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 히어로 110화
“그래? 기분이라도 좋으니 다행…… 잠깐만. 너 방금 뭐라 그랬어?”
“기분이 좋다고 그랬습니다.”
“아니…… 너 안 그랬어. 이랬습니다, 저랬습니다. 어떻습니다. 늘 딱딱하게 말하던 애가 이번에는 ‘기분이 좋습니다’가 아니라 ‘기분이 좋아요’라고 했다고.”
“제가 그랬어요?”
“방금도! ‘그랬습니까?’가 아니라 ‘그랬어요?’라고 했잖아!”
“어…… 진짜…….”
설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우야. 아무래도 이거 차도가 있는 것 같아.”
“그런가 봐요. 저 괜찮아지고 있는가 봐요!”
“분명히 괜찮아지고 있는 거야!”
생각보다 설우의 상태가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로열 그룹의 사람들은 설우가 자폐아라는 것 하나만으로 장애인 취급을 했다.
만약 누군가 설우의 입장을 이해해 주고 사랑으로 보살펴 나갔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자폐증이 있다고 하더라도 일반인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생활을 하는 게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설우를 그렇게 이끌어 가려 노력하지 않았다.
그저 배척하고 짐처럼 생각했다.
그 안에서 설우는 점점 더 고립되어 갈 뿐이었던 것이다.
발작도 그래서 일어났던 것이겠지.
‘맞아. 어떤 드라마 속에서는 자폐아가 의사를 하기도 했었잖아?’
설우는 충분히 고쳐질 수 있다.
서로 맞지 않던 뇌의 불균형이 라모나의 능력으로 균형을 되찾고 있는 중이다.
“형…… 나 정말 괜찮아지는 거예요?”
설우가 눈물을 흘리며 물었다.
난 그런 설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넌 원래 괜찮았어. 다만 보통 사람들과 약간 다를 뿐이었지. 그건 네 잘못이 아니었어. 단지 아팠던 것뿐이니까. 하지만 이제 아픈 걸 다 치료하고 나면 넌 누구보다 멋진 사람이 될 거야. 정말이야, 설우야.”
“지웅이 형…….”
설우가 내 품에 푹 안겨 숨죽여 흐느꼈다.
지금 이 저택은 설우에게 창살 없는 감옥이나 마찬가지다.
설우는 마음대로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었다.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설우의 등을 천천히 쓸어주었다.
이제 거의 다 됐다.
설우는 완치될 수 있다.
* * *
집으로 돌아가는 길.
보통 사람과 다를 것 없이 자연스럽게 얘기하던 설우의 모습이 계속 떠올라 가슴이 벅차올랐다.
기분이 좋으니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으흠흠~”
내가 무슨 노래를 흥얼거리는지도 모른 채 걸음마저도 리드미컬해졌다.
집으로 가는 골목에 들어서서도 내 콧노래는 멈출 줄을 몰랐다.
그런데.
“신났네.”
“깜짝이야!”
어둠 속에서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고양이 한 마리가 좋았던 기분을 땅바닥으로 끌어 내렸다.
카시아스였다.
“뭐야, 갑자기?”
“너야말로 징그럽게 콧노래를 부르고 뭐하는 거야? 좋은 일이라도 있냐?”
“있지.”
“뭔데.”
“아픈 아이의 인생을 바꿔주게 되었지.”
“인생을 바꾼다…… 마치 자기가 신이라도 되는 듯 얘기하는군.”
“시비 그만 걸고. 왜 찾아왔어?”
“…….”
“말을 안 해?”
카시아스가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맘에 안 든다는 듯 따져 물었다.
“넌 날 보면 늘 그 말밖에 할 게 없냐?”
“무슨 말?”
“왜 찾아왔냐며.”
“용건이 있으니까 왔을 거 아니야.”
“전에도 말했지만 그냥 찾아올 수도 있다고 했잖아.”
“아, 그랬었나?”
“만날 때마다 기분 잡치게 하는군.”
“미안. 네 순수한 의도를 내가 또 오해했다.”
카시아스가 바닥에서 폴짝 뛰어 내 어깨에 올라탔다.
난 그 상태에서 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렇게 널 태우고 움직이는 건 또 오래간만이네.”
“그런가.”
“그렇지. 요새 우리 자주 못 보잖아. 네가 거의 안 찾아오니까.”
