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 히어로 057화
“이 늙은이가 그저 농으로 이런 말을 한 건 아닐세. 반은 진담이었으니 지웅 청년도 우리 아랑이가 싫은 게 아니면 진지하게 한번 생각해 보게.”
“할아버지, 이제 그만 하세요.”
아랑이가 더 참지 못하고서 무천도사를 제지했다.
무천도사는 빙그레 웃더니 다시 내게 말했다.
“아무튼 자네 덕분에 우리 가문의 큰 불화를 막을 수 있었네. 앞서 말했듯이 내게 부탁할 일이 있거나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찾아오시게.”
날 바라보는 무천도사의 눈에는 고마움과 애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꼭 그렇게 할게요.”
그때 머릿속에서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띠링!
―큰일을 치를 뻔한 아랑이네 가족을 도와주었네요! 정말 멋있었어요, 지웅 님~ 앞으로도 계속 멋진 모습 보여주실 거죠? 선행을 쌓아 3링크가 주어집니다.
* * *
아랑이는 나를 위해 콜택시를 불러주었다.
택시가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고 집 앞으로 나갔다.
아랑이가 문 앞까지 나와서 날 배웅해 주었다.
무천도사는 집안에서 이랑이를 한참 혼내는 중이었다.
나한테는 축 쳐져 있을 이랑이를 달래주러 간다 그러더니만.
조용조용 혼내면 내가 듣지 못할 줄 알았나 보다. 파펠의 청력을 무시해서는 안 되지.
난 택시의 뒷문을 열고서 인사를 건넸다.
“담에 봐, 아랑아.”
“잘 가, 지웅아. 그리고…… 오늘 정말 고마웠어. 다음에 내가 음…….”
아랑이가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빨리 타세요.”
택시 기사님의 재촉에 황급히 대답했다.
“마, 맛있는 거 사줄게!”
뭔가 내게 보답하고 싶었는데, 어떤 것이 좋을지 얼른 생각이 안 났던 모양이다.
그 모습이 귀여워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알았어, 고마워. 그럼 다음에 보자.”
난 택시에 몸을 실었다.
떠나는 택시의 차창 너머로 손을 흔드는 아랑이의 모습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 * *
택시를 타고 가던 난 집에서 좀 떨어진 곳에 내렸다.
생각을 정리하며 조금 걷고 싶었다.
하루 동안 너무 많은 일을 겪었다.
다운 타운. 데스 파이트. 갑자기 거머쥔 거액의 돈.
‘두 번 다시는 안 간다.’
인륜이라는 것이 완전히 사라진 그 역겨운 세상에 다시 가야 할 일은 없을 것이다.
[과연 그럴까?]
내 생각을 읽었는지 카시아스가 코웃음 쳤다.
[왜 또?]
[내 생각엔 다시 가게 될 것 같은데.]
[웃기는 얘기. 절대 다시 안 가.]
[두고 보자고.]
하여튼 시도 때도 없이 시비다. 심심하면 잠이나 퍼 잘 것이지.
그나저나 이 돈을 어떻게 하지?
내가 어디서 벌어왔다며 아버지에게 주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고.
그렇다고 이대로 마냥 들고 다니자니 그것도 부담이다.
‘이참에 통장을 하나 새로 만들어?’
생각해 보니 그게 가장 쉽고 간단한 방법이었다.
통장을 만들어서 내가 버는 돈을 모아놓은 뒤에, 급할 때나 필요할 때 쓰면 되는 것 아닌가?
왜 이렇게 간단한 문제를 어렵게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난 스마트 폰을 꺼내 인터넷에다 고등학생이 혼자서도 통장 개설이 가능한지 알아보았다.
은행마다 정책이 달라서, 보호자를 대동해 가야 하는 곳이 있었고, 혼자 가도 신분만 증명이 된다면 개설해 주는 곳이 있었다.
주민등록증은 생일이 지나면서 이미 만들어 놓았다.
그걸 들고 찾아가면 본인 확인 후, 바로 내 명의의 통장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오늘은 일요일.
모든 은행이 문을 닫았으니 천생 통장은 내일 만들어야 했다.
집에 들어오니 갓 지은 밥 냄새가 고소하게 퍼지며 식욕을 자극했다.
엄마는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엄마~ 저 왔어요.”
