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 히어로 089화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호위기사 제르만을 대동한 마테리안 남작이 날 노려보고 있었다.
“더 이상 무의미한 살인은 그만두어라!”
스르릉!
마테리안 남작과 제르만이 검을 뽑아 들었다.
허공에서 마테리안 남작과 내 시선이 맞부딪쳤다.
그의 눈동자는 이해 못 할 광기에 젖어 있었다.
이제껏 내가 봐왔던 청렴결백하고 공명정대하며 늘 평민의 편에 섰던 어진 마테리안 남작은 거기에 없었다.
대체 무엇이 그를 이토록 변하게 만든 것인가?
아니면, 원래 이런 사람이었던가?
내가 알고 있던 마테리안 남작은 다 만들어진 거짓 인물이었단 말인가?
“당신한테 묻고 싶은 게 많습니다.”
“검을 거두어라, 길버트!”
검을 거두라고?
웃기는 소리.
서걱!
“……!”
바스타드 소드는 무심하게 휘둘러졌고, 집사 포르마의 머리가 바닥으로 떨어져 뒹굴었다.
털썩.
머리를 잃은 몸뚱이는 힘없이 쓰러져 경련을 일으켰다.
“길버트으!”
마테리안 남작이 목이 터져라 고함쳤다.
그가 호랑이 같은 눈을 부릅떴다.
한 번도 본 적 없던 무시무시한 얼굴.
저것이 그동안 미소 속에 감춰뒀던 그의 진짜 모습이란 말인가?
난 바스타드 소드를 마테리안 남작에게 겨누었다.
“왜 그랬습니까?”
“무엇을 따지러 온 것이냐!”
마테리안 남작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되물었다.
“나를…… 레드 텅 용병단을 왜 죽이려 한 겁니까!”
“멋대로 내 저택에 쳐들어와 무고한 생명들의 목을 베놓고서 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이란 말이야!”
“당신의 기사와 병사들이 날 죽이러 왔습니다. 살라반! 살라반의 배신으로 고블린을 잡으러 갔던 레드 텅 용병단은 트롤 무리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나만 겨우 살아남아 동료들 몰래 사둔 저택으로 돌아왔으나 미리 와서 잠복하고 있던 기사와 사병들이 날 죽이려 했습니다! 그 사병들의 검과 갑주엔 마테리안 남작가의 문양이 각인되어 있었단 말입니다!”
“그러하겠지!”
뭐지?
지금 순순히 자신이 벌인 짓을 인정하는 건가?
하지만 내 예상은 틀렸다.
“너희 반란군 놈들을 제압하기 위해서 내가 직접 보냈으니!”
“……뭐? 반란군이라니…… 그게 지금 무슨…….”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살라반이 아니었으면 레드 텅 용병단이 칼밥만 평생 먹고 살 순진한 녀석들이라고 생각했겠지. 그러나 살라반은 너희들이 꾸미고 있던 반란에 대해 소상히 털어놓았다.”
“살라반이…… 그랬다고? 녀석은 어디 있습니까?”
“알 필요 있을까? 다만, 이번 역적 토벌을 하게 된 데엔 살라반의 공이 컸고, 그는 진심으로 뉘우치고 있었기에, 죄를 면해주기로 했다.”
“누가? 국왕 폐하께서?”
“말을 높여라!”
호위기사 제르만이 노성을 터뜨렸다.
마테리안 남작이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어차피 이 자리에서 처형될 놈이다.”
“누가 살라반의 죄를 면해주기로 했느냐 물었다!”
“아직 국왕 폐하께선 이 일을 모르신다. 그러니 나와 너만 함구하면 살라반은 무사하지 않겠느냐? 물론 너는 죽음으로 함구해야 할 테지만!”
이런 젠장할!
이게 지금 무슨 말이야?
살라반이…… 살라반이 정말 그런 말을 했다고?
“레드 텅 용병단은 단 한 번도 반란을 도모한 적이 없다!”
“이미 살라반은 충분한 증거를 가지고 왔다. 해서 난 역적을 토벌키 위해 살라반에게 말했지. 너희를 트롤의 숲으로 끌어들이라고. 혹시 몰라 네놈이 몰래 사두었던 저택과, 레드 텅 용병단의 본거지에도 기사와 사병들을 보내놓았다.”
