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 히어로 114화
서재의 발코니에 앉아 홍차를 마셨다.
밤을 꼬박 새웠지만 피곤하지는 않았다.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이르는 순간 이미 내 육신은 인간의 것을 훨씬 초월해 버렸다.
며칠 밤을 새운다고 해도 육신의 피로는 크게 쌓이지 않는다.
정신적인 피로감이 조금 몰려올 뿐.
날 훑고 가는 산들바람을 느끼며 생각에 잠겼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해야 할 일은 명징하고 해야 할 것들도 간단하다.’
난 루를 원한다.
내 인생에 그녀만 있어주면 된다.
그걸 이루기 위해서는 그냥 루를 데리고 다른 곳으로 도피해 살아가면 그만일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런 삶이 훗날 그녀에게도 행복을 안겨다 줄 것인가?
하루하루 죄인처럼 숨어 지내야만 하는 인생이 되고 만다.
루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다.
그러니 숨어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
가장 좋은 건, 멜레사의 자리에 루가 서는 것이다.
난 지금 그러기 위해서 멜레사의 비위를 맞춰주려는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멜레사는 격정의 새벽을 맞은 후에 한 번도 본 적 없는 행복한 얼굴로 잠이 들었다.
드디어 내가 마음을 연 것이라 생각한 건가?
‘참 웃기는군.’
평소에는 그토록 냉정하게 날 관찰하고 지켜보던 여자다.
내가 루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도, 약혼녀인 자신을 돌 보듯한다는 것도 모두 명확하게 파악했다.
한데 그녀를 품에 안아주니 냉정은 눈 녹듯이 사라져 버렸다.
지난 밤 그녀는 감성으로만 가득 찬 어린아이 같았다.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니 수마의 유혹에 빠져 단잠에 든 것이겠지.
내 속에 감추어둔 마음을 봤다면, 과연 잠에 들 수 있었을까?
아니, 현실도 악몽 같았을 것이다.
애석하게도 멜레사가 악몽을 마주해야 할 날은 이제부터 하루하루 다가오며 카운트다운된다.
내가 그렇게 만들 테니.
‘날 원망해라. 얼마든지 원망해라. 그리고 끝내 용서하지 마라. 나 역시 널 원망하였으니.’
내가 지난 날 지옥 속을 거닐며 깨닫게 된 것은 하나다.
내가 지옥을 겪을 바엔, 타인을 지옥으로 보내버려야 한다는 것.
멜레사를 지옥으로 떠밀어야, 내가 행복한 낙원을 손에 넣을 수 있다.
* * *
“누가 알았겠어요. 그 콧대 높은 바람둥이 백작이 날 마음에 두고 있었을 줄. 공작님이 루를 만나기 위해 성을 오랫동안 비웠던 날. 연회장에서 만났는데 글쎄 은근히 추파를 던지지 뭐예요? 그래서 제가 뭐라 그랬는 줄 알아요? 아랫도리가 가벼운 남자는 마음도 가벼우니 언감생심 꿈에도 생각지 말라 그랬죠.”
멜레사는 나와 식사를 하며 즐거운 듯 떠들어댔다.
그녀는 예쁘고, 아름답다.
모든 남자가 탐을 낼 만큼.
심지어 약혼자인 내가 있는데도, 추근대는 이가 있을 정도다.
말을 하며 멜레사는 은근히 내 눈치를 살폈다.
내가 질투해 주기를 바라는 듯했다.
그걸 원한다면 그렇게 해주어야겠지.
“조만간 툴란 백작을 만나러 가야겠군.”
멜레사가 은근히 기뻐하며 손사래 쳤다.
“그러지 말아요. 괜히 저만 입 싼 여자 되겠어요.”
“그래도 내 여인에게 가져선 안 될 마음을 품었는데 그냥 있을 수 있겠소.”
멜레사의 얼굴에 미소가 만개했다.
“정말 공작님이 이렇게 변할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
“나 역시 몰랐소.”
“매일매일이 오늘 같았으면 좋겠어요. 그럼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것 같아요.”
“그렇게 될 거요.”
그 이후로도 멜레사는 계속해서 자신에게 추근댄 다른 귀족들의 흉을 보며 내 반응을 즐겼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자신의 무덤을 파고 있다.
