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 히어로 099화
가만 생각해 보니 여태껏 쉴 새 없이 달려온 것 같았다.
카시아스를 만나고 나서 내 인생은 그야말로 폭주기관차가 따로 없었다.
한 번도 브레이크를 걸지 않고 앞만 보며 나아갔다.
그 덕분에 많은 것이 변했다.
하지만 휴식이 반드시 필요하다.
휴식을 모르는 사람은 언젠가 망가지게 마련이라고 아버지가 자주 말씀하셨다.
어차피 오늘이 지나면 내일은 크리스마스이브, 그다음 날은 크리스마스다.
그리고 12월 26일.
금요일 날 겨울방학이 시작된다.
‘겨울방학하고 새해가 되면 나도 성인이 되는 거구나.’
사실 얼마 전까지는 어른이 된다는 것에 대한 로망이 제법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코딱지만큼도 없다.
영혼의 퀘스트를 하면서 어른이 무엇인지 이미 질리도록 겪어봤기 때문이다.
그들의 삶은 책임질 것이 없는 아이들의 삶보다 치열하고 무겁고 아팠으며, 힘들었다.
로망은 얼어 죽을 피곤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 어른이다.
그리고 나도 이제 곧 그 피곤한 어른이 되고 만다.
‘나이만 먹자. 정신은 늙지 말자.’
작은 다짐을 하는 사이 집에 도착했다.
“지웅이 왔니?”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엄마의 목소리가 날 반겼다.
“응~”
“밥 먹어야지?”
엄마는 부엌에서 찬거리를 만드는 중이었다.
난 화장실로 들어가며 대답했다.
“지금 생각 없어.”
“왜? 어디 아파?”
“아니, 조금 피곤해서. 어제 잠을 제대로 못 잤나 봐.”
“그래? 피곤하면 낮잠 좀 자.”
“응, 씻고.”
세면하고, 이빨 닦고, 손발 씻고 내 방으로 들어와서 드러누웠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수마가 빠르게 날 덮쳤고, 의식은 현실에서 발을 빼 몽환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 * *
그곳에 나는 없었다.
그저 내 의식만이 존재했다.
지금 내가 머물고 있는 이곳은 데브게니안 대륙이었다.
그중에서도 버려진 대지, 파르시탄의 허공을 부유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살아갈 수 없는 죽음의 땅.
모든 왕국들이 포기해 버린 절대중립의 지역.
생명의 기운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척박한 검은 대지가 바로 파르시탄이었다.
그 땅 위에 한 사내와 한 여인이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사내는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
그 앞에 마주 선 여인은 검은 모포를 두르고 있었다. 얼굴은 후드를 푹 눌러쓰고 있어서 보이지 않았다.
사내가 여인에게 말했다.
“바보 같은 짓이야.”
여인이 고개를 저었다.
“……지, ……아.”
여인도 뭐라고 하는 것 같은데 그녀의 이야기는 잘 들리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가서 들어보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얼굴이라도 확인할까 싶어 후드 안을 들여다봤다.
하지만 후드 안에는 어둠만 가득했다.
“어차피 나 같은 건 미움받기 위해서 태어난 놈이야. 평생토록 누군가에게 사랑받은 적이 없지. 이게 내 최후에 딱 어울려. 곧 연합군이 여기로 들이닥칠 거야. 개죽음 당하기 싫으면 빨리 가.”
여인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무…… 일…… 도, 난…… 에요.”
도무지 뭐라 그러는 건지 알 수가 없군.
사내는 여인의 어깨를 세게 쥐고 앞뒤로 흔들었다.
“고집 부리지 마! 어차피 이건 예상했던 일이야! 여기서 끝이라고! 그리고 나한테 매우 어울리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해. 짧은 인생이었지만 심심하진 않았어. 그거면 돼.”
여인이 흐느껴 우는 것 같았다.
사내는 그런 여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갑자기 입을 맞췄다.
두 사람의 뜨거운 키스가 이어졌다.
입술이 떨어지고 난 뒤, 사내가 여자를 거칠게 밀어냈다.
“이제 가. 데브게니안 최악의 저주, 사크란이라는 내 이름 하나랑 나를 사랑했던 여인이 있었다는 것만큼은 죽어서도 잊지 않고 기억할 테니까.”