“……!”
대체 이 상황을 내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거지?
“말도 안 돼. 이건 모함이야!”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다! 제르만! 저놈의 목을 가져와라!”
제르만이 말에서 내려 내게 달려들었다.
그는 제법 이름 있는 기사였다.
실력도 뛰어났다.
적어도 나와 대등하거나 조금 우위였다.
조금 전까지는.
그러나 지금의 난 바뀌었다.
예전의 길버트가 아니다!
카앙!
제르만의 검과 내 바스타드 소드가 부딪치며 불똥이 튀었다.
제르만은 검을 밀어내며 재차 공격을 이어나갔다.
그의 검의 큰 호를 그리며 짓쳐들어 왔다.
하지만 느렸다.
나는 몸을 틀어 그의 검을 흘려보내고 한 손으로 멱을 잡아 끌어당겼다.
퍽!
“큭!”
그러고는 머리로 콧잔등을 들이박았다.
제르만이 비틀거리는 순간 종아리를 걷어찼다.
빡!
“크악!”
제르만이 외마디 비명과 함께 그대로 무너졌다.
내게 얻어맞은 그의 종아리가 부러져 이상한 각도로 휘었다.
나는 다시 일어나려고 버둥거리는 제르만의 가슴을 짓밟았다.
콰직! 드득!
“컥!”
뼈가 부러져 나가는 느낌이 확연히 전해졌다.
그대로 바스타드 소드를 휘둘렀다.
서걱!
“……!”
제르만의 목이 깔끔하게 잘려 나갔다.
잘린 목에서 울컥거리며 피가 흘러나와 바닥을 붉게 물들였다.
난 바스타드 소드를 들어 마테리안 남작을 겨누었다.
“말해라, 마테리안 남작. 이런 짓을 벌이는 이유가 무언지!”
마테리안 남작은 비리게 웃었다.
“내가 알던 길버트가 아닌 것 같군. 제르만을 능가하는 실력자는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쓸데없는 얘기를 들을 여유 따윈 없다. 말해라!”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나 역시도 예전 같지는 않을게다.”
마테리안 남작의 눈이 갑자기 붉게 물들었다.
이어, 그의 주변에서 검은 기운이 너울거리며 흘러나왔다.
뭐지, 저건?
검은 기운은 마테리안 남작의 검에 모여들었다.
은빛 검은 이내 무거운 묵빛으로 변했다.
“후우…… 후우우우…….”
마테리안 남작의 숨이 거칠어졌다.
더불어 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기운도 거칠어졌다.
그리고 숨이 턱턱 막히는 위압감이 날 짓눌렀다.
“으아아아아!”
마테리안 남작이 성난 맹수처럼 포효했다.
그와 동시에 남작의 이마에서 검은 뿔 하나가 불뚝 솟아났다.
‘붉은 눈, 요사스런 검은 기운, 이마의 뿔.’
그 모습은 마치 전설 속에서만 들어왔던 마족의 것과 똑같았다.
“후후후…… 후하하하하하!”
마테리안 백작이 전율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피처럼 붉은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마인(魔人)을 직접 대면하는 기분이 어떠냐.”
“마인?”
“지금 네 눈으로 보고 있지 않느냐. 마족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불쌍한 존재. 인간에게도, 마족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돌연변이. 그 마인을 네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이다.”
느닷없는 상황의 반전은 날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마족에 대해서는 나도 알고 있다.
오래전, 이 대륙엔 마계에서 넘어온 마왕 군단으로 인해 커다란 전쟁이 벌어졌었다.
오십 년 동안 이어졌던 전쟁은 지상계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그 대가는 처참했다.
인류의 수는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고, 인간과 동맹을 맺었던 오크와 엘프, 드워프, 페어리족들도 거의 멸종 직전에 몰리고 말았다.
지상계의 모든 종족은 다시 종족 보존과 발전을 위해 애썼다.
전쟁이 끝난 지 이제 겨우 사십 년이 지났다. 아직 잃어버린 모든 것을 되찾기에는 부족한 시간이다.
아니, 전쟁이 남긴 상흔은 세상 곳곳에 남아 있다.
