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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 히어로-97화 (97/153)

데일리 히어로 097화

살라반이 진정 원하는 게 뭐였는지.

“마왕이 계속 마계에 건재한 이상, 마인들 중 누군가는 어차피 재림의 의식을 행하게 될 거야. 그들은 마족도, 인간도 아닌 반쪼가리들이거든. 그래서 마왕을 재림시켜 그에게 예쁨받고 싶은 욕심이 큰거지. 확실히 해두고 싶은 거야. 마인은 마족도 인간도 아닌데 마족이라면 치를 떠는 인간들의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단 말이야. 그건 상당히 불안한 일이야. 누군가가 우리 몸에 마족의 피가 흐른다는 걸 알게 되면 당장 여기저기서 목을 자르려 들 테니까.”

살라반은 마치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듯 부드럽게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잠자코 듣기만 했다.

“마족의 본능이 마인들을 부추기는 것도 있지만 근원적인 공포심도 마왕을 재림시키려는 것에 힘을 보태고 있어. 전 대륙에 얼마나 많은 마인이 퍼져 있는지 그건 알 수가 없어. 인마전쟁 당시 마족의 피를 뒤집어쓴 이들 중 그 피가 상처에 스민 몇몇의 유전자에 마족의 유전자가 스며들었던 모양이야. 그리고 그들의 후손 중 재수 없는 이들은 마인이 되어 태어난 거지. 나도 그 재수 없던 후손 중 한 명이고.”

전혀 몰랐던 이야기였다.

살라반도 그것에 대해 알게 된 지 얼마 안 되었을 테지.

마테리안이나 아니면 다른 마인 누군가에게 들었을 것이다.

“다른 마인들이 손을 쓰기 전에 내가 먼저 마왕을 재림시켜, 아공간으로 보내버리는 게 답이라고 생각했어. 그러면 그 안에서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하고 억겁의 세월을 보내야 할 테니까. 재림의 의식으로도 마왕을 아공간에서 빼내오진 못해.”

살라반이 마법 스크롤을 만지작거렸다.

“그런데 마왕의 재림을 위해선 제물이 필요했지. 하지만…… 이 일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들을 제물로 바칠 수는 없었어. 그래서 선택해야 했어. 아픈 선택이었지만…… 대업을 위해 내 동료들을 제물로 바치기로 했지.”

“……!”

“물론 마왕의 재림 의식을 위해 바쳐야 하는 제물의 수는 천 명이니만큼, 동료들의 목숨은 수를 채우는 데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을지도 몰라. 하지만 딱 그만큼만이라도 애꿎은 이들을 죽음에 말려들게 하기 싫었어.”

이제야 살라반이 무얼 하려 했는지, 왜 우리를 배신하고 죽음의 수렁으로 몰아넣었던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진실을 알게 된 난 그저 멍하니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놀랐을 거야. 미안. 대업을 위한다는 핑계로 너희들에게 아픈 짐을 지게 해서. 사실 길버트 너도 죽어줬으면 했어. 모두 죽고, 나도 너희들을 따라 마왕과 함께 아공간으로 가서 죽는 거지. 우리 전부 이 세상을 위해 희생을 하게 되는 거야.”

“내가 죽기를 바랐다고?”

“혼자 남아 버리면…… 그 긴 세월을 고통 속에서 보내야 할 테니까.”

맞는 말이었다.

동료들이 모두 다 죽어 버린 와중에 내가 과연 스스로를 지탱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크루루루루루룽!

갑자기 제단에서 마기가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지금껏 흘러나오던 마기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어마어마한 마기였다.

공동 안을 가득 메운 마기는 제단 위에 하나로 뭉쳐지며 사람의 형태를 갖춰가고 있었다.

난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게 마왕이라는 것을.

살라반이 양피지를 풀어 양손으로 잡고서는 제단 가까이 걸어갔다.

그 무렵, 드디어 마기는 완연한 마왕의 모습으로 변했다.

2미터는 될 법한 키에 머리엔 검고 굵은 뿔이 세 개가 나 있었다.

등에는 검은 날개가 쫙 뻗어 나왔다.

새하얀 피부, 허리까지 내려오는 검은색 머리와 붉은 눈동자.