“아들~ 어서 와. 배고프지? 엄마가 얼른 밥 차려줄 테니까 얼른 씻고 와.”
“알았어.”
엄마는 병이 낫고 나서 늘 싱글벙글이다.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새 삶을 얻었으니 그 기쁨이 오죽하겠는가?
사실 병이 나은 다음 날부터 엄마는 아빠의 식당일을 돕고 싶다 하셨다.
하지만 우리 가족이 모두 그런 엄마를 만류했다.
고생한 만큼 더 많이 쉬고, 즐기고 한 다음에 일을 해도 하라고 말이다.
하지만 천성이 가만있지를 못하는 엄마는 아무 일도 안 하는 대신 집안일을 더 열심히 하기 시작했다.
엄마가 쌩쌩해진 다음 날부터 사흘이 지난 오늘까지 우리 집은 먼지 한 톨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완벽한 청결을 유지했다.
하여튼 우리 엄마의 부지런함도 알아줘야 한다.
화장실에서 씻고 나오니 마침 외출했던 누나도 돌아왔다.
“으으…… 죽겠네.”
등을 두들기며 들어오는 누나를 보며 엄마가 물었다.
“지나야, 어디 안 좋아?”
“그냥 좀 피곤해서.”
난 그런 누나에게 콧방귀를 꼈다.
“놀러 나갔다 왔으면서 피곤은 무슨.”
딱!
누나가 내 뒤통수를 때렸다.
“평일에 회사 일이 얼마나 힘들면 주말에 놀다가 힘들어서 일찍 들어왔겠냐? 엄마, 나도 밥~”
누나는 그렇게 말하고서 거실에 펼쳐진 상 한 자리를 차지하고 턱 앉았다.
아니 근데 저 계집애가 제정신이야?
아무리 가족밖에 없다지만 미니스커트 입고 양반다리를 해?
“아이 진짜, 보는 사람 입장도 생각 좀 해라.”
“뭐, 뭐!”
“내 눈도 보고 싶은 것과 보기 싫은 걸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달라고! 넌 다 큰 여자가 부끄럽지도 않냐?”
내 말에 막 끓은 김치찌개를 상에다 놓던 엄마와 누나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분위기 왜 이래?
“우와~ 내 동생 많이 컸다? 누나한테 대들기도 하고?”
“그러게~ 지웅이가 이제 사춘기를 겪나? 호호호.”
엄마는 대수롭잖게 웃어 넘겼다.
하지만 누나는 그렇지 않았다. 저 눈에 독기 가득 오른 것 좀 봐라. 아무래도 뭔가 사단이 날 것 같은 분위기다.
‘내가 왜 그랬지?’
갑자기 엄청 후회된다.
이게 다 소라스와 바레지나트 때문이다.
착하고 순해 빠졌던 내 성격 돌려내, 이것들아!
“지웅아~!”
누나가 날 다정하게 부르며 싱긋 웃었다.
그런데 무서운 건…… 눈은 안 웃고 있다.
“이따 밥 먹고 보자~”
꿀꺽!
스산한 한기가 내 몸을 감싸는 것 같았다.
아무리 몸이 강해져도 누나는 무섭구나.
* * *
늦은 밤.
전기장판을 깐 이불 안에 들어가 몸을 녹이며 눈을 감았다.
심신이 피곤한데, 이상하게도 잠이 빨리 오지 않았다.
생각이 많아져서 그런 모양이다.
‘짧은 시간 동안 여러 가지 일이 있었지.’
카시아스를 만나 함께했던 두어 달이 내가 지금껏 살아왔던 세월보다 더 값어치 있었다.
늘 죽어 있던 삶을 살고 있던 내게 생기와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레이브란데의 인과율에 계약을 맺은 뒤, 선행을 쌓아 얻게 된 힘으로 난 내가 처한 모든 환경을 바꿨다.
무너져가는 아버지의 식당을 일으켜 세웠고, 엄마의 병을 낫게 해주었으며, 나 역시 빵 셔틀에서 벗어났다.
이후로 우리 가족은 계속해서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닭발 옆차기가 대박이 나서 한 달 수입이 어마어마하게 늘어났다.
그로 인해 덩치를 불려가던 빚을 하나둘 갚아나가는 중이다.
앞으로도 이런 생활이 이어지기만 한다면 누나는 직장을 그만두고 다시 공부를 해서 미대에 지원할 수 있겠지.
