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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 히어로-100화 (100/153)

데일리 히어로 100화

“뭐?”

이 밤중에 다 큰 성인 여자와 내 방에 단둘이 있다 가족들한테 들키기라도 하면 난리 난다.

“그런 위험한 상황 만들고 싶지 않다, 난.”

“그럼 털쯤이야 감수해.”

“알았다, 알았어. 그나저나 왜 찾아온 거야?”

“심심해서 찾아왔다고 말했을 텐데. 그 나이에 치매라도 걸린 건가?”

“단순히? 정말 그게 다야?”

“그럼 뭐가 더 있을까?”

내가 아는 카시아스는 그런 시답잖은 이유로 찾아올 여인이 아니다.

무언가 목적이 확실히 있어야 움직이는 여인이다.

카시아스가 속을 알 수 없는 시선으로 날 쳐다봤다.

“뭐가 더 있을 것 같은데.”

“겸사겸사 왔다고 생각해, 그럼.”

“겸사겸사, 좋지. 여러 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있다는 얘긴데, 일단은 심심해서. 그리고 또 다른 이유들은?”

“참 피곤하게 구네.”

“너 상대하다 보면 사람 성격이 절로 이렇게 되더라.”

상대방 환장하게 하는 화법의 대명사가 누구한테 피곤하게 군다는 거야?

웃기지도 않는다.

“또 다른 이유들은?”

카시아스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가지런히 모은 앞발에 턱을 얹었다.

“이제는 아무 이유 없이 찾아오면 문전박대시킬 분위기로군.”

“……뭐야. 너 진짜 그냥 온 거야?”

“그렇다고 몇 번이나 말한 것 같은데.”

의외네.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죽는다던데.

아무튼 평소 같지 않던 패턴으로 행동하니 적응이 안 된다.

난 카시아스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그녀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카시아스가 눈을 날카롭게 뜨고 물었다.

“뭐하는 거야?”

“고양이 머리 쓰다듬어 준다.”

“겉모습만 고양이라는 거 아는 인간이 할 소리야?”

“어쨌든 지금은 고양이 맞잖아.”

“고양이답게 물어 버린다.”

“내 몸 강철인 거 잊었냐?”

“…….”

카시아스는 잔뜩 화난 얼굴로 날 쏘아봤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맘에 들지 않는다는 불만이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난 모른 척하고 계속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렇게 만지고 있으니까 정말 애완 고양이를 만져주는 것 같아서 기분이 괜찮았다.

물론 나한테 마구 만져지는 카시아스의 기분은 별로겠지만.

‘후후후, 어떠냐.’

속이 그냥 뻥 뚫린다.

그래, 이렇게 복수하는 날도 있어야지.

“으흠흠~”

기분이 좋으니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카시아스는 포기한 건지 말없이 내 손길을 가만히 느끼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폴리모프 해제.”

라고 말하더니.

“응?”

환한 빛에 휩싸였다.

조금 놀랐지만 나는 여전히 카시아스를 쓰다듬었다.

그런데 이불 속에 갑자기 묵직한 무언가가 확 들어오는 게 아닌가?

이어.

물컹.

카시아스를 만지던 내 손에 전혀 다른 느낌의 무언가가 잡혔다.

“……어? 헙!”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이불 밖으로 낯선 듯 익숙한 여인의 얼굴 하나가 쑥 튀어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고양이 카시아스의 머리가 있던 자리엔…….

물컹.

역시 이 느낌은.

“치워.”

“응.”

카시아스의 가슴이 있었다.

난 화들짝 놀라 손을 치웠다.

사람으로 돌아온 카시아스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켰다.

창을 넘어 들어온 달빛이 그녀의 머릿결에 부서졌다.

어둠 속에서 은은하게 보이는 카시아스의 실루엣은 대단히 아름다웠다.

살짝 보이는 얼굴과 몸매도 환상적이었다.

‘맞아…… 이렇게 예쁜 여자였지.’

고양이로 보낼 때는 전혀 인식 못 하고 있지만, 그녀는 톱클래스의 미모를 간직한 엄청난 미인이다.

얼굴, 몸매, 분위기, 그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는 여자다.

그런 여자가 지금 이 새벽에 내 방에 들어와 앉아 있다.

