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 히어로 094화
까드득!
난 얼른 몸을 일으켰다.
동시에 자쿤의 몸에서 전보다 진한 마기가 피어올랐다.
한데 그 마기들은 나를 향해 날아오지 않고 부러진 자쿤의 정강이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러자 부러졌던 정강이가 원래대로 되돌아왔다.
‘자가 회복?’
마인이란 것들은 저런 능력까지 있었군.
자쿤이 벌떡 일어나 멀쩡해진 다리로 땅을 탁탁 쳤다.
“별걸 다 하는군.”
자쿤의 미간에 세로줄이 깊이 파였다.
반면 셀리아의 미소는 저욱 짙어졌다.
“역시 매력 있어, 길버트.”
셀리아가 혀로 입술을 핥았다.
그 모습이 대단히 뇌쇄적이었다.
그녀는 지금 날 죽여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성욕을 느끼고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든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인간이다.
아니, 마인이기에 그게 가능한 것이겠지.
“역시 죽이기 전에 꼭 재미를 봐야겠어. 팔다리를 부러뜨려 놓고 하면 되겠지?”
“집중해라.”
자쿤이 셀리아에게 충고했다.
셀리아는 그 말에 코웃음 쳤다.
“그럼 네가 날 만족시켜 주든지. 너는 테크닉이 별로여서 싫어.”
“집중하라고.”
“나보다 약한 사람 명령은 듣기 싫은데, 어쩌나?”
자쿤은 셀리아에게 뭔가 더 하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입을 꾹 다물고 참았다.
녀석은 적어도 셀리아보다는 상황 판단을 하고 자신의 기분을 컨트롤할 줄 알았다.
“이번엔 잡는다.”
“달려가서 물어뜯어!”
셀리아가 손으로 날 가리키며 말했다.
자쿤은 셀리아의 명을 받은 개처럼 뛰어왔다.
난 왼팔에 감긴 채찍을 그제야 풀어내고서 다가오는 자쿤에게 주먹을 날렸다.
자쿤도 내게 주먹을 휘둘렀다.
두 개의 주먹이 허공에서 격돌하려는 순간!
“낭아권!”
다시 한번 낭아권을 시전했다.
콰앙!
“큭!”
나와 자쿤의 주먹이 정통으로 맞부딪혔다.
그리고.
콰지직!
자쿤의 주먹이 박살 났다.
뼈가 모조리 조각나 풀어져 버린 손은 연체동물처럼 흐물거렸다.
손만 그런 게 아니다.
낭아권의 충격이 제법 컸는지 손목은 물론이고 오른쪽 팔뼈 전체가 부러져 나갔다.
자쿤이 오른팔을 축 늘어뜨리고서 뒤로 물러났다.
놈은 마기를 일으켜 다시 오른팔을 치료하려 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틈을 줄 내가 아니다.
다시 달려들어 주먹으로 자쿤의 정수리를 내려치려 했다.
그대로 얻어맞으면 두개골이 깨질 것이다.
하지만.
휘리릭!
셀리아가 채찍을 휘둘렀다.
그것은 이번에도 궤도를 이상하게 꺾어가며 기어코 내 팔을 옭아맸다.
셀리아는 채찍을 강하게 당겼고, 난 주먹을 휘두를 수 없었다.
하지만, 여기까지도 예상하고 있었다.
그녀는 내게 속았다.
진짜는 주먹이 아니라 검이다!
난 다른 손에 쥔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지금까지와 다름없는 속도라면 자쿤이 피하든가, 셀리아가 다른 수를 내든가 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검을 더 빠르게 휘두를 수 있는!
다행히도 내게는 그런 방법이 존재했다.
“낭아권!”
난 검을 쥔 손으로 낭아권을 시전했다.
손이 노리는 곳은 허공이었다.
그러나 뻗어나간 손은 바스타드 소드를 들고 있다.
바스타드 소드의 날은 정확하게.
서걱!
자쿤의 목을 벴다.
“……!”
자쿤의 눈이 부릅떠졌다.
어깨에서 떨어진 녀석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졌다.
텅.
난 그것을 발로 짓밟아 터뜨렸다.
콰직!
자쿤의 우람한 몸뚱이는 잘린 목에서 피분수를 뿜어내며 뒤로 쓰러졌다.
털썩.
드디어 자쿤을 잡았다.
이제 셀리아와 일대일이다.
절대로 질 수 없는 싸움이다.
“하…… 재주 좀 부리네?”
셀리아가 표독스런 시선을 내게 던졌다.
그러더니 지금까지와 다른 서늘한 미소를 머금었다.
