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 히어로 086화
표정이 뾰로통한 게 뭐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나 보다.
그리고 기분 나쁜 일이 있을 때 날 찾아온 건 분풀이를 내게 하겠다는 뜻이다.
이럴 때는 그냥 누나한테 말을 걸지 않는 게 상책이다.
하지만 그런다고 그냥 넘어갈 누나가 아니긴 하다.
“뭐야? 사람이 들어왔는데 그냥 무시하냐? 어? 내가 너한테 고작 그런 존재야? 누나의 존재감을 더 키워줄까?”
그럼 그렇지.
난 데일리 히어로 사이트에 접속하려다 말고 의자에서 내려와 누나 맞은편에 앉았다.
“무슨 일 있어?”
“되게 영혼 없이 물어본다? 너 지금 질문이 엄청 형식적이야. 완전 국어책 읽는 줄?”
“누나가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거야.”
“그래, 이 누나가 지금 예민하긴 하다.”
“그러니까 무슨 일인데?”
“엄마 때문에.”
“엄마가 왜?”
“자꾸 일 그만두고 미대 가라잖아.”
안 그래도 아까 엄마가 이 얘기를 하긴 했었다.
“가면 되잖아.”
“너 말 되게 쉽게 한다?”
“뭐가 문제야?”
누나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뭐가 문제냐고 물어보면 크게 문제될 건 없지. 그런데 사람이 둥지를 옮긴다는 게 말처럼 간단한 게 아니야. 1년 넘게 회사 다니면서 거기 사람들이랑도 많이 친해졌고, 일도 손에 익었고 돈도 매달 차곡차곡 들어와 쌓이는 중이란 말이야. 그런데 당장 그걸 그만두고 갑자기 미대 시험을 보라고 하면 쉽겠냐고.”
누나의 이야기에 공감해주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왜냐면.
“난 회사 안 가봐서 잘 모르겠는데?”
“그렇지. 너 같은 고딩이 뭘 알겠냐.”
“이제 열흘 있으면 성인이거든?”
“아 몰라. 아무튼 짜증나 죽겠어.”
“그냥 엄마 말대로 해. 예전처럼 누나가 돈 꼭 벌어야만 하는 상황도 아니잖아.”
“너도 그 소리냐? 그래, 지금 당장 아빠 가게가 잘되긴 하지. 그런데 그게 평생 잘되라는 보장이 어디 있어? 갑자기 어느 순간 팍 망하면? 그땐 어떡할 건데?”
난 누나에게 한심하다는 시선을 던졌다.
그러자 누나가 검지와 중지로 내 눈을 찌르려 했다.
예전에는 이 공격에 많이도 당했지만, 지금은 당할 내가 아니지.
잽싸게 목을 꺾어 그것을 피했다.
그러자 누나가 눈을 크게 떴다.
“오~ 이젠 누나의 공격을 마구 피하네?”
“언제까지 당하고 있을 줄 알았어? 그리고 우리 가게가 잘되면 기뻐하면서 더 잘되라고 기도해야지! 망할지도 모른다는 게 할 소리야?”
“사람이 최악의 경우도 늘 염두에 둬야 하는 거야.”
“아무튼 난 누나가 대학 갔으면 좋겠어.”
“당장은 아니야. 아빠가 하는 식당 제대로 자리 잡고 나면 그때 한번 생각해 보든가 말든가.”
“지금 정도면 자리 잡았다고 볼 수 있지 않나?”
“그러니까 말했잖아. 모르는 거라고. 그거 잠깐 빤짝 뜨는 걸 수도 있어. 벌릴 때 모아둬야 한다고. 괜히 지금 벌린다고 내 등록금 대주고 했다가 나중에 파리 날리면 답 안 나와.”
“그럼 누나, 엄마 아빠 말고 다른 사람이 누나 학자금을 전부 대준다고 하면 미대 진학, 할 거야?”
그 말에 누나가 혹하는 얼굴로 물었다.
“그런 사람이 있대?”
“응, 있대.”
누나의 눈이 반짝반짝거렸다.
“어디의 사는 누구래?”
“우리 집 사는 나야.”
짝!
억! 난데없이 싸대기!
너무 갑작스러운데다가 예고 없이 날아와서 미처 피하지도 못했다.
“왜 때려!”
“이게 가뜩이나 심란해 죽겠는데, 누나를 놀려?”
“놀린 거 아닌데.”
“놀린 게 아니면? 정말 네가 학자금 다 대주겠다고? 무슨 돈으로?”