“그렇군.”
“……너 솔직히 말해. 할 말 있어서 왔지?”
카시아스는 내 시선을 외면했다.
그 행동이 더 나를 의심스럽게 만들었다.
“용무가 있어서 온 거잖아. 어서 얘기해.”
“……다운 타운. 다시 안 갈 거냐?”
역시 그랬어!
우와, 하마터면 깜빡 속을 뻔했네.
처음에는 그냥 찾아왔는데 사람 서운하게 만든다는 뉘앙스를 팍팍 풍겨서 날 미안하게 만들더니만!
“하여튼 솔직하지 못한 놈이라니까.”
“놈이 아니다. 여자라고, 나는.”
“그게 중요하냐?”
“안 중요해? 다시 사람으로 변해서 유혹해 줘?”
“절대 사양하겠어! 아무튼 용무가 있어서 찾아온 거 맞네.”
“대답이나 해라. 다운 타운에 다시 갈 생각이 없냐고 물었다.
“없다니까. 그 미친 곳을 왜 또 가냐고.”
“당장 가라고는 하지 않겠어. 하지만 나중에 여유가 조금 생기면 나와 함께 다운 타운으로 가줬으면 해.”
어라?
이 녀석이 왜 이렇게 저자세로 나온대?
“지금 부탁하는 거야?”
“그래. 부탁을 들어주기 힘들다면 이렇게 하지. 난 네게 레이브란데의 인과율을 시전함으로써 네 인생을 바꿔놓았다. 그 보답으로 다운 타운에 가달라고 하면 어떻지?”
“아니 뭐……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내가 안 갈 수는 없지.”
“가겠다는 건가?”
“그래. 당장은 힘들겠지만 네 말대로 여유 있을 때 가자.”
“고맙군.”
으아 적응 안 돼.
차라리 날 무시하고 짓밟고 깔아뭉개는 게 낫지.
카시아스의 이런 저자세는 정말 적응이 안 된다.
괜히 손발이 오그라드는 기분이다.
“너 근데 오늘따라 유난히…….”
내가 카시아스에게 말을 거는 찰나.
띠링!
루의 후회가 발동했습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Yes/No]
……영혼의 퀘스트가 발동했다.
또 다른 선택
띠링!
루의 후회가 발동했습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Yes/No]
나는 멍하니 허공에 둥둥 떠 있는 글자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카시아스가 내게 물었다.
“말을 하다 말고 멍 때리는 건 어느 나라 예의냐.”
“아니, 그게 아니고. 영혼의 퀘스트가 발동했어.”
“그래? 그럼 당장 해야지.”
네 말이 맞다. 해야지.
어느 순간부터 저기 보이는 [Yes/No]가 별 의미 없는 선택지가 되어 버렸다.
나한테 지금 선택권은 없다.
영혼의 퀘스트를 놓쳤다가 히든 소울 같은 걸 못 얻기라도 하면 레이브란데의 인과율은 실패로 돌아가고 마는 거니까.
내가 예스를 터치하려는 찰나.
“하지만 일전에도 얘기했듯이 싫으면 굳이 안 해도 돼.”
카시아스가 그렇게 말을 했다.
난 피식 웃고서 대꾸했다.
“전부터 계속 그래왔듯이 할 거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고 나면 조금씩 내 인격이 변해가는 기분이지만, 그것도 마냥 나쁘지는 않단 말이지.”
“그래. 처음 만났을 때 넌, 답답하고 찌질하고 우울하고 하여튼 최악이었지.”
“……꼭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잖아.”
“아무튼 그렇다면 해봐.”
“오케이.”
난 ‘Yes’를 터치했다.
팅―
맑은 기계음과 함께 내 영혼은 육신에서 빠져나와 다른 이의 기억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 * *
늘 그렇지만 그다지 좋지 못한 기분 속에서 눈을 떴다.
울렁거리는 속을 달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난 상당히 아름답게 꾸며진 넓은 방 침대 위에 홀로 앉아 있었다.
내 양쪽 뺨에 뜨거운 액체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눈물……?
울고 있는 건가?
그때 머릿속에서 기계음이 들렸다.
띠링!
―루의 후회 퀘스트를 수락하셨네요. 지금부터 지웅 님은 루의 세상을 가상 체험하게 될 거예요.