두근두근.

주책없게 가슴이 뛰었다.

“왜…… 갑자기 사람으로…….”

카시아스가 고개를 모로 꺾고 말했다.

“지기 싫어서.”

진짜 대단한 성격이다.

처음 내 앞에서 본래 모습을 보여줬을 때 그녀가 했던 말이 있다.

자기는 사람일 때보다 고양이로 지내는 게 더 편하다고.

그런데 지기 싫어서 사람으로 변했단다.

“앞으로 절대 네 머리 쓰다듬지 않을게.”

“좋은 생각이야.”

“이제 고양이로 돌아가지?”

“싫은데?”

“……왜?”

뭔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카시아스가 고혹적인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은근히 섹시해서 가슴은 전보다 더 뛰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넌 이 모습에 더 약한 것 같으니까.”

“약하기는 뭐가 약해? 고양이나 사람이나 어차피 속 알맹이는 똑같은데.”

“그래서? 내가 어떤 모습으로 변하든 상관없다?”

“당연하지.”

“과연 그럴까.”

카시아스가 갑자기 내게 얼굴을 확 들이밀었다.

“왜, 왜 이래!”

내가 당황하며 몸을 뒤로 빼자 그녀가 씩 웃었다.

“사람은 보이는 것에 많이 현혹되지. 특히 수컷은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에 더더욱 많이 현혹되는 법이고. 부끄러워할 건 없어. 그게 수컷의 본능이니까.”

말을 하며 카시아스는 점점 더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두 손으로 바닥을 짚고 무릎을 밀면서 반쯤 기어왔다.

이 여자가 갑자기 왜 이래!

아무리 나한테 지기 싫어도 그렇지 이건 오버하는 거잖아!

나는 뒤로 물러나다가 벽에 부딪혔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카시아스와 나의 간격은 점점 더 가까워졌다.

“자, 잠깐만. 졌어. 내가 잘못했어.”

완전히 졌다.

나는 더 견디지 못하고 사과를 건넸다.

하지만 카시아스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야릇한 미소까지 지어가며 더 농염하게 몸을 밀착시켰다.

얼굴과 얼굴도 코가 닿을 듯 가까워졌다.

카시아스의 콧김이 내 얼굴에 닿았다.

살짝 벌린 입에서도 뜨거운 숨이 느껴졌다.

‘이런 상황은 혈기왕성한 남자한테 너무 가혹해.’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그 짧은 시간 동안 머릿속에서 별의별 생각들이 다 지나갔다.

평소에 얼굴만 마주하면 으르렁거리던 게 카시아스와 나의 사이였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식의 전개라니?

꼭 소설 속에서나 나올 법한 일이 아닌가.

물론…… 소설 속 이야기보다 더 비현실적인 일들이 나한테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나는 상황이긴 하지만.

아무튼 이건 아니다.

카시아스가 마약을 해서 정신이 이상하지 않은 이상 이런 식으로 행동할 이유가 없었다.

‘혹시 이것도 꿈인가?’

그런 경우가 있지 않던가.

자다가 깨어난 줄 알았는데, 그게 다시 꿈이었고, 거기서 깨고 나니 다시 꿈이었고 무한정으로 꿈이 반복되는.

내가 지금 그 짝인 것 같…… 기는 얼어 죽을.

이건 리얼이다.

카시아스는 내 앞에서 고개를 살짝 꺾었다.

‘이건 완벽한 키스 포즌데?’

그러고서는 눈을 감았다.

나도 덩달아 눈을 감아 버리고 말았다.

이제는 될 대로 되라다.

그 상태로 입술을 달달 떨며 기다리고 있는데, 입술에 닿아야 할 게 계속해서 닿지를 않았다.

이상해서 감았던 눈을 떴다.

그리고 방금 전의 내 행동을 절실히 후회했다.

카시아스는 언제 내게 다가왔냐는 듯 저만치 떨어져서 팔짱을 끼고 있었다.

“뭐야, 그건? 나한테 뭐 바라는 거라도 있었던 모양이지?”

“…….”

당했다.

“날 그저 짜증 나는 존재 취급하는 줄 알았는데, 입술은 왜 내밀지? 너도 어쩔 수 없는 수컷이라 이건가? 상대가 누구든 간에 매력적인 여자라면 성욕을 해소하고 싶은가 보지?”