“역시 넌 일단 죽이고 봐야겠어. 시체랑 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아.”
셀리아의 정신 나간 말에 대응해 줄 대답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미친년.”
그러자 셀리아가 광소를 터뜨렸다.
“아하하하하하하하하!”
역시 미친년이 맞다.
셀리아는 한참을 웃다가 눈물까지 흘려댔다.
그러더니 겨우 진정하고 내게 말했다.
“네 생애 최고의 미친년이 되어줄게.”
살라반
셀리아의 채찍이 내 몸 곳곳을 때렸다.
살갗이 터져 나가지는 않았다.
다만 옷이 찢어졌고, 곳곳에 멍이 들었다.
그녀의 채찍은 내가 잡으려 하면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오묘하게 몸을 틀어 빠져나갔다.
그것은 손놀림이 빠르다고 잡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결국 셀리아를 처리하지 않으면 이 채찍은 평생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난 이미 두 사람을 상대하며 쌓인 대미지로 피로가 누적된 상태다.
최상의 컨디션이었다면 이깟 채찍 따위 아무것도 아니었겠지.
그러나 지금은 그 한 방 한 방이 무겁게 다가온다.
나는 채찍을 맞으며 앞으로 몸을 날렸다.
셀리아의 손놀림이 더 빨라졌다.
채찍이 전보다 매섭게 내 전신을 두들겼다.
짝! 짝! 짝! 짝!
난 그녀의 채찍을 무시하고 오로지 셀리아만 보며 무섭게 달려들었다.
셀리아는 내가 지척에 다다르자 뒤로 몸을 뺐다.
그러면서 채찍을 사납게 휘둘렀다.
짜아악!
그 전보다 훨씬 강도 높은 채찍이 내 등을 아프게 가격했다.
아마 이런 식이라면 난 평생 그녀를 잡을 수 없을 것이다.
하나, 내게 숨겨놓은 무기들은 많이 있다.
난 손을 펼쳐 셀리아를 겨냥하고 지 속성 중급 마법을 시전했다.
“더트!”
시전어가 흘러나오는 순간, 그녀가 디디고 서 있던 주변의 땅이 확! 솟구쳐 올랐다.
그러더니 단단한 돌덩이가 기묘하게 형태를 변형시켜 그녀의 양다리를 옭아맸다.
“어?”
셀리아가 당황해서 자신의 다리를 바라봤다.
그 사이 벌써 난 셀리아의 코앞까지 다다랐다.
셀리아가 창백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잡혔네?”
“죽어라.”
퍼억!
주먹으로 셀리아의 복부를 때렸다.
그녀의 허리가 구겨지는 순간.
서걱!
바스타드 소드를 작두처럼 내리그었다.
턱. 털썩.
잘린 그녀의 머리가 먼저 땅바닥에 떨어졌고, 몸이 따라서 쓰러졌다.
이로써 셀리아도 정리했다.
이제 남은 건 마테리안과…… 살라반뿐이다.
난 잠시 지체되었던 발걸음을 다시 옮겼다.
* * *
동굴은 넓었고, 언데드 몬스터는 득실 거렸다.
마인들이 시체를 부활시켜 곳곳에 배치시켜 놓은 언데드 몬스터들이 나를 볼 때마다 피를 갈구하며 달려들었다.
좀비, 스켈레톤, 구울.
이 세 종류가 내가 미로 같은 동굴 안을 헤집고 다니며 만났던 언데드 몬스터들이다.
셋 다 그다지 강한 녀석들은 아니다.
구울은 좀비의 업그레이드판이다.
좀비보다 완력이 더 강하고 스피드가 있으며, 강력한 시독(屍毒)까지 가지고 있다.
그래서 놈들과 싸우다 잘못 할퀴기라도 하면 상처로 시독이 침투해 온몸이 썩어 버리고 만다.
그러나 강철과 다름없는 내 몸엔 구울의 손톱이 박히질 않았다.
언데드 몬스터들과의 싸움에서 다친 곳은 하나도 없었지만, 점점 피로가 누적되는 것이 문제였다.
벌써 내가 쓰러뜨리고 지나간 언데드 몬스터의 수만 오백이 넘어갔다.
내가 아무리 강한 힘을 얻었다 한들, 신이 아닌 인간이다.
내게도 한정된 에너지가 있고, 그것이 다 떨어지면 피로하게 되며, 피로는 곧 몸을 지치게 만든다.
지금은 심신이 다 피로한 상태다.
언제까지 언데드 몬스터들만 상대하며 힘을 뺄 수는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동굴은 거의 다 둘러보았다.
