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 히어로 056화
“잘 들어. 누굴 추천하는 일도 없고, 다시 이곳에 발을 들이는 일도 없을 거야.”
“인생은 어찌 될지 모르는 거니, 속단하지 말아요.”
“입 그만 놀려. 이제 정말 참기 힘들 지경이니까.”
“지웅 씨는 저한테 함부로 무력을 행사하지 않을 거라는 거, 알아요.”
“속단하지 마. 인생 어찌 될지 모르는 거니까.”
그 말을 마지막으로 의료실에서 나왔다.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다.
화가 진정되지 않아 내 심장은 빠르게 뛰는데, 이랑이의 호흡은 점차 차분해져 갔다.
* * *
콜로세움을 나오자마자 문제가 생겼다.
“집에 어떻게 돌아가지?”
홧김에 급히 나오긴 했는데, 돌아가는 법을 물어보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시 돌아가서 설열음에게 어찌 돌아가는 것이냐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잠시 패닉에 빠질 뻔한 찰나, 카시아스의 음성이 들려왔다.
[봉투 안에 포털이 있다. 아까 돈과 함께 집어넣더군.]
[그래?]
황금 봉투를 열어보았다.
그 안에는 두툼한 수표 뭉치와 작은 쪽지 하나, 그리고 육각 펜던트 모양의 포털이 들어 있었다.
‘웬 쪽지야?’
쪽지를 꺼내 보니, 예쁜 글씨로 한마디가 적혀 있었다.
[제가 특별히 달러 말고 한국 돈으로 준비했어요. 고생하셨어요.]
설열음이 적어 넣은 모양이다.
난 쪽지를 다시 집어넣고 포털을 한 손에 쥐었다.
설열음이 포털을 열기 전에 이렇게 손에 쥐었던 게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어떻게 하는 거지?’
난감해하고 있을 때 머릿속으로 기계적인 음성이 들려왔다.
―포털을 준비합니다. 함께 넘어갈 매개체를 눈으로 스캔하거나 직접 만져주십시오. 5초 동안 아무런 행동이 없을 경우 본인만 넘어가도록 설정합니다.
아, 이런 거군.
그런데 내 몸엔 지금 카시아스와 이랑이가 전부 맞닿아 있으니 굳이 쳐다보거나 만질 필요가 없는 거겠지?
―포털을 이용할 매개체는 본인을 포함 모두 셋입니다. 맞습니까