감히 숨도 쉴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위압감을 내뿜는 절대적 존재가 이 세상에 재림했다.

“크흑!”

난 바닥에 널브러진 채로, 마왕의 기운에 짓눌려 컥컥거렸다.

한데 살라반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마왕의 앞에 똑바로 서서 그를 바라봤다.

마왕이 살라반을 마주 보며 물었다.

“네가 날 여기로 불렀느냐?”

“응.”

살라반이 다짜고짜 반말을 내뱉었다.

그러자 마왕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재미있는 녀석이구나. 감히 내게…….”

“시끄러워. 바쁘니까 빨리 끝내자. 아, 인사해야지. 길버트!”

살라반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게 던졌다.

정확히 내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그것은 투명한 액체가 담긴 유리병이었다.

그런데 유리병의 뚜껑이 열려 있었다.

유리병은 고운 포물선을 그리며 주둥이 쪽이 내 입을 향해 정확히 날아들었다.

난 입을 벌려 유리병을 꽉 물었다.

병 안에 있던 액체가 입으로 확 쏟아졌고, 그것을 모조리 삼켰다.

순간 어긋났던 뼈마디들이 모조리 제자리를 찾아 붙기 시작했다.

‘힐링 포션!’

그것은 기적의 물, 힐링 포션이었다.

“미안. 혼자만 남겨두게 돼서. 나 갈게. 남은 마인들은 네가 잘 정리해 줘.”

“살라반…….”

살라반이 활짝 미소 지으며 들고 있던 양피지를 쫙 찢었다.

“이놈! 무슨 짓을……!”

마왕이 그런 살라반의 목을 틀어쥐었다.

순간, 양피지에서 솟구친 빛이 마왕과 살라반을 감쌌다.

“사, 살라반! 살라바아아안!”

살라반은 명멸하는 빛과 함께 사라지며 내게 손을 흔들었다.

“안 돼에에에에!”

마왕의 절규가 울려 퍼진 이후.

공동 안에는 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살라반도, 마왕도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살라반.”

난 몸을 일으켰다.

엉망이었던 몸은 이미 완벽하게 회복되어 있었다.

그러나 구겨지고 찢어지고 조각나 버린 마음은 미치도록 욱신거렸다.

마인 사냥꾼

마왕의 재림은 살라반에 의해 실패로 끝났다.

그는 마왕을 어딘지 알 수 없는 아공간으로 데려갔다.

이제 다른 마인들이 마왕을 재림시키려 해도, 마왕은 그에 응답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마인들을 그냥 놔둘 수는 없었다.

마인들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위험한 녀석들이다.

그래서 난 마인들을 사냥하기로 했다.

얼마나 많은 마인들이 자신의 존재를 숨기고서 살아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들을 어떻게 찾아내서 없애야 하는지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찾다 보면 분명히 방법은 있을 것이다.

스스로 마인 사냥꾼이 되기로 다짐하면서 고블린의 동굴을 나섰다.

* * *

정처 없이 떠돌기 시작한 지 보름이 지났다.

그동안 난 야인처럼 생활했다.

아무 데서나 자고, 야생동물을 잡아먹으며, 맞닥뜨리는 몬스터들을 도륙했다.

몬스터들에게서 얻은 전리품을 몬스터 길드에 팔아 돈을 조금씩 마련했다.

사실 지금 내게 돈 같은 건 큰 의미가 없었다.

어디서 무얼 하며 지내도 내 한 몸은 건사할 수 있었다.

낮이 되면 걷고, 사냥하며 배를 채웠다.

밤이 되면 아무 데서나 망토를 두르고 모닥불을 피워 잠들었다.

그런 단순한 생활의 반복이었다.

왜?

마인을 사냥한다는 목표를 정했지만, 무엇부터 해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무작정 이렇게 지내다보면 어떤 식으로든 해답이 보일 것이라 생각했다.

살라반이 마왕을 데리고 아공간으로 사라진 이후 내 분노는 길을 잃었다.

살라반은 분명 동료들을 죽게 만든 원수다.

그러나 그는 인류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다.

해서 그를 무턱대고 저주할 수도 없었다.

어떻게 보면 살라반이야말로 대의를 위해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들을 버리고, 스스로의 목숨마저 버린 성인일지 모른다.