그중 일부는 아물지 못하고 곪아 터지는 중이다.
그 상흔을 돌보기에도 손이 모자랄 지경인데, 내 앞에 스스로를 마인이라 칭하는 자가 나타났다.
마족이 아니라고 한다.
마족과 인간의 피가 반반씩 섞인 종족이라고 말했다.
한마디로 내가 여태껏 알고 지냈던 바루스 마테리안 남작은 애초부터 인간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갑자기 변해 버린 그의 모습에 혼란스러웠다.
인정하기가 힘들었다.
내가 아는 마테리안 남작은 누구보다 어질고 공명정대하며 평민을 위할 줄 아는 진실된 귀족이었기 때문이다.
하나…… 사실 그게 진실된 모습이 아니었고, 줄곧 연극을 해왔던 것이라면 이해할 수 있다.
차라리 잘됐다.
내겐 이편이 더 낫다.
내가 알던 이가 어느 순간 변해 버렸다는 건 가슴 아픈 일이다.
하지만 그 오랜 시간 동안 날 속여왔던 것이 진실이라면, 그저 분노만이 차오를 뿐이다.
이제 일말의 망설임 없이 마테리안 남작에게 검을 겨눌 수 있게 되었다.
“고귀하고 어진 귀족인 척하느라 힘들었겠군.”
내 말에 마테리안이 피식 웃었다.
“아니. 인간인 척하는 것 자체가 힘들었지. 마테리안 남작가는 헤네토스 신을 열성적으로 섬기는 이들이어서 한 달에 두 번은 신전에 들르곤 했으니까. 혹시라도 신관들이 내 정체를 알게 되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그들은 모르더군.”
순수한 마족이 아니어서 신관들을 속일 수 있었던 모양이다.
아무튼 그가 마인이라는 건 알겠다.
그래서 여태껏 제법 괜찮은 귀족 인간인 척 연기해 왔던 것도 알겠다.
그런데…… 왜 지금 이 시기에 레드 텅 용병단을 죽음으로 내몬 것인가?
정말로 살라반이 우리들을 역적이라 거짓 고발했고, 그 말을 믿어 버린 것인가?
“궁금해 미치겠다는 얼굴이군.”
마테리안이 조롱했다.
난 딱히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랐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명징하다.
마테리안에게 이 사건의 자초지종을 듣고 난 뒤, 그를 죽이는 것.
하지만 듣지 못할 것 같다면 그냥 죽인다.
그게 전부다.
왜 마인이라는 존재가 탄생한 건지 따위는 내 알 바 아니다.
그가 마인이라는 것도 중요치 않다.
다만 살라반이 날…… 레드 텅 용병단을 배신한 이유가 무언지 알고 싶을 뿐이다.
그런데 마테리안이 뜻밖의 얘기를 꺼냈다.
“살라반은 나와 같은 마인이었지.”
“……!”
뒤통수를 크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살라반이…… 마인이었다고?
“마인들은 서로를 알아볼 수 있다. 지금껏 나는 나와 같은 마인을 셋 만났다. 살라반은 그중 한 명이다. 어쩌면 전 대륙에 그보다 많은 마인들이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나에게는 가족과도 다름없던 살라반이…… 마인이었다니.
순간, 그동안 그와 함께 쌓아왔던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펼쳐졌다.
그것은 아주 찰나지간 동안 벌어진 일이었다.
살라반은 나와 숱한 전장에 나가며 생사고락을 함께했다.
누구보다 서로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살라반은 내게 있어 최고의 파트너였다.
살라반 역시 나를 그렇게 생각할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나는 살라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모든 것이 꾸며진 것이었고 거짓 행동이었다.
처음부터 살라반은 내게 가족 같은 정 따위는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다…… 연극이었고, 나 혼자 그것을 진실로 믿어 허우적댔다.
“충격이 큰 모양이군.”
“너희 마인들이…… 얻으려는 게 대체 뭐냐.”
“제물이 필요했지.”
“제물?”
“가장 가까이에, 그리고 쉽게 제물로 바칠 수 있는 인간들이 있기에 이용했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레드 텅 용병단원들을…… 제물로 바치려 했다고?”
“부아가 치밀어 오르나?”
“…….”
마테리안이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