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 히어로 076화
복학생의 고백
두 번째 의뢰인을 만나기 위해 홍대 놀이터로 향했다.
의뢰인은 먼저 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붉은색 패딩을 입은 그는 순진해 보이는 외모와 소박한 미소가 인상적이었다.
자신을 성창 대학교 복학생이라고 소개하고서는 같은 과 후배에게 반년째 사랑의 열병을 앓는 중이라 말했다.
우리는 복학생과 함께 자리를 옮겼다.
셋 다 식전이라 밥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제법 맛있다고 소문난 일식 카레집에서 허기를 채우며 복학생은 세세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아이는 정말 예뻐요. 같은 과에만 그 아이를 좋아하는 남학생이 셋은 돼요. 성격도 좋아서 그 아이를 싫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죠. 그래서 더 고백하는 게 부담이 돼요. 나보다 잘난 애들도 그 아이한테 고백했다가 퇴짜 맞았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그런데 나 같은 게 눈에나 차겠어요?”
“여자분이 눈이 높으신가 보네요.”
상덕이가 돈가스 카레 덮밥을 열심히 퍼먹으며 물었다.
“모르겠어요. 들리는 말로는 아직 연애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고, 누군가를 사귈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면서 고백을 거절했다고 하는데…… 그게 사실인지 그냥 거절하기 미안해서 하는 말인지…….”
만약 후자의 경우라면 여자가 고단수다.
가장 무리 없이 상대를 쳐내면서, 앞으로의 관계도 서먹해지지 않게 끌어갈 수 있으니까.
혹시 어장관리하는 거 아니야?
“그분이 뭐…… 자기 좋다고 하는 남자들한테 밥을 자주 사달라고 한다거나 그러진 않아요? 생일 때는 선물을 요구하거나…… 제가 무슨 얘기 하는 건지 아시죠?”
내가 물었다.
복학생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진 않아요. 누가 뭘 사준다고 해도 거절하는 애예요. 아니면 더치페이해서 먹자고 하거나. 일방적으로 얻어먹는 건 무척 부담스러워 하는 애예요. 생일날도 파티 같은 거 안 하고 조용히 넘어갔어요.”
“그래요?”
“네.”
이거 어쩌면 정말로 순수한 여자일 수도 있겠다.
연애라는 게 한 번 하고 나면 그 맛을 알아서 계속 하고 싶어지지만, 한 번도 해보지 않았을 때에는 갈망이 그다지 크지 않다는 얘기를 드라마에서 들은 적이 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복학생이 좋아하는 여자는 어쩌면 그런 경우이지 않을까?
“저, 이거…….”
복학생이 밀봉된 편지 봉투 하나와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제가 전해주려고 했던 편지랑 선물이에요. 되도록 크리스마스가 되기 전에 고백했으면 좋겠어요.”
그러자 상덕이가 끼어들었다.
“아~ 잘되면 크리스마스 날 데이트하려고 그러는구나! 그쵸? 맞죠?”
“그…… 저…… 네, 네.”
복학생이 쑥스러워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모습을 본 상덕이가 바보처럼 헤죽 웃었다.
“으흐흐~ 크리스마스 날 임신하는 커플이 제일 많다던데~!”
“뭐, 뭐라구요?”
이 자식이 근데, 뭐라는 거야?
난 상덕이의 정수리를 쥐어박았다.
퍽!
“으악! 혀 깨물었잖아! 왜 때려!”
“조용히 하고 있어라, 좀.”
“씨잉.”
상덕이는 울상을 짓더니.
“여기 돈가스 카레 덮밥 하나 더요!”
주문을 추가했다.
하여튼 연구 대상이다.
* * *
식당에서 나온 우리는 다시 홍대 놀이터로 향했다.
복학생에게 건네받은 편지 봉투와 선물 상자는 상덕이가 가져온 카메라 가방에 잘 넣어두었다.
“아무튼 크리스마스 전에만 전달하면 되는 거죠?”
“네.”
“그분의 성함의 이하연. 저기 보이는 편의점에서 오후 시간에 알바하고 있구요?”
복학생은 내가 가리킨 편의점을 보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럼 지금 일하고 있겠네요?”
