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 히어로 095화
바닥엔 언데드 몬스터들의 조각나고 타 버린 시체가 가득했다.
나와 마테리안은 썩은 내가 진동하는 시체더미 위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이제 네 목을 내놓아야 할 때다, 마테리안.”
“아니, 이제 다 되었다.”
그때 마테리안의 뒤로 보이는 공동의 입구가 진득한 마기로 가득 차올랐다.
마테리안이 쾌락에 몸을 떨며 자신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마왕의 재림을 위한 게이트는 열렸다. 이제 누구도 게이트를 닫을 수 없다.”
……늦어 버린 건가?
“네가 날 죽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느냐? 물론 그럴 수 있겠지. 하나 마왕이 재림하면 마인들은 다시 부활한다. 네 손에 목이 떨어진 자쿤과 셀리아도 불멸자가 되어 되살아날 것이다.”
마인들은 죽은 시체를 언데드 몬스터로 부활시킨다.
마족의 피와 인간의 피가 반반씩 섞인 이들의 힘이 그 정도라면 마왕이 마인들을 온전히 부활시키는 것 역시 충분히 가능한 일일 테지.
어쩐지 자쿤과 셀리아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니 그토록 저돌적으로 내게 덤벼들었을 것이다.
“우리가 이겼다, 길버트.”
난 이죽거리는 마테리안에게 손을 내밀어 겨냥했다.
“무엇을 하려고? 마법을 시전하려는 것이냐? 좋을 대로 하거라. 얼마든지 죽어주마!”
“소원이라면. 라이트!”
치직! 치치직!
허공에서 생겨난 뇌전의 다발이 번쩍! 하며 마테리안에게 쏘아져 나갔다.
파지지지지직!
“끄…… 끄으으으으으으!”
마테리안은 전신이 감전되어 간질병 환자처럼 몸을 떨었다.
쩍 벌린 입에서는 고통에 찬 신음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는 웃고 있었다.
마테리안이 붉게 충혈된 눈으로 날 바라보며 말했다.
“끄으으! 나, 나는 부, 부활할 것…… 이다! 너는…… 으으으으! 죽음을…… 필멸자의 운명을 거, 거부하지…… 모, 못하리…… 라아아아! 으아아아아아아!”
한바탕 사자후를 내지른 마테리안이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털썩.
그는 까맣게 탄 잿덩이가 되었다.
화석처럼 굳어 버린 마테리안의 전신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난 그런 마테리안의 시체를 넘어 드디어 공동 안으로 진입했다.
공동은 여전히 내 전신을 압박하는 마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공동의 중앙에 그가 서 있었다.
“살라반.”
내 부름에 긴 은색 머리를 곱게 묶은 미남자가 돌아보았다.
“늦었네, 길버트.”
살라반은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날 바라봤다.
입가에 걸린 옅은 미소.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부드러운 미소.
자상한 말투.
도저히 마왕의 재림을 바라는 마인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는 말문이 턱 막혔다.
“많이 지쳐 보이네. 고생 많았지? 허기지지 않아?”
살라반은 마치 내가 옆집에서 놀러온 사람인 것처럼 대했다.
그에게선 일말의 긴장감도 느낄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런 그의 태도에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모호해졌다.
나 혼자 바보가 된 느낌이었다.
가슴속에 울컥거리며 차오르던 분노도 잠깐이나마 사라졌다.
하지만, 잠시 후 그보다 더 큰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살라반…… 너 뭐하는 거야.”
“마테리안한테 못 들었어? 얘기했다던데. 지금 마왕을 재림시키려 하고 있어.”
녀석은 저녁 메뉴가 무언지 읊듯 가볍게 말했다.
왜…… 이런 상황에서 녀석은 왜 이다지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거지?
“살라바아아아안!”
콰앙!
바스타드 소드를 역으로 잡아 바닥에 날을 꽂아 넣었다.
“이 미친 새끼야, 나랑 장난하자는 거냐?”
난 당장 미쳐 버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하지만 살라반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날 욕해서 네 분이 풀린다면 얼마든지 받아줄게. 하지만 그게 오히려 큰 분노를 일으킨다면 조금은 진정하는 게 좋지 않을까?”