난 서랍에서 통장을 꺼내 누나에게 보여줬다.
누나는 통장을 펼쳐 보더니 코웃음을 쳤다.
“야, 난 또 얼마나 모았다고 겨우 천사백만 원 정도밖…… 에?”
“그래 천사백 조금 넘어. 내가 모은 돈이야.”
통장을 들고 있는 누나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너…… 너 이 돈 어디에서 났어?”
“귀 막혔어? 방금 내가 모았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뭘 해서 모았냐고!”
“사업해서.”
“사업?”
“응, 개인 사업. 아직 사업자 등록증 같은 건 없지만.”
“무슨 개인 사업? 어떤 종목? 뭐하는 건데?”
“그건 아직 비밀이야.”
사실 다운 타운에서 세 번 싸운 다음 파이트 머니로 받은 돈이다.
하나 그걸 곧이곧대로 말할 수 없었기에 뻥을 치기로 했다.
지금 이렇게 썰만 풀어놓고서 나중에 데일리 히어로 사이트가 잘되면 그걸로 돈 벌었다고 하면 되겠지.
사이트가 유명해지면 배너 광고 제의도 많이 들어오니까.
“야…… 나 믿을 수가 없는데?”
“나 혼자 하는 건 아니고, 파트너가 있어.”
“그래? 그 파트너가 제법 유능한 인간인가 보지?”
“상덕이야.”
“뭐어? 그 잉여가?”
“응.”
“더 믿을 수가 없어지는데?”
“아무튼 동생이 사업해서 번 돈이니까 일단 그걸로 학자금 해. 1학년은 충분히 다닐 수 있을 거 아냐?”
“그렇지…… 근데 그럼 2학년은?”
“4학년 졸업하고 대학원 갈 때까지 전액 내가 지원할게. 그만한 능력 있어, 나.”
누나가 멍한 얼굴로 날 바라봤다.
“지금 이거…… 꿈 아니지?”
“아니지.”
“그럼 너 한 대 때려봐도 돼?”
“누나 볼을 꼬집어. 왜 나를 때린대?”
“내 볼은 아프잖아.”
“하여튼.”
“지웅아. 너 정말 사업해서 번 돈 맞는 거지? 이상한 일 해서 번 돈 아니지?”
누나가 재차 돈의 출처를 확인했다.
그 말인 즉, 깨끗한 돈이라면 감사히 꿀꺽하고 미대 진학할 용의가 있다는 것이다.
난 그 누구보다 청렴결백한 표정을 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믿으라니까.”
“알았어…… 일단은 믿어볼게. 의심스러운 구석이 엄청 많긴 하지만.”
“때가 되면 내가 무슨 일을 하는 건지 알려줄 테니까 걱정 마.”
“되도록 빨리 알려줘야 한다? 안 그러면 궁금해서 미쳐 버릴지도 몰라.”
“알았어. 그럼 누나 미대 가는 거다?”
누나가 내 통장을 꼭 쥔 채로 고민하다가 말했다.
“이제 내년까지 얼마 안 남았잖아?”
“응.”
“1월 1일까지만 생각해 보자. 그때도 누나 맘이 변하지 않으면 1년 동안 미대 입학 준비 해볼게.”
“오케이, 좋아!”
이것으로 누나와의 협상은 극적 타결.
바깥 의뢰를 마치고 돌아와 엄마의 집안 의뢰까지 들어주고 나니 하루가 완전히 끝나 버렸다.
누나가 방에서 나가고 난 뒤,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아, 인터넷으로 이런저런 기사들을 찾아 읽었다.
그런데 눈에 띄는 기사 제목이 있었다.
‘경기도 연쇄살인마, 구리시의 오래된 저택 지하실에서 사지가 부러진 채 발견.’
난 기사 제목을 클릭해서 내용을 읽어보았다.
기사를 간단하게 축약해 보자면 ‘익명의 제보자에게 전화를 받고 경찰이 출동해 연쇄살인마를 검거했다. 그런데 이미 연쇄살인마는 사지가 부러진 이후였고, 몸도 마비된 상태였다. 누가 연쇄살인마를 이렇게 만들었으며, 익명의 신고자는 누구일까. 혹시 익명의 신고자가 연쇄살인마를 그 지경으로 만든 사람은 아닐까?’ 정도였다.
“그 익명의 제보자와 연쇄살인마의 사지를 부러뜨린 게 나 맞아요, 기자님들.”
아무튼 연쇄살인마는 경찰의 손에 넘어갔으니 이제 녀석의 처우는 법이 결정할 것이다.
