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 히어로 067화
그 말인 즉.
“레이브란데의 인과율이 끝나는 순간 넌 네가 원했던 목적을 이루게 되는 거구나.”
“……맞아.”
대답을 하는 카시아스의 음성이 무거웠다.
대체 녀석이 원하는 게 무엇일까.
그리고 카시아스는 어떤 사람일까.
‘그러고 보니 여태껏 카시아스 개인에 대한 질문을 해본 적이 없었잖아.’
어쩐지 내가 카시아스한테 너무 무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시아스, 넌 데브게니안 대륙에서 어떤 사람이었어?”
“마법사였다.”
“아니, 그런 거 말고.”
“무얼 알고 싶은 건지 확실히 말해라.”
“흠…… 가족이 어떻게 돼?”
“없다. 나 혼자야.”
“어? ……어, 미안.”
“묻고 싶은 건 그게 단가?”
어라. 이 녀석, 뉘앙스가 내 물음에 되도록 대답해 주려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풀풀 풍긴다.
이때를 놓치면 안 되지!
“몇 살이었어?”
“일흔.”
“엑! 완전 할아버지였네.”
“나이는 내게 별로 상관없었다. 마법의 극의(極意)에 오르는 순간 육신은 젊음을 되찾아 20대 초반으로 되돌아갔으니까.”
“우와, 그거 대단하네.”
극의라.
깨달음의 끝에 다다른다는 뜻인데, 그렇다면 카시아스는 마법의 끝을 봤다는 거다.
나도 링크를 열심히 벌어 마법의 힘을 업그레이드시키다 보면 극의에 다다를 수 있을까?
“거기서 카시아스의 삶은 어땠어?”
그 질문에 카시아스는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그러다가 한숨처럼 한마디를 내뱉었다.
“아팠다.”
“아팠다고? 왜?”
“보고 싶은 사람을 다시 볼 수 없었기 때문이지.”
“연인? 가족?”
“거기까지 대답할 의무는 없어.”
“의외로 낭만파네. 전혀 안 어울려.”
“그런가…….”
내 놀림에 어쩐 일로 카시아스가 순순히 수긍했다.
그 이후로 우리는 오가는 말이 없이 걸었다.
그러다 집에 거의 다다랐을 때, 어깨에서 훌쩍 뛰어내린 카시아스가 돌연 이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너한테 한 가지 확실해 해놓고 싶은 게 있어.”
“응? 뭔데?”
카시아스는 골목길을 우아하게 걸어 가로등 아래에 섰다.
그리고 몸을 돌려 날 바라보았다.
“넌 아주 큰 오해를 하고 있다.”
“오해라니?”
“사람을 겉모습과 말투로만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보여주마. 두 눈 똑똑히 뜨고 봐라.”
순간 카시아스의 몸에서 환한 빛이 일었다.
그 빛은 갑자기 위로 솟구쳐 올라 사람의 형태를 갖추었다.
어느덧 검은 고양이 카시아스는 사라지고, 내 앞엔…….
“……맙소사.”
말문이 턱 막히게 만드는 사람이 서 있었다.
첫 번째 의뢰
내가 지금 헛것을 보고 있는 건 아니지?
눈을 마구 비볐다. 하지만 시야에 비치는 광경은 전혀 변한 것이 없었다.
카시아스는 내가 큰 오해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 오해를 풀기 위해 확실히 해두고 싶은 것이 있다고도 말했다.
그러더니 환한 빛에 휩싸여 사람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런데 카시아스가 변한 모습이 나로서는 믿기지 않았다.
“카시…… 아스?”
내 물음에 카시아스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했다.
그…… 아니, ‘그녀’는 카시아스였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키에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가 인상적인 그녀는 계절과 어울리지 않는 흰 탱크톱에 청핫팬츠, 허벅지까지 오는 검은 스타킹을 착용하고 있었다.
그런 복장인지라 들어갈 곳은 들어가고 나올 곳은 확실히 나온 그녀의 육감적인 몸매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검은 머리카락과는 대조되게 피부는 백설처럼 하얗다.
작은 얼굴에 붙어 있는 이목구비는 또렷했고, 예뻤다.
차가운 표정이 흠이라면 흠이지만 그래서 더 고혹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카시아스가 내 코앞으로 다가왔다.
“놀랐나?”