이제부터 시작이군.
―루의 기억을 인스톨할게요. 익히 아시겠지만 조금 어지러우실 거예요.
여인의 목소리가 끝나며 방대한 루의 기억들이 흘러 들어왔다.
‘루, 네가 돈을 원한다면 얼마든지 주겠다. 그러니 나를 따라와라.’
‘루, 나는 그대가 평민이라 해도 다른 귀족들처럼 함부로 대할 생각이 없소. 그러니 나를 따라오는 게 어떻겠소?’
‘귀족에게 대드는 것도 하극상이지만, 귀족의 말을 듣지 않는 것 또한 하극상입니다. 저는 멜리앙 백작님을 모시는 기사이니만큼 최대한 기사의 예로 당신을 대하겠지만, 끝내 저항한다면 제 검에 당신의 피를 묻히게 될지도 모릅니다.’
‘싫어요. 저는 돈이나 명예에 관심이 없어요. 그리고 제가 원치 않는 일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죽고 싶은 마음도 없어요. 그러니 제발 절 괴롭히지 말아주세요.’
‘당신이 루입니까?’
‘몇 번이고 귀족분들께서 절 찾아오셨지만, 전부 거절했어요. 그 어떤 협박에도 굴하지 않았어요. 그러니 같은 목적으로 오셨다면 돌아가 주세요.’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에요. 저는 당신을 지켜주려고 온 겁니다. 전 제서스 로드리만이라고 합니다. 제 권한으로 당신이 사는 마을에 귀족 접근 금지령을 내릴 겁니다.’
‘공작님께서는 당대 최고의 힘을 가진 귀족이시며, 소드 마스터의 칭호를 가진 검사이신데…… 왜…… 한낱 평민인 제게 이렇게까지 해주시는 거죠?’
‘당신의 재능은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그 재능이 삿된 욕망을 가진 귀족들의 손에 넘어가 이용당하는 걸 그냥 볼 수 없었습니다.’
‘오늘도 토끼를 세 마리나 잡아 왔어요, 루. 맛있게 요리해 주세요.’
‘고마워요. 공작님이 오시고 나서는 제 하루하루가 정말 즐거워요.’
‘만남이 있으면 이별도 있는 법이라더니 우리도 이별해야 할 때가 왔네요. 마냥 이 마을에만 있을 수 없는 게 제 입장이니 이해해 주세요. 하지만 더 이상 다른 귀족들이 루를 어떻게 하진 못할 겁니다. 제가 이 마을에 머무른 시간이 제법 되는 만큼, 루를 아낀다는 걸 충분히 알게 되었을 테죠.’
‘저도…… 따라가고 싶어요.’
‘그 말…… 진심인가요?’
‘멜레사, 소개하지. 이분이 루야. 루, 인사해요. 이쪽은 제 약혼여 멜레사 브리안이라고 해요. 브리안 백작 가문의 딸이죠.’
‘바보 같았지. 그렇게 멋진 분께 연인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니. 따라오는 게 아니었는데…….’
‘루, 자나요?’
‘멜레사 님, 이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
‘빨리 떠나요. 당신은 제서스를 너무 믿고 있네요. 제 약혼자이긴 하지만 제서스 역시도 똑같은 귀족이에요. 애초에 당신의 능력이 탐이 나서 마음을 빼앗아 따라오게끔 만든 거라구요. 같은 여자라서 당신의 처지가 너무 딱해 드리는 말이니까 잘 생각해 봐요. 벌써 이곳에서 같이 지낸 지 반년이에요. 그동안 당신이 남몰래 눈물 흘리는 걸 몇 번이나 봤어요.’
‘잘한 거야. 잘 떠나온 거야. 돌아갈 거야. 내가 있었던 곳으로.’
‘호오, 정말로 만지는 건 뭐든 투명해지는군. 정말 횡재했어. 거지꼴을 하고 돌아다니는데 얼굴 하나는 반반해서 노예로 팔까 싶었는데, 이러면 얘기가 다르지. 혹여라도 도망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네가 투명해진다고 본체가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발에 묶인 그 족쇄를 벗어나진 못하겠지.’
띠링!
―모든 기억이 인스톨되었어요. 루는 그녀가 살아온 인생 자체를 후회하고 있네요. 그녀에게 후회가 남지 않을 마지막을 안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