“아, 평일 알바라 주말에는 안 해요.”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의뢰 완수한 다음에 연락드릴게요.”
“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복학생과 헤어지고 난 뒤, 우리는 춘천으로 돌아가기 위해 지하철역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하철을 갈아타가며 용산역에 도착했다.
거기서 춘천행 ITX청춘열차 표를 예매한 뒤, 시간에 맞춰 플랫폼으로 향했다.
ITX청춘열차는 4, 5호 칸이 2층이다.
상덕이가 2층 좌석에 꼭 앉아보고 싶다고 성화를 부리는 바람에, 나는 2층 쪽 좌석으로 두 장을 예매해 둔 터였다.
우리는 지정된 좌석에 앉았다.
창가 쪽에 앉은 상덕이가 마치 비행기를 처음 타는 아이마냥 즐거워했다.
“우와~ 진짜 기분 좋다.”
“그리 좋냐? 그래봤자 기차야.”
“넌 왜 이렇게 낭만이 없냐? 사람 기분이라는 게 있잖아. 나 지금 휴일에도 회사 일 때문에 출장 나갔다가 돌아오는 유능한 사원의 기분을 만끽 중이시다.”
“그건 기분 문제가 아닌데?”
“응?”
상덕이가 날 돌아봤다.
“너 유능해.”
“……왜 이래? 뭐 잘못 먹었냐? 네 입에서 지금 내 칭찬이 나온 거야?”
“누가 들으면 내가 허구한 날 욕만 하는 줄 알겠다.”
“그건 아니지만 칭찬도 자주 안 했지.”
“아무튼 너 유능한 건 맞아. 너랑 같이 동업하길 잘했다고 늘 생각하고 있어.”
“진심이야?”
“응. 너 없었으면 데일리 히어로가 이렇게까지 잘되진 않았을 걸? 지금 이 성공의 반은 네 덕분이야.”
내 말에 상덕이가 눈물을 글썽였다.
“친구야아아.”
녀석이 나를 덥석 끌어안았다.
난 기겁하며 상덕이를 떼어냈다.
“떨어져, 인마!”
“흐어어어엉. 날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있었다니. 감동이야~!”
“알았으니까, 그만해.”
“흐어어어엉.”
……통로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끗힐끗 쳐다본다.
두 번 다신 이 녀석한테 칭찬하는 일은 없을 거다.
* * *
춘천에 도착해서 역 근처 우동집에 들렀다.
상덕이와 나는 우동 한 그릇씩을 먹으면서 대화를 나눴다.
“내일 학교 끝나면 바로 서울 갈 거야?”
“아니.”
“왜? 빨리 전해줘야 하잖아.”
오늘은 12월 21일이다.
크리스마스까지는 이제 4일밖에 남지 않았으니, 3일 이내에 이하연에게 복학생의 편지와 선물을 건네줘야 한다.
하지만 몇 번을 생각해 봐도 단순히 편지와 선물을 건네주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
“어지간하면 그 복학생의 고백을 여자가 받아줬으면 좋겠어.”
“아서라. 잘나간다는 남학생들도 다 차였다는데, 모태 솔로에다가 직접 고백할 용기도 없는 숙맥을 받아주겠냐?”
“그건 모르는 거지.”
“쓸데없는데 정력 낭비 말고, 할 일만 하자. 우리가 사랑 전도사는 아니잖아?”
“흠.”
상덕이의 말도 틀린 건 아니었다.
단순히 내 욕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 이 의뢰를 해결하면서 고백까지 받아들이도록 만든다면, 그리고 그 영상을 업로드한다면 대박이 터질 거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자의 심리에 대해서 잘 알면서 연애 박사인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다.
문제는 내 주변에 그런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아랑이는 나처럼 연애 초보자다.
이랑이는 여자들한테 인기는 있지만 정작 그 녀석 본인이 연애에 무관심하다.
상덕이는 말할 필요도 없다.
유주 누나 역시 모태 솔로다.
점장님은 뭐…… 아예 논외다.
그나마 우리 누나가 그런 면에서는 정말 빠삭하다.
그런데 누나한텐 이런 얘기 해봤자 내가 원하는 대답을 내놓긴커녕 이상한 의심이나 하면서 날 놀려댈 게 뻔하다.