“진정? 진정하라고? 너 때문에 레드 텅 용병단이 괴멸당했다. 피보다 진한 우정으로 맺어졌던 동료들이 모두 죽었다고!”
살라반은 덤덤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아.”
“알아? 그게 다냐? 동료를 위해선 죽음까지도 불사하겠다던 새끼의 입에서 나오는 대답이 고작 그게 다냔 말이야!”
“길버트.”
무슨 변명이라도 하려는 걸까?
살라반의 얼굴에서 비로소 미소가 사라졌다.
“짖어봐, 개새끼야.”
살라반이 내게서 시선을 돌려 놈의 뒤편에 만들어진 대리석 제단을 바라보았다.
대리석 제단은 정사각형의 모양이었고, 제단 위엔 기이한 형태의 핏빛 진이 그려져 있었다.
아니, 자세히 보니 그것은 피가 맞았다.
제단을 파서 진을 각인시킨 뒤, 그곳에다가 피를 담은 것이었다.
그리고 진에서부터 어마어마한 마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공동의 마기는 이제 전보다 더욱 짙어졌다.
“너는 나를 질책하고 싶을 거야. 원망스럽겠지.”
“고작?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싶을 정도다.”
“그래, 그럴 거야. 내가 변절자라고 느껴지겠지.”
“이미 오래전부터 연극을 해왔겠지. 넌 애초부터 우리와 형제의 연을 맺을 생각 따윈 없었어.”
“아니, 그렇지 않아.”
“헛소리 지껄일 거라면 그만 닥쳐라.”
“길버트. 나는 레드 텅 용병단의 사람들을 소중하다고 생각해. 전에도 지금도, 줄곧 그렇게 생각해 왔어.”
도대체 이 녀석이 지금 무슨 궤변을 늘어놓는 거지?
정신이 아주 나가 버린 놈인 건가?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는 거야?
“그따위 말을 지껄이는 새끼가 어떻게 동료들을 사지로 몰아넣었냔 말이다!”
난 바스타드 소드를 들어 살라반을 겨누었다.
하지만 살라반은 자신의 검엔 손도 갖다 대지 않았다.
그는 나와 싸울 마음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마기는커녕 미약한 살기조차도 느낄 수가 없었다.
“날 이해해 달라고는 하지 않을게. 하지만 난 진심이야. 내 말엔 일말의 거짓도 없어. 대장을 비롯해서 모든 레드 텅 용병단원들은 그 누구보다 소중한 이들이었어.”
“네 말대로 제발 그게 진심이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내가 겪은 상황은 그걸 다 부정해 버리는데 어쩌냐.”
“알아. 전부 이해해.”
“넌 처음부터 마인이라는 걸 숨겼어. 그리고 겉으로는 나와 형제의 의를 맺은 척 지냈지. 그 속이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다는 걸 멍청하게도 난 몰랐고.”
살라반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처음부터 속인 게 아니야. 처음에 난 내가 어떤 존재인지 몰랐어. 내가 길버트와 다른 용병들을 만난 건 열다섯 살의 겨울이었지. 그때에 난 그저 보통 사람들과 조금 다른 존재인 것 같다는 걸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을 뿐이야. 내가 각성하게 된 건 1년 전, 이맘때쯤 이었어.”
“네가 마인인 걸 몰랐다고?”
“응. 각성하기 전까지는 전혀 그런 쪽으로 생각해 보지도 않았으니까. 그런데 마인인 걸 각성하는 순간 내게 목표가 하나 생기더라고. 그건 내 마음대로 어찌할 수 없는 본능 같은 것이었어. 마인의 본능이 사람으로 커왔던 내 본성과 이성을 계속해서 지배하려 들었지.”
“그 목표라는 게 마왕의 재림인 거냐?”
살라반이 다시 미소 지었다.
그가 제단을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다.
“맞아.”
심경이 복잡했다.
살라반의 말이 사실이라면 녀석은 정말로 나와 레드 텅 용병단의 모두를 사랑했을 것이다.