데브게니안 최악의 저주 사크란?
누굴까.
게다가 나는 왜 이런 꿈을 꾸고 있는 걸까?
혹 사크란도 앞으로 내가 사야 할 영혼들 중 하나인 것일까?
히든 소울을 얻었을 때처럼 길버트의 퀘스트를 완료한 이후 연계되어 내게 나타나는 현상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사크란이라는 인물은 보통내기가 아닌 인물인 것 같다.
데브게니안 최악의 저주라는 별명부터가 범상찮다.
게다가 그가 하는 말로 미루어 봤을 때, 대륙연합군이 사크란 한 명을 잡기 위해서 파르시탄으로 몰려오는 중인 것 같았다.
얼마나 위험하고 강한 사내이면 대륙이 연합을 해서 잡으려 한단 말인가.
‘혹 이 녀석의 인생도 대신 살아야 한다면 정말 피곤하겠는데.’
만약 대륙연합군과 싸우는 시점부터 시작해야 할 경우 초장부터 지옥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제발 이 녀석이 영혼의 퀘스트를 내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사크란은 여인을 계속해서 밀어냈다.
하지만 여인은 사크란의 곁을 떠나갈 마음이 없어 보였다.
그러자 사크란이 새끼손가락 하나를 자신의 목에다 꽂았다.
푹!
“……!”
여인이 놀라 사크란에게 다가갔다.
사크란은 그런 뒤로 물러나며 손가락을 더 쑤셔 넣었다.
새끼손가락은 한마디가 넘게 사크란의 목을 찌르고 들어갔다.
“더 다가와 봐. 내가 어떻게 하는지.”
결국 여인은 사크란의 협박에 더 이상 다가가지 못했다.
“어차피 죽을 거 더 빨리 죽는 거 보고 싶으면 계속 그렇게 개겨.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눈앞에서 자살해 버린다면 기분이 어떨까? 그다지 유쾌한 경험은 아닐 텐데.”
“……어요.”
이번엔 대충 알아들었다.
여인은 알았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녀가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사크란은 그제야 목에 박아 넣었던 손가락을 뺐다.
그의 목에 뻥 뚫린 구멍에서 피가 울컥거리며 쏟아졌다.
하지만 사크란이 상처에 손바닥을 갖다 대고 꾹꾹 짓눌렀다 떼니, 구멍은 지진 듯한 상흔으로 매워져 있었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어. 어서 가. 내 마지막은 세상의 그 누구보다 화려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동정도 필요 없어. 네 동정이 내 값어치를 떨어뜨리도록 만들지 마. 내가 그런 걸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 거야.”
“…….”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계속해서 한 걸음 한 걸음 물러나다가 갑자기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마법사?’
공간 이동 마법을 사용한 것 같았다.
홀로 남은 사크란은 그제야 안심하는 얼굴이었다.
그가 입꼬리를 씩 말아 올렸다.
“당신도 참 등신 같은 여자야. 그 정도 배웠으면 돈이고 명예고 원하는 건 다 가질 수 있었을 텐데. 나 같은 걸 사랑해서 대륙 공적이 되어 버렸으니. 하지만……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해야지. 데브게니안 최악의 저주를 사랑하려면 말이야.”
사크란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는 지금 이 모든 상황이 그저 즐거운 것처럼 보였다.
곧 자신의 목을 건 대혈투가 벌어질 참이다.
그런데도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나중에는 콧노래도 불렀다.
그때 지평선 너머로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대지가 떨려왔다.
사방에서 대륙연합군이 몰려들고 있었다.
그 행렬의 끝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규모의 군대였다.
‘고작 사크란 한 명을 잡기 위해서 정말…… 대륙연합군이 몰려왔단 말이야?’
사크란이 하늘 위로 솟구쳐 올랐다.
그는 허공에 부유한 채 주변을 둘러보며 코웃음 쳤다.
“흥, 드디어 왔군.”
딱히 마법을 사용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어떻게 허공을 나는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는 자유자재로 하늘에서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럼…… 제대로 놀아볼까.”
사크란이 한 손을 위로 들어 올렸다.