포기.
“역시 안 되는 건가?”
점점 힘이 빠져서 그냥 관둘까 싶은 생각이 들던 그때였다.
“안녕하세요, 사장 오빠~! 저 왔어요!”
문이 벌컥 열리며 찬바람과 함께 생기발랄한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카운터를 보고 있던 젊은 사장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인비~ 왔니?”
“네~!”
인비?
설마 박인비?
나와 상덕이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우동집 입구에는 정말로 인비가 서 있었다.
계절에 굴하지 않는 짧은 미니스커트 정장 차림에 검은 스타킹을 착용한 차림으로 말이다.
“으~ 추워.”
인비는 미처 우리를 발견하지 못하고서 조금 떨어진 테이블에 앉았다.
사장이 그런 인비에게 다가가 물었다.
“오늘은 새로운 남자 친구 안 데려왔어?”
“새로운 남자 친구? 누구요?”
“그새 헤어졌구만.”
“오늘은 사장님이 내 남자 친군데?”
“놀리지 마라~ 늘 먹던 거?”
“네!”
인비에게 주문을 받던 사장의 시선이 우리와 마주쳤다.
사장은 손가락으로 우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런데 혹시 인비야. 저분들도 너랑 연애했던 분들이니?”
“네? 누구요?”
“저쪽 테이블. 아까부터 계속 쳐다보고 있는 것 같은데…….”
인비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우리와 시선이 마주쳤다.
“어!”
인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가 활짝 미소 지으며 내게 달려왔다.
“지웅아~!”
인비는 다짜고짜 나를 와락 껴안았다.
“윽! 왜, 왜 이래.”
“우리 진짜 운명인가 봐! 이런 식으로 또 마주치다니!”
“운명이라는 거 아무 데나 막 갖다 붙이지 말랬지?”
“이 정도면 운명이지! 넌 내가 사귀었던 가장 재수 없던 놈한테 해코지 당할 뻔한 걸 구해줬잖아? 그 다음엔 네가 우리 엄마 금은방에 들렀었지? 어떻게! 대한민국의 그 많은 금은방 중에서! 우리 엄마가 금은방 한다는 것도 몰랐는데! 거기에서 나와 마주칠 수가 있겠어? 그리고 바로 여기!”
인비가 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여기 내 단골집이거든? 넌 자주 왔었어?”
“아니, 나 처음인데.”
“거 봐! 난 하루에 한 번씩은 꼭 오는 곳이란 말야! 그런데 넌 오늘 여기 처음 와서 나랑 만났어! 이건 운명 아니야? 지웅이도 그렇게 생각하지?”
“……네가 하루에 한 번씩 오는 곳이니까 만날 가능성이 높았던 게 아닐까?”
“시끄러워!”
시끄럽다고 할 거면 내 의견은 왜 물어본 거야!
인비가 내게 팔짱을 꼈다.
“누군가 그랬어. 우연이 세 번이면 운명이라고. 역시 우린 운명인 거야.”
얘가 왜 이렇게 오버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인비는 얼마 전부터 연락이 딱 끊겼다.
그동안은 하루걸러 한 번씩 전화나 문자를 했었다.
그런데 한 달 전 무렵이었나?
갑자기 연락이 끊기고 말았다.
인비가 워낙 나한테 이성적 관심이 있다는 걸 어필했었기에, 난 잘됐다 싶었다.
이제는 포기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의 이 반응은 무엇일까?
“뭔가 지금 상황이 좀 이상하지 않아?”
“어떻게 이상한데?”
“아니…… 계속 연락 없다가 갑자기 이러는 건…….”
그 말에 인비가 씩 웃었다.
“역시 내 작전이 먹혀들었던 거였네?”
“작전이라니?”
“이른바 밀당이라는 거지. 매일같이 연락하던 사람이 갑자기 연락을 뚝 끊으면? 궁금해지겠지. 왜 연락을 안 하는지? 하루에도 몇 번씩 스마트 폰을 확인하게 되고.”
이 여자가 지금 엄청난 착각을 하고 있다.
난 단 한 번도 인비의 연락을 기다린 적이 없었다.
단 한 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