그러다 마인임을 각성하고서 어쩔 수 없이 본능에 따라 행동했다는 얘기가 된다.
‘살라반이 처음부터 날 속여왔던 게 아니라면…… 그렇다면 난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
답이 나오질 않았다.
어찌 되었든 살라반은 동료들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장본인이다.
마인의 본능에 따라 움직였다는 것으로 그를 용서할 수는 없었다.
‘가만…… 뭔가 좀 이상해.’
난 살라반이 내게 했던 얘기들을 다시 한번 곱씹어 봤다.
어쩐지 개운치 않은 부분이 있었던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찾아냈다.
녀석의 말엔 결정적인 모순이 있다.
“넌 예전에도 지금에도 레드 텅 용병단의 모두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데 그런 놈이…… 마인으로 각성한 이후 동료들을 죽음으로 인도했어! 이건 어떻게 설명할 거냐!”
이건 녀석이 내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이번에는 또 어떤 식으로 상황을 빠져나가려 할지 기대가 될 정도다.
“소중한 동료들을 죽음으로 인도한 것 맞아. 그래서 가슴이 아팠어. 특히 예시는 내가 사랑했던 여인이니까. 더더욱 그랬지. 하지만 그래야만 했어.”
“무엇 때문에!”
“그걸…… 이야기하면, 네가 날 이해할까? 오히려 증오만 더 커질 거야. 듣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아.”
“들어야겠다. 설명해.”
“하지 않을래.”
“얘기해!”
“안 할 거야.”
“살라반!”
살라반이 방긋 웃으며 눈웃음을 쳤다.
“알잖아, 길버트. 나 은근히 고집 센 거.”
“난 널 죽여야 해.”
“알고 있어. 그게 대장이 할 일이지. 받아들일게, 네 입장. 하지만 나도 이대로 죽을 순 없어.”
어차피 마왕이 재림하면 죽어도 다시 살아날 녀석이 죽을 수 없다는 건 무슨 심보인지 모르겠다.
살라반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알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길버트. 사력을 다해 덤벼. 나도 널 죽여야 할 테니까.”
마왕 재림
살라반의 모습이 변했다.
마테리안과 다른 마인들처럼 눈이 붉어졌고, 이마엔 검은 뿔이 돋아났다.
몸에서도 지독한 마기가 너울거리며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의 입가에 맺힌 미소는 여전히 지워지지 않았다.
세상 모든 것이 다 변해도, 그 미소만큼은 변하지 않을 듯했다.
오싹하게 변해 버린 외모와는 너무나 상반되는 아름다운 미소.
그러나 녀석은 그런 미소를 머금은 채, 나와 생사결을 벌였다.
지금껏 살라반과 격렬한 대련을 벌인 적은 셀 수 없이 많았다.
하나 목숨을 놓고 싸우는 건 처음이었다.
그만큼 살라반과의 싸움은 생소했고, 치열했으며, 격정적이었다.
나는 바스타드 소드를 쉼 없이 휘둘렀고, 영력이 고갈될 때까지 마법을 시전했다.
하나, 살라반을 잡을 수는 없었다.
녀석은 다른 마인들과 확실히 달랐다.
놈이 쏘아내는 마기는 한 방 한 방이 위력적이었다.
몸에 제대로 맞으면 살갗을 뚫고 들어올 정도였다.
다른 마인의 마기는 몸속에 충격을 줄지언정, 아이언 스킨을 파고들진 못했다.
살라반의 마기는 달랐다.
조금이긴 했지만 내 살을 뚫어 놓았다.
그러나 나 역시 녹록하게 당하지는 않았다.
영력은 고갈되었고, 누적된 피로가 몸을 둔하게 만들었지만 살라반에게 위협적인 일격을 여러 번이나 날렸다.
우리는 피 튀기는 혈전을 벌였다.
살라반의 몸엔 바스타드 소드와 마법에 당한 상처가 가득했다.
나 역시 상황이 다르진 않았다.
전신이 멍투성이에다가 마기에 찢겨 벌어진 상처에서는 피가 계속해서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