그의 손 위에 집채만 한 불덩어리가 훅! 하고 피어났다.
화르르르륵!
맹렬히 타오르던 불덩어리는 이내 보랏빛으로 바뀌더니 종래엔 하얀빛으로 변했다.
화염이 응축된 초고열의 불덩어리가 된 것이다.
“아하하하하하하하!”
사크란은 크게 웃으며 들어 올린 손을 앞으로 밀었다.
동시에 불덩이가 광속으로 움직여 대륙연합군의 진영에 작렬했다.
퍼엉!
콰아아아아아앙!
어마어마한 폭발이 일었다.
그건 피하고 자시고 할 시간도 없는 공격이었다.
광속으로 날아드는 불덩이에 어떻게 대처한단 말인가.
응축된 불덩이는 제 덩치의 열 배가 넘는 큰 폭발일 일으켰고, 화염과 충격파에 휩쓸린 병사 천 명이 시체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더 끔찍한 것은.
“게속 먹어라. 버러지 같은 것들아.”
양팔을 높이 든 사크란의 머리 위에 그런 불덩이가 열 개나 만들어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사크란이 사악한 악동 같은 미소를 머금고 열 개의 불덩이를 사방으로 날렸다.
퍼어어어어엉!
콰아아아아아앙! 콰앙! 콰앙! 콰아아앙!
주변에서 무지막지한 폭발이 일었다.
대지가 온통 뒤집어졌다.
수만 구의 조각난 시체가 허공으로 비상했다가 소나기처럼 후두둑 떨어졌다.
주변은 순식간에 시산혈해를 이루었다.
“아하하하하하! 아하하하! 아하하하하하하핫!”
사크란은 그 광경을 보며 너무나도 신나게 웃었다.
기묘하고, 기이했다.
그의 웃음은…… 그저 신나 보이지만은 않았다.
데브게니안 최악의 저주
“헉!”
몸을 벌떡 일으켰다.
“하아, 하아.”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둘러봤다.
모든 공간에 어둠이 가득했지만 내 방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꿈…… 이었지.”
꿈은 꿈인데 너무 리얼해서 놀란 모양이다.
딱히 악몽이랄 건 없었다.
나는 그저 방관자의 입장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구경한 것뿐이니까.
내가 사크란이 된 것도, 정체 모를 여자가 된 것도, 허무하게 죽어 버린 대륙연합군의 병사가 된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생생하게 느껴졌던 꿈은 일상적인 꿈과는 다른 생소한 느낌을 전해주었다.
생소함이라는 건 낯설다는 것과 마찬가지 말이다.
낯섦 중에서도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낯섦이 있다.
이번엔 불편했다.
그래서 악몽을 꾼 것처럼 꿈에서 깨버렸다.
온몸이 땀에 흥건히 젖어 있었다.
똑똑.
“으악!”
갑자기 창문 두들기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쪽팔려서 얼른 입을 닫고 창문을 바라보았다.
창문 너머에는 카시아스가 창틀에 엎드려 비릿하게 웃고 있었다.
“뭐야? 왜 거기서 그러고 있어?”
“무서운 꿈이라도 꿨나 보지?”
“뭐?”
“심심해서 찾아왔는데 끙끙 앓더군. 아직까지 엄마 품을 못 벗어난 거야? 그래서 혼자 자면 악몽을 꾸나 봐?”
“그만 놀려라.”
“자존심이 상한다면 그만하도록 하지.”
요새 좀 잠잠하다 싶더니 하필이면 이런 타이밍에 나타나서 내게 굴욕을 주는 카시아스.
역시 명불허전이다.
날 괴롭히는 데는 카시아스를 따라올 사람이 없지, 암.
“이것 좀 열어.”
탁탁.
카시아스가 꼬리로 창문을 쳤다.
난 잠긴 창문을 열었다.
카시아스는 폴짝 뛰어서 방 안에 들어오더니 이불에 몸을 마구 비벼댔다.
“따뜻해서 좋다.”
“야…… 고양이 털 묻거든.”
창문을 닫고 카시아스의 곁에 앉았다.
그러자 카시아스가 날 쌜쭉하게 바라보다 물었다.
“그럼 사람으로 돌아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