카시아스의 얼굴엔 승자의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하아, 할 말이 없다.

이거였군.

카시아스는 확실하게 내 약점을 잡기 위해서 연기를 한 거였어.

진짜 무서운 여자다.

“욕정이 그리 차고 넘치는데 풀지 못해서 어쩌나.”

“저기…… 내가 완벽하게 졌고, 잘못했고, 까불어서 미안해. 그만하자.”

“이제야 분수를 조금 아는군.”

“그럼 다시 고양이로 돌아가 줄래?”

“싫다.”

한 대 때리고 싶어진다.

카시아스는 그렇게 말하고서 다시 이불 위에 드러누웠다.

난 그런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조금 전에 꿨던 꿈이 떠올랐다.

“카시아스.”

“왜.”

“내가 꿈을 꿨는데.”

“남의 꿈 얘기 관심 없다.”

“데브게니안 대륙에 관련된 꿈이었어.”

“…….”

카시아스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건 계속 이야기해 보라는 뜻이었다.

“꿈속에서 남자 한 명이랑 여자 한 명을 봤어. 두 사람은 엄청나게 척박한 땅에 서 있었어.”

카시아스는 시선을 내게 두지 않고 천장에 고정시킨 채 이야기를 들었다.

자고로 청자의 태도가 좋아야 화자도 말할 기분이 난다는 걸 모르는 건가?

진짜 매너가 똥이다.

그래도 잠자코 있는 걸 보니 이야기를 듣고 싶긴 한 모양이다.

난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여자는 누군지 모르겠더라고. 후드를 푹 눌러써서 얼굴도 보이지 않고, 목소리도 드문드문 끊겨서 들리고. 그런데 남자는 확실히 봤어. 붉은색 머리카락, 붉은색 눈동자.”

“…….”

여전히 카시아스는 천장과 눈싸움만 하고 있다.

“이름이 사크란이었어.”

그제야 카시아스가 날 바라봤다.

그녀의 동공에 미세한 떨림이 일었다.

사크란이라는 이름에 동요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곧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래, 알아. 데브게니안 최악의 저주라 불리었던 사내지.”

“역시 알고 있었네.”

“그를 모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거다. 그만큼 강했고, 두려움의 대명사인 사내였으니까.”

하기사 모르는 게 더 이상하겠다.

“카시아스는 그에 대해 잘 알아?”

“남들이 아는 것만큼은 알지.”

“사크란을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던 것 같은데.”

“알게 모르게 많은 여인들이 그를 사랑했지. 여자라는 생물은 강한 것에 끌리게 마련이니까.”

“내가 꿨던 꿈속에서는 사크란도 그 여자를 사랑했던 것 같아. 여자의 일방적인 외사랑은 아니었어.”

“……그래.”

“카시아스는 사크란을 직접 만나본 적이 있어?”

“그게 왜 궁금하지?”

“데브게니안 대륙에서 카시아스는 대마법사였다며. 그럼 사크란을 한 번쯤 만나본 적이 있지 않았을까 싶어서.”

“내가 사크란과 동시대를 살았을 거란 보장이 있나?”

“아…… 그렇지.”

두 사람이 동시대를 살지 않았다면 만나는 건 불가능하다.

난 질문을 바꿨다.

“내가 왜 이런 꿈을 꾼 걸까? 영혼의 퀘스트와 연계된 현상 같은 걸까?”

“그것까지는 나도 정확하게 모른다. 시간이 지나면 절로 알게 되겠지.”

“너 말야, 갈수록 너무 무책임해지는 거 알고 있어?”

“일전에도 말했지만 이제는 너 스스로 잘 해나갈 수 있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코흘리개 어린애도 아닌데, 내가 언제까지 곁에서 돌봐줘야 하지?”

“날 세우기는. 그보다 이제 그만 가보지?”

“안 그래도 그럴 참이었다.”

카시아스는 벌떡 일어서서 창문을 열었다.

그녀의 몸이 빛나더니 다시 고양이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창틀 위로 훌쩍 뛰어오른 카시아스가 날 돌아봤다.

“게으름 피우지 말고 열심히 영혼을 모아라.”

“네가 말 안 해도 그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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