나 역시 지금이라도 꿈이라는 걸 찾아 하고 싶은 일을 해볼 수도 있을 테고.
그래, 이걸로 됐다.
더 큰 무엇을 바라지 않아도 우리 가족은 충분히 행복하고 먹고 살 수 있을 만큼 살아간다.
하지만 사람이란 참 이상한 존재다.
힘이라는 것이 생기면 만족의 기준도 올라간다.
그저 가난에서만 벗어나면 좋을 것이라 생각했던 불과 몇 달 전이다.
그런데 지금은 다 무너져 가는 이 낡은 집보다 좋은 집을 얻고 싶다.
아버지의 가게도 체인점을 만들어 더 번창시키고 싶다.
무엇보다 내 자신이 더 많은 능력을 가지고 싶었다.
링크로 사들인 능력의 끝은 대체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 능력들로 난 강해질 테고, 내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 힘을 주어, 누구도 건드릴 수 없게 만들고 싶다.
‘정점에 오르고 싶다!’
그런 욕망이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용솟음쳤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을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건 링크다.
링크를 많이 얻는 방법이라면 이미 알고 있다.
바로 동영상을 이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그것만으로는 좀 막연한 느낌이 든다.
선행을 하는 동영상을 찍어서 그것을 어떤 식으로 사람들이 접근하게 하느냐가 관건이다.
접근 방식에 따라 사람들은 웬 관심종자가 눈꼴 시린 짓을 한다며 욕을 할 수도, 진심으로 잘했다며 박수를 쳐줄 수도 있다.
‘어떤 방법이 좋을까.’
베스트를 생각해 내야 한다.
이제는 내게 주어진 모든 기회를 전부 활용해야 할 때다.
상덕이의 재능
월요일.
고작 이틀 쉬었을 뿐인데, 오래간만에 학교에 오는 기분이었다.
수능이 끝난 터라 선생님들도 고3 학생들도 전부 나사 풀린 듯 느슨해져 있었다.
평소엔 지각하는 학생들을 쥐 잡듯하던 학주도 고3들은 그냥 놔뒀다.
1교시 종이 치고 등교하는 녀석들도 많았다.
이제 고3 생활에 남아 있는 행사라고 해봐야 기말고사밖에 없다.
그러나 기말은 더 이상 내신에 반영되지 않는다.
확실한 수능 결과는 다음 달 초에 나온다지만 어차피 자기가 몇 점인지는 대략적으로 다 알고 있었다.
점수가 잘 나온 녀석들은 기분이 좋아서, 안 나온 녀석들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고3의 학교생활은 놀자 판이 되었다.
선생들은 교실에 들어와서 전부 약속이라도 한 것마냥 아이들과 농담 따먹기를 하기에 바빴다.
수능이고 나발이고 늘 체육 시간에는 밖에 나와야 한다고 강요했던 게슈타포도 이제는 그러지 않았다.
자유 시간을 주고 교실에서 마음껏 쉬게 해주었다.
그런데 태진이가 손을 번쩍 들었다.
“선생님, 축구하고 싶은 애들은 나가서 놀면 안 돼요?”
그러자 게슈타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도록.”
게슈타포의 저 딱딱한 군인 말투도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영원히 못 듣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모든 것이 다 정겨웠다.
태진이가 교실에 있는 남학생들에게 소리쳤다.
“축구하러 나가자!”
수능 보름 전부터 태진이도 많이 변했다.
녀석은 나한테 대판 깨진 것을 계기로 조용히 지내다가 나중에는 반 아이들과 친해지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래도 아직은 세상 때가 묻지 않은 아이들인지라 일 년 내내 못되게 놀던 태진이를 받아주었고, 태진이는 원만한 생활을 해왔다.
한 달 전만 해도, 태진이가 축구하러 나가자고 하면, 겁이 나서 어쩔 수 없이 따라나서던 아이들이 이제는 좋아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하지만 난 축구에 별로 관심이 없어서 그냥 앉아 있었다.
내 옆에 앉은 상덕이는 밤새 뭘 했는지 내내 꿈나라다.
“점심시간에…… 꼭 깨워야 돼…… 음냐음냐.”
잠꼬대도 참 상덕이스럽다.
그런데 오늘부터 쭉 오전 수업이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