그녀를 어떻게 파멸시켜야 할지 궁리하던 내게 아주 좋은 소스를 던져 주었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한 번은 꺾어보고 싶어 하는 꽃.’
조금의 빈틈만 보여도 남자는 그녀를 품에 안으려 할 것이다.
그럼 그 빈틈을 내가 만들어주면 된다.
며칠 밤을 같이 보내본바, 멜레사는 남자 경험이 많은 여인이다.
지금은 내 약혼녀가 되어 얌전히 보내는 듯하지만, 속에 가득 차 있는 욕정을 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난 그걸 이용하기로 했다.
파멸의 멜레사
햇살이 좋은 날이었다.
나는 루의 방을 찾았다.
루는 오늘도 거짓된 미소로 나를 반겼다.
그 미소 속에 감추어진 슬픔과 아픔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공작님, 어쩐 일이세요?”
“꼭 무슨 일이 있어야만 방문해야 하는 건가요?”
“네? 아, 아니요. 그런 건 아니에요. 아, 들어오세요.”
루의 방 안으로 들어서서 테이블에 앉았다.
테이블 위엔 아직 식지 않은 홍차 한 잔이 놓여 있었다.
루는 나처럼 홍차를 즐겨 마시곤 했다.
난 남은 홍차를 홀짝였다.
그러자 루가 적잖이 당황하며 말했다.
“아…… 그건 제가 마시던 건데. 홍차가 드시고 싶으시면 제가 새로 내올게요.”
“아니, 괜찮아요.”
“그래도…… 더러우실 텐데.”
더럽다.
그런 건 당신에게 어울리는 단어가 아니지.
멜레사라면 모를까.
“루.”
“네?”
“이곳 생활 많이 힘들 겁니다.”
“아니요, 편하고 좋아요. 시종분들도 잘 챙겨주시고.”
그리 말하는 루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왜…… 그러세요?”
“몸이 편하다고 다 편한 건 아닐 겁니다. 마음이 편해야 진정 편한 것 아니겠습니까.”
루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녀는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억지로 참는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곧 떠나려 했어요.”
“떠나다니? 어디로 말입니까.”
“제가 살던 곳으로요. 역시…… 이런 생활은 저한테 맞지 않아요.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죠. 저한테는 제가 살던 그 작은 마을이 분수에 맞아요.”
“이곳이 당신한테 과분하단 말입니까?”
“네. 아뢰기 황송하오나 사실 그래요. 모든 것이 다 과분하네요. 제 주변 환경도, 저한테 끝까지 말을 높이시는 공작님의 배려심도. 아니, 과분하다 못해 지나쳐서 불편할 정도예요. 죄송해요.”
루는 남에게 쓴소리, 싫은 소리를 잘 못하는 여인이다.
그런데 지금은 뭔가 단단히 마음을 먹은 것 같았다.
이런 식으로 정을 끊고 돌아가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난 절대 그녀를 이대로 놓아줄 생각이 없다.
“알겠습니다. 정 그렇다면 내가 붙잡을 순 없겠지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해요.”
“하지만 나도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무슨……?”
“돌아가기 전, 마지막으로 나와 여행을 떠나주었으면 합니다.”
“여행이라구요?”
“그렇습니다.”
“안 될 말이에요. 공작님께는 멜레사 님이 있으시잖아요. 분명히 기분 나빠 하실 거예요.”
“그녀도 함께 갈 겁니다.”
“죄송해요. 전 지금 공작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어요.”
그래.
이해가 가지 않는 게 정상이겠지.
루가 아니었다면 이런 대답을 하지도 않았을 테고.
보통의 여자들 같았다면 소드 마스터이자 신검의 칭호를 단 내가, 게다가 공작이라는 직위까지 갖고 있는 제서스 로드리만이 여행을 가자 했으면 무조건 그러겠다 했을 것이다.
내게 약혼녀가 있든 없든 그런 건 신경도 쓰지 않았을 테지.
하지만 루는 달라.
그녀는 오로지 나라는 인간 자체만 본다.
내 배경이나 위치, 허울 좋은 겉모습 같은 건 애초에 안중에도 없는 여인이다.
그래서 난 그녀가 좋고, 그러하기에 지금 당장 가슴이 아플지라도 거짓을 말해야겠다.
