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흘렀다.

물론 그것은 그저 기류만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았다.

그녀는 지금 나를 놓칠 만큼 멍청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내가 조금만 손을 쓰면 그 기류는 심상찮은 달콤함을 머금고 핑크빛으로 물들 것이다.

거기에 정신이 팔려 돌이킬 수 없는 행위를 저지르고 난 이후엔 둘 다 파멸의 길을 걷고 있겠지.

한 여인의 인생을 망쳐 버린 더러운 것들아.

이 저택이 너희들을 사냥할 사냥터다.

* * *

반 남작은 나와 멜레사에게 가장 좋은 객실을 내주었다.

루에게는 일반 하인들이 쓰는 빈방을 배정해주었다.

루는 애초에 시종의 입장으로 따라온지라 좋은 대접을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방을 배정받은 다음엔 만찬이 열렸다.

역시 이 만찬에도 루는 초대받지 못했다.

그녀는 따로 지급된 음식을 그녀의 방에서 혼자 먹어야 했다.

반 남작은 만찬 자리에 좋은 술을 가져와 우리에게 권했다.

나는 술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멜레사는 좋아했다.

반 남작이 따라주는 술을 좋다고 받아 마셨다.

두 사람 다 얼큰하게 취기가 오르자 웃음이 잦아졌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멜레사의 눈에 점점 욕정이 차올랐다.

최근 이틀간은 멜레사를 안아주지 않았다.

오늘을 위해서였다.

색을 밝히는 여인이 계속해서 안아주던 남자에게 안기지 못한 만큼 몸이 잔뜩 달아올라 있을 것이다.

거기에 술까지 들어갔다.

오늘 밤을 그냥 보낸다는 건 그녀에겐 가혹한 일이리라.

하지만 난 절대 그녀를 안아줄 마음이 없었다.

술이 몇 순배 더 돌고 나서 나는 반 남작에게 제안을 하나 했다.

“우리 방으로 자리를 옮겨 마시는 게 어떻겠는가.”

그러자 반 남작은 과하게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제가 어찌 두 분이서 묵는 방에 발을 들이겠습니까. 피곤하시면 만찬은 여기서 파하고 그만 쉬도록 하시지요.”

“아닐세. 내 아내도 이제 한참 흥이 올랐는데 그냥 끝낼 수야 있겠나. 난 피곤하면 먼저 누워 잘 테니, 우리 방으로 옮겨서 한잔 더 하게나.”

“하나…….”

반 남작이 또다시 겸양하자 멜레사가 내 말을 거들었다.

“그래요. 같이 가서 한잔 더 해요, 백작님.”

“그럼…… 염치 불고하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하하하!”

멜레사까지 나서니 반 남작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제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우리 셋은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거기서도 술은 계속 이어졌다.

멜레사와 반 남작은 흥이 오를 대로 올라 완전히 막역한 사이처럼 서로를 대했다.

그러다 멜레사가 점점 솟구치는 욕정을 참기 힘든지 슬슬 반 남작을 돌려보내자는 신호를 보냈다.

나는 그것을 모른 체하고 버티다가 돌연 자리에서 일어났다.

“속이 좀 좋지 않군.”

내 말에 반 남작은 취해 버린 와중에도 날 챙기려 들었다.

“아니, 속이 안 좋으시다구요? 혹 제가 대접한 만찬 음식 중 입에 맞지 않는 것이라도 있던 건 아니셨는지 염려됩니다.”

“그런 건 아니야. 평소보다 술이 좀 과해서 그런 것 같군. 난 속을 비우러 다녀올 테니 둘이서 계속 자리를 즐기도록 해.”

“아, 그러십니까. 알겠습니다. 부디 편안한 속으로 돌아십시오.”

“빨리 오셔요.”

난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고 미리 숨겨 왔던 작은 유리병을 꺼냈다.

유리병 안에는 고운 입자의 가루가 가득 담겨 있었다.

한 손으로 유리병의 뚜껑을 열어 두 사람이 모르도록 허공에 뿌린 뒤, 숨을 참고 밖으로 나와 문을 닫았다.

‘이제 서로 말만 섞고 있지는 못하겠지.’

유리병에 담겨 있던 건 ‘루마의 가루’다.

사람의 성욕을 수십 배 이상 증폭시켜 버리는 위험한 물건으로 뒷세계에서 노는 인간들이 거래하는 마약의 일종이다.