그 동네에선 이제 고양이들이 사라질 걱정도 없겠지.
길버트의 난
이부자리에 누워 잘 준비를 모두 마치고서 드디어 오늘 하루 동안 모인 링크를 확인해보기로 했다.
“마인드 탭.”
이름 : 유지웅
소속 : 지구, 대한민국
성별 : 남
나이 : 19
영력 : 17/17
영매 : 18
아티팩트 소켓 3/4
보유 링크 : 3,422
3,422링크!
아주 아름다운 수치다.
“바로 아티팩트를 사줘야겠지. 소울 커넥트.”
* * *
“무한의 가방 사러 왔죠?”
라헬이 날 보자마자 본론부터 꺼냈다.
“응.”
“가져가세요, 그럼.”
딱!
라헬이 손가락을 튕겼다.
아무것도 없던 검은 공간에 환한 빛이 일었다.
부피를 불리던 빛은 어느 순간 명멸했고, 빛이 사라진 자리엔 등에 멜 수 있도록 만들어진 가방 하나가 나타났다.
다행히도 디자인은 크게 튀지 않았다.
그냥 지구에서 메고 다녀도 무난할 법했다.
가방을 들어 등에 메어 보았다.
착용감이 제법 괜찮았다.
“이천사백 링크 감사히 받을게요.”
“잠깐.”
“네? 왜 그러시는지?”
“어디서 슬쩍 백 링크를 올려 받으려고 해? 무한의 가방 이천삼백 링크 아니었어?”
라헬이 한숨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말 수전노가 따로 없네요.”
뭐야?
“너한테 그런 소리 듣고 싶지 않거든?”
“이.천.삼.백.링.크! 잘 가져갈게요.”
라헬이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하고서는 고개를 까딱 숙였다.
“가세요.”
……이제는 그냥 가란다.
“간다, 가.”
어둠이 사라지고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내 손엔 소울 스토어에서 산 무한의 가방이 들려 있었다.
난 그것을 머리맡에 두고 눈을 감았다.
상쾌한 내일을 위해서 오늘도 숙면을!
* * *
“아버지, 이제 분점 내시죠.”
유난히 새벽 일찍 일어나 버렸다.
그래서 일을 마치고 새벽에 귀가하시는 아버지를 붙잡고 앞으로의 가계 전망에 대해 얘기했다.
아버지는 그런 날 멀뚱히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놈이 미쳤나.”
“안 미쳤습니다.”
“분점은 무슨 분점? 잘나간다고 까불다가 코 깨지는 법이다, 이놈아.”
“아버지, 가뜩이나 손님을 떼로 몰려들어서 늘 만원사례에다 줄 서서 기다리기까지 하는데 분점을 내는 게 현명하죠. 우리 가게 옆에 1층 건물 세 나왔잖아요. 그것도 원래 식당 하던 건물이었으니까 매입하세요.”
“그러다 잘못되면 누구 탓을 하냐.”
“수익이 두 배 이상 뛸걸요. 밖에서 기다리는 그 손님들이 안 기다리고 계속 테이블 회전시켜준다고 생각해 보세요.”
“흐음…….”
아버지가 턱을 어루만지며 고민에 빠졌다.
“내자니까요, 분점. 혹시 돈 때문에 그러세요?”
“돈 때문은 무슨. 가게 대박 나는 바람에 빚도 다 청산하고 모은 돈이 얼만데.”
“그럼 뭐가 걱정이세요.”
“인생사 생각한 대로 되는 법이 어디 있냐. 물론 네 말도 맞고, 장사가 잘될 거라는 확신도 어느 정도 든다. 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이 발을 잡는구나.”
“아버지, 인생 혹시나 하다가 끝내실 거예요?”
“뭐 이놈아?”
딱!
아버지가 내 정수리를 때렸다.
하지만 하나도 안 아팠다.
오히려 정수리를 때린 아버지가 손을 잡고 인상을 찌푸렸다.
“이놈이 이거 완전히 쇠대가리네, 쇠대가리.”
온몸이 강철이니 그럴 수밖에요.
아무튼!
“분점을 내는 게 옳다고 봅니다, 아버지.”
“정말 그렇게 생각하냐?”
“네.”
“확실해?”
“그럼요.”
“망하면?”
“안 망합니다.”
“어떻게 알아?”
“아버지!”
난 벌떡 일어서서 주먹을 꽉 쥐었다.
아버지가 그런 날 보고 심드렁하게 물었다.
“한판 해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