이제 남은 곳은 동굴의 가장 안쪽, 넓은 공동이 있는 곳이다.
마왕의 재림을 위한 의식은 거기서 행해지고 있겠지.
공동에 가까워질수록 부산스러운 소리들이 들려왔다.
느리게 터벅터벅 움직이는 발소리가 여럿.
거친 호흡이 또 여럿.
그리고 바람이 세차게 요동치는 소리.
그것들이 한데 섞여 내 귀를 어지럽혔다.
최후의 공동에 분명히 마테리안과 살라반이 있다.
잠시 넣어두었던 바스타드 소드를 다시 꺼내 들고 앞으로 나아갔다.
공동으로 향하는 길은 지금까지와 달리 미로가 아닌 쫙 뻗은 직선이었다.
그런데 길 끝엔 당연히 있어야 할 공동 대신 막다른 길만 존재했다.
자세히 보니 공동의 안쪽에서 거대한 바위 같은 것으로 입구를 막아놓은 것이었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짓이다.
난 주먹을 쥐고 낭아권을 시전했다.
“낭아권!”
쐐애애액!
콰앙!
빠르게 날아간 주먹이 바위를 때렸다.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지닌 낭아권에 정통으로 맞았으니 입구를 틀어막은 게 집채만 한 바위라 해도 버틸 재간이 없을 것이다.
쩌저적! 퍼서석!
바위엔 푹 파인 타격점을 중심으로 삽시간에 잔금이 일었다.
그리고 우르르 무너져 버리는 그 순간!
퍼어어어어엉!
갑작스런 폭발이 일었다.
나는 미처 대비하지 못한 채 폭발의 불길과 충격파에 휩쓸려 뒤로 죽 날아갔다.
콰당탕!
볼썽사납게 바닥을 굴렀다.
귀가 먹먹했고, 시야가 핑핑 돌았다.
상당한 충격파가 약간의 내상을 입힌 것 같았다.
하지만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시야가 어지럽게 흔들렸다.
눈에 비치는 사물들이 세 개로 겹쳤다.
머리를 휘젓고 억지로 일어섰다.
연기가 먼지구름이 피어오르는 공동의 입구에서 좀비, 스켈레톤, 구울들이 몰려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놈들의 뒤로 마테리안이 보였다.
그는 사악한 얼굴로 크게 소리쳤다.
“마왕의 재림을 위한 의식은 끝났다!”
“……뭐?”
“넌 우리를 막지 못했다, 길버트. 이제 네게 남은 건 영원한 안식뿐! 그것이야말로 필멸자(必滅者)가 도달해야 할 단 하나의 진리! 길버트여. 먼저 간 네 동료들의 발자취를 따라 걷거라!”
마테리안의 몸에서 마기가 피어올랐다.
‘늦어 버린 건가?’
마왕 재림을 위한 의식이 끝났다면 내가 막을 방도가 없는 것인가?
‘아니…… 아직 모른다.’
마테리안의 말이 사실이라는 보장이 어디 있는가?
녀석은 어쩌면 거짓을 늘어놓아 시간을 벌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만약 놈의 말이 정말이라고 해도, 이제 의식이 끝난 것일 뿐, 마왕 자체가 재림한 건 아니다.
그랬다면 마테리안이 나설 필요 없이 당장 마왕에게 짓밟혀 죽었을 테지!
난 바스타드 소드를 들고 천천히 걸어 나갔다.
언데드 몬스터들은 그런 나를 향해 마찬가지로 천천히 다가왔다.
마테리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끝까지 미련한 인간이로군.”
“더럽고 비열한 마인보단 미련한 인간이 낫겠지.”
“유언이라 생각하지.”
“그 말 그대로 돌려주마!”
언데드 몬스터들이 내 사정권 내에 들어오는 순간 바스타드 소드가 불을 뿜었다.
동시에 뇌, 화, 지 속성의 중급 마법을 마구잡이로 시전했다.
언데드 몬스터들은 불에 뛰어드는 나방들마냥 속수무책 쓰러져 나갔다.
사실 이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전투였다.
언데드 몬스터들이 나를 어쩌지 못한다는 건, 한 번 싸워봤던 마테리안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도 이런 무의미한 전투를 벌인다는 것은 시간을 끌기 위한 수작이라는 걸 스스로 증명하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하나, 과연 이걸로 얼마나 시간을 벌 수 있을까?
길어야 10분이다.
그렇다는 건 그 시간 안에 마왕이 재림한다는 것이다.
최대한 빨리 이 장해물을 뚫고 지나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