“내가 같이 가자 한 건, 당신이 여행 중 나와 멜레사 두 사람의 시중을 들어줬으면 해서입니다.”
“……네?”
루는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다.
반년 전에는 자신을 지켜주겠다며 데려온 사람이, 지금은 느닷없이 약혼녀와 오르는 여행길에 시종 일을 맡아달라 한다니.
상식 밖의 요구였다.
루는 한참 동안 말없이 날 응시했다.
그러다가 굳은 얼굴을 펴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어요. 언제 떠나실 거죠?”
“내일. 아침 일찍 움직일 생각입니다.”
“네 준비해 놓을게요. 따로 제가 챙겨야 하는 것들이 있다면 일러주세요.”
“당신 짐만 챙겨놓으면 됩니다. 여행은 일주일 정도 예상하고 있습니다.”
“알겠어요.”
“그럼 쉬십시오.”
난 루의 방을 나왔다.
그녀가 조용히 문을 닫았다.
“후우.”
뒤이어 작은 한숨 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렸다.
지금의 내 청력은 범인의 수준을 훨씬 넘어선다.
이것은 본래 내 힘이 아니다.
인생을 한 번 더 살게 되면서 얻게 된 힘이다.
터벅터벅.
복도를 거닐어 그녀의 방에서 멀어져 갔다.
그러나 여전히 내 귀엔 루의 방 안에서 나는 소리가 전부 흘러들어 왔다.
“그동안 너무 편하게만 지냈었죠. 정말 사람이라는 게 간사한 것 같아요. 공작님께서 저한테 그런 부탁을 하는 게 하등 이상할 게 없는데도 서운한 마음이 들 뻔했어요. 제가 뭐라고…… 공작님의 입장에서 보자면 아무것도 아닌 평민일 뿐인데. 여태껏 보살펴 준 은혜에 감사해하지 못할망정…… 정말 염치가 없네요, 나란 여자. 더 못된 마음이 들기 전에 떠나야겠어요. 감사했어요, 공작님.”
“…….”
그녀의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구슬픈 음성이, 내 가슴을 후벼 판다.
칼로 가슴을 뚫고 심장을 휘젓는 것 같다.
하지만 참아야 한다.
이 아픔은 훗날의 행복이 되어 돌아올 테니.
* * *
“여행이라구요?”
“그렇소.”
“아무런 말도 없다가 이렇게 갑자기요?”
멜레사가 고개를 모로 꺾으며 물었다.
“싫소?”
이번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그럴 리가요. 당신과 함께하는 여행이 싫을 리 있겠어요?”
“내일 일찍 떠날 예정이오.”
“알았어요. 시종에게 짐을 준비토록 할게요. 얼마나 떠날 예정인가요?”
“일주일 정도 될 거요. 그리고 루도 동행시킬 예정이오.”
그 말에 멜레사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지만, 그것은 찰나였다.
그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미소를 머금고 물었다.
“루는 왜요?”
“여행하는 동안 우리 시중을 들게 할 생각이오.”
“그런가요? 하지만 시중을 들게 할 요량이라면 차라리 로드리만 가의 시종 중 한 명을 데려가는 게 낫지 않을까요? 루가 시중드는 일에 익숙지도 않을 테고요.”
“여행에서 돌아오면 루는 우리 가문을 떠날 것이오. 그 전에 마지막으로 바깥 공기가 쐬게 해주고 싶어서 그렇소.”
멜레사의 눈썹 끝이 살짝 떨려왔다.
“루가…… 떠난다구요?”
“고향이 그리운 모양이더군.”
“아…… 그렇군요. 맞아요. 충분히 그런 마음이 들 법하죠. 여기에 와서 지금까지 딱히 하는 일도 없이 시간만 축냈으니. 이해해요. 안 그래도 루가 걱정되던 참이었는데, 차라리 잘됐네요.”
그녀는 뻔뻔하게 거짓을 말했다.
겉과 달리 속으로는 쾌재를 부르고 있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그렇게 알고 계시오.”
“알겠어요. 그런데 처음 행선지는 어딘가요?”
난 멜레사를 지그시 바라보며 대답했다.
“반 포이르 남작의 저택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