난 그것을 미리 구해 가져온 것이다.

멜레사와 반 남작은 루마의 가루를 들이켰을 테니, 자연히 서로 몸을 섞게 될 테지.

멜레사는 이틀간 욕정을 해소하지 못한 상태고, 반 남작은 멜레사에게 성욕을 느끼고 있는 상태다.

그런 둘이 루마의 가루를 흡입한 이상 상대방을 탐하지 않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나는 루가 묵고 있는 방으로 향했다.

똑똑.

문을 두들기니 안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누구시죠?”

“접니다.”

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대신 차가운 음성이 나를 밀어냈다.

“공작님, 밤이 늦었어요.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내일 얘기하면 안 될까요?”

난 루의 말을 듣지 않고 손잡이를 잡아 돌렸다.

루가 배정받은 곳은 시종의 방이다.

시종들은 사생활이 없다.

특히나 반 남작처럼 호색한 밑에서 일하는 시종들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시종 중 얼굴이 반반하게 생긴 하녀의 경우 언제든 반 남작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니 문에 잠금장치 같은 건 애초부터 달려 있지 않았다.

생각대로 문은 손쉽게 열렸다.

문 너머에는 당황한 얼굴의 루가 침대에 앉아 날 보고 있었다.

“공작님…….”

난 비척거리며 침대로 다가갔다.

그리고 루의 허락도 받지 않은 채 그녀의 옆에 쓰러지듯 누워 버렸다.

루가 그런 날 바라보다 물었다.

“술…… 드신 건가요?”

“네.”

“취하셨나 봐요. 돌아가서 주무시고 내일 맑은 정신에 대화했으면 해요. 이러고 있는 걸 멜레사 님께서 보시기라도 하면 사단이 일어날 거예요.”

“멜레사…… 그녀는 지금 나 따위 안중에도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들리지 않으세요? 이 소리가?”

“무슨…….”

“모든 것을 놓아 버린 두 마리 짐승의 교성 소리 말입니다.”

루는 입을 다물고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루마의 가루에 취한 둘은 세상이 떠나가라 교성을 내지르며 몸을 섞는 모양이었다.

방문 밖으로 삐져나온 교성이 계단을 타고 내려와 복도를 지나쳐 루의 방 안까지 흘러들어 왔다.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내 귀엔 크게 들렸고, 루 역시 집중을 하면 충분히 들을 수 있을 터였다.

“……!”

놀란 루가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의 상황을 믿을 수 없는 건지 망부석처럼 굳어서는 날 바라보았다.

“난 지금 혼란스럽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알고 있습니까?”

“공작님…….”

“말해주세요. 내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에 대한 답을 루가 어떻게 알겠는가.

그녀는 모른다.

이런 상황 자체를 겪어보지 못한 여인이다.

난 루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놀란 그녀가 움찔거리며 손을 빼려 했다.

하지만 내 힘을 어쩌지는 못했다.

“공작님, 이러시면…….”

“루. 그냥 잡아주면…… 안 됩니까?”

버둥거리던 루의 움직임이 멎었다.

난 손에서 힘을 뺐다.

하지만 루는 내 손에서 손을 빼지 않았다.

“잠깐만…… 잠깐만 여기서 이러고 있게 해주십시오.”

“…….”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난 그것을 무언의 허락으로 받아들였다.

“고맙습니다, 루. 누군가 지금 날 잡아주지 않는다면 난 무슨 짓을 벌일지 알 수 없습니다.”

* * *

교성은 오래도록 이어졌다.

그러는 동안 난 루의 품에 반쯤 안겨 계속 위로받고 있었다.

사실 위로 따위 필요 없는데.

새벽이 어둠을 밀어낼 때쯤 되어서야 교성은 잦아들었다.

비로소 두 사람이 정신을 차린 모양이다.

그제야 난 루의 품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방을 나서려 했다.

그런 날 루가 뒤에서 붙잡았다.

“공작님, 어떻게 하시려구요?”

“……사실대로 말하겠습니다. 그녀는 저와 약혼한 사이이지만 저는 그녀를 사랑한 적 없습니다. 단 한순간도. 제가 그녀를 받아들였던 이유는 후대를 잇기 위해서였습니다. 저는 어리석게도 평생토록 그 어떤 여인조차 사랑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루를 만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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