윽…… 외형은 완전히 바뀌었는데 말투는 그대로였다.
“놀랐지, 그럼 안 놀랄까?”
“역시 남자로 생각하고 있었군.”
“내 잘못이 아니야, 그건! 대체 정체를 알 수 없는 고양이가 다가와서, ‘그랬는가?’, ‘했는가?’,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하란 말이다!’ 따위의 말투를 사용하면 당연히 남자라고 생각하게 되는 거 아니냐고!”
사실 남자도 아니고 그저 수컷이라 생각했지만.
카시아스는 내게 마법을 익힌 다른 차원의 신기한 고양이 정도였다.
그런데 이제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 버렸다.
“이런 모습으로 마주하는 건 처음이니, 정식으로 소개하지. 다일리아 카시아스. ……여자다.”
……내가 남자라고 생각했던 게 엄청 자존심 상했던 모양이다.
난 당연히 ‘다일리아 카시아스. 대마법사다’라고 소개할 줄 알았는데.
“나도 정식으로 소개할게. 유지웅. ……남자다.”
퍽!
“악!”
때렸다!
저게 내 정수리를 때렸어!
“적당히 기어올라라.”
“성격 지랄 맞은 거 보니 카시아스가 맞긴 맞네. 그럼…… 카시아스가 성이고, 다일리아가 이름인 거야? 아니면 그 반대인가?”
“다일리아가 이름이다.”
“하아, 그래?”
입을 다물고 있으면 썩 어울리는 이름이다.
그런데 입만 열면 완전히 깬다.
얼굴은 예쁜데 말투는 사내자식 저리 가라니…… 그래, 마치 미녀파이터 송가연 같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불러야 돼? 다일리아?”
“카시아스라고 불러.”
이상하네.
카시아스는 이렇게 좋은 얼굴에 끝내주는 몸을 가졌으면서 왜 여성성을 강조하지 않는 거지?
‘아니야. 입고 있는 옷을 보면 엄청 강조한 것 같은데…….’
카시아스가 내 의중을 읽은 듯 눈을 사납게 떴다.
“선호하는 패션대로 갖춰 입다 보니 이런 차림이 됐을 뿐. 몸매를 강조하려고 이런 패션을 택한 건 아니다.”
“……그래 알았어.”
여기서 더 까불었다간 분명 얻어 터질 테니 현명하게 발을 빼야겠지.
……근데 가만?
내가 왜 이렇게 카시아스한테 설설 기는 거지?
고양이였을 때나 사람 모습일 때나 카시아스는 카시아스다.
겉모습이 변한 것일 뿐, 그 내면은 여전히 날 짜증나게 갈구고 말도 얄밉게 하는 그 카시아스란 말이다.
그런데…… 변한 겉모습이 좀 세긴 세다.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뭐냐?”
“말투가 왜 그래?”
“내 성장 환경에 의해 이런 말투가 굳어져 버린 것을 내게 따져 묻지 마라.”
뭔가 여자로서 사랑 받지 못한 인생을 산 모양이다.
그러니 말투가 저 모양이겠지.
평생 ‘애교’라는 단어와는 담을 쌓고 살았겠지?
“한 가지 더 궁금한 게 있는데.”
“……뭐냐.”
“평소에 왜 그 모습으로 안 다니는 거야?”
“귀찮으니까. 별의별 똥파리들이 다 달라붙더군. 확실히 지구의 사내놈들 눈은 너무 낮아. 데브게니안 대륙에서 엘프라도 하나 넘어온다면 전 세계가 들썩이겠군.”
엘프에 대해선 나도 익히 알고 있다.
실제로 만나본 적은 없지만, 소라스, 바레지나트, 리조네의 기억과 동화되면서 엘프들에 대한 지식도 절로 습득할 수 있었다.
그들은 한마디로 절세미인, 희대의 미남들로만 구성된 우월한 종족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외모로만 본다면 말이다.
지금 지구에서 한창 이름 높은 미인들조차 엘프에 비하면 그 미모가 빛을 잃을 정도다.
그만큼 엘프의 아름다움은 말로 다 표현 못 할 만큼 대단하다.
“맞아. 엘프들이 가진 미모의 벽은 너무 높아.”
어찌 되었든 카시아스가 말한 요점은 이거다.