* * *

내 모든 생활이 달라진 지 반년이 지났다.

그동안 난 세 명의 마인을 사냥했다.

처음에는 막막했던 일들이 조금씩 내게 답을 던져 주었다.

마인들에게는 보통 사람과 다른 특징이 분명히 있었다.

녀석들은 거대한 신성력의 기운이 닿으면 눈이 일순간 붉은빛으로 변한다.

마를 제압하는 것은 그와 상반되는 기운인 신성력이다.

그걸 알게 된 이후, 난 신성력이 가득 담긴 아티팩트를 구입했다.

내 약지에 꼭 맞는 반지 형태로 만들어진 이 아티팩트의 이름은 ‘홀리 링(Holy Ring)’.

홀리 링을 끼고 있으면 내 반경 오백 미터까지 신성력이 퍼져 나간다.

그리고 신성력에 노출된 마인들은 눈이 붉은빛을 띠게 된다.

해서 난 홀리 링을 착용한 이후부터 늘 주변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하고 다녔다.

물론 내 눈매가 선한 편은 아니어서 몇 번 험악한 녀석들과 시비가 붙기도 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시비를 걸어온 놈들은 모두 곤죽이 되도록 얻어맞았다.

어찌 되었든 홀리 링의 도움을 받아 두 명의 마인을 처단했다.

‘내가 앞으로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

요즘 나는 잠들기 전에 늘 그런 생각을 한다.

전 대륙에 마인이 얼마나 많이 숨어 살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들을 다 처리하는 게 먼저일지, 내가 죽는 게 먼저일지 역시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찌 되었든 내 숨이 붙어 있는 동안 최대한 많은 마인들을 잡아 죽여야 한다.

그게 내 사명이고 살아가는 이유다.

* * *

메리디안이라는 이름의 소도시의 작은 여관.

그곳의 홀에서 난 맥주를 홀짝였다.

술에 취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다.

여기에서 난 또 마인을 만났다.

지금 내 옆 테이블에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술과 안주를 즐기는 두 명의 사내.

그들이 홀리 링에 반응했다.

녀석들은 신성력에 노출되자 붉어지는 눈빛을 재빨리 감췄지만 난 똑똑히 보았다.

그리고 놈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모두 엿들었다.

짧은 갈색 머리에 수염을 잔뜩 기른 털보의 이름은 재칼.

맞은편에 앉은 대머리 녀석의 이름은 반리보였다.

재칼과 반리보는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는 듯하며 은근히 날 의식했다.

난 놈들에게 노골적으로 불쾌한 시선을 던졌다.

그러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재칼이 내게 다가왔다.

“프리스트냐.”

내게서 신성력을 감지했으니 그렇게 짐작하는 게 당연했다.

난 피식 웃으며 테이블에 기대 놓은 바스타스 소드의 손잡이를 쥐었다.

“이런 걸 들고 다니는 성직자도 있나?”

“……따라 나와.”

“얼마든지.”

재칼과 반리보다 여관을 나섰다.

난 놈들의 뒤를 따랐다.

* * *

여관 근처의 인적이 없는 동산 위에서 마인들은 나와 마주 섰다.

휘이이잉―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내 머리카락을 훑고 지나갔다.

유난히 달이 밝은 밤이었다.

달빛을 따라 별빛도 찬란했다.

‘그날 밤도 이랬었지.’

내 소중한 동료들이 모두 떠나가 하늘의 별이 되어 버린 밤.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그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우리가 마인인 걸 알고 있어. 그렇지?”

재칼이 물었다.

“그럼 여기가 너희들 무덤 자리라는 것도 알겠군.”

내가 대답했다.

재칼과 반리보의 눈이 붉게 변했다.

이마에서는 검은 뿔이 자라났다.

동시에 그들의 몸에서 마기가 너울거리며 흘러나왔다.

“묘비에 누구 이름이 새겨질지는 끝까지 봐야 알겠지.”

계속해서 말을 하는 건 재칼이었다.

반리보는 벙어리마냥 입을 꾹 다물고서 그저 날 노려볼 뿐이었다.

수다스러운 녀석보다는 차라리 입 무거운 놈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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