그녀의 미모에 혹한 남정네들이 숱하게 따라붙는 것이 귀찮아서 고양이의 모습으로 다닌다는 얘기다.
“그리고 또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많기도 하군.”
카시아스가 한숨을 쉬며 노골적으로 귀찮다는 뜻을 내비쳤다.
“평소에 밥은 어떻게 해결해? 잠은?”
아무리 고양이의 모습으로 산다고 해도 원래는 사람이다.
길거리에서 음식물 쓰레기로 배를 채우고, 아무 데서나 잠을 청하진 않을 것이다.
“마련해 둔 집이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집을 마련했다고? 무슨 돈이 있어서?”
“마법을 조금만 잘 이용하면 그까짓 돈 우습게 벌 수 있지.”
“…….”
하긴.
투명화 마법으로 빈집털이를 해도 돈은 금방 벌리겠지.
“범죄를 저지르진 않았다.”
“그냥 돗자리를 깔지 그래?”
눈치가 빠른 건지, 신기가 있는 건지, 하여튼 남의 생각 알아맞히는 건 달인급이다.
“아무튼 이제 오해가 풀렸나?”
“응…… 오해가 풀린 대신 엄청난 충격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중이긴 하지만. 아니 근데…… 말투는 그렇다 치고 그동안 행동거지는 왜 그랬던 거야?”
“내 행동이 왜?”
“여자 좋아하는 것처럼 행동했잖아? 그…… 유주 누나가 안아줄 때도 가슴에 일부러 스킨십하면서 날 놀리고…….”
“그 여자의 가슴이 좋은 게 아니라 널 놀리는 게 재미있어서 그랬다.”
“…….”
이거 정말 답 없는 인간일세.
카시아스 저 녀석도 가만 보면 정상이 아니다.
뇌 구조가 심히 의심된다.
‘가만…… 그러고 보니.’
유주 누나 때야 그렇다 치고, 다른 때엔 여자를 그렇게 밝힌 적이 없었다.
오히려 여자들에 대해 험담을 늘어놓으면 늘어놓았지.
그게 다 카시아스가 여자여서 그랬던 거구나.
‘여자의 적은 여자라더니.’
하여튼 여자는 무서운 종족이다.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된다는 걸 뼈저리게 느낀다.
“앞으로 쓸데없는 오해는 하지 말도록.”
말을 하는 순간 카시아스의 몸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섬멸하는 빛과 함께 그녀의 모습도 사라졌다.
조금 전까지 쫙 빠진 8등신의 미인이 있던 자리엔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뚱한 얼굴로 날 보고 있었다.
“이제 들어가라.”
“그래…… 들어가야지.”
카시아스는 인사도 없이 갑자기 모습을 감췄다.
아직 충격이 가시지 않은 난 좀 얼떨떨한 상태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알바 끝난 지가 언젠데 이제 들어와? 여자 만나냐?”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독설을 내뱉은 이는 우리 누나였다.
오른손은 허리에 척 걸치고, 왼손은 아이스크림을 든 채 할짝할짝 핥으면서 날 노려보고 있었다.
“누나, 나 피곤해.”
“왜 피곤한데? 없는 시간 짬 내서 데이트 하느라?”
“그만해 쫌.”
“뭘 그만해? 요새 너 많이 수상해?”
“내가? 뭘?”
“몇 달 새 덜떨어진 내 동생이 뭔가 똘망똘망해졌단 말이지.”
그러니까 지금 자기 친동생이 똑똑해져서 이상하다 이거야? 그건 축하해줘야 할 일 아닌가?
“시비 걸 거면 내일 걸어.”
방으로 들어가려는 내 팔을 누나가 확 잡으려 했다.
하지만 난 몸을 옆으로 틀어 누나의 손을 피했다.
그러자 누나가 버럭 소리쳤다.
“이것 봐!”
“뭘?”
“전 같았으면 너 그냥 맥없이 잡혔을걸?”
“사람이 살다 보면 그런 날도 있고 저런 날도 있고 그런 거지.”
“그래, 그런 날도 있고 저런 날도 있긴 하겠지. 그런데 너는 몇 달 전까진 그런 날로 살다가 어느 순간부터 저런 날로 살고 있잖아.”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아, 모르겠다. 내가 학교 다닐 때 국어 공부를 열심히 안 해서 지금 설명을 잘 못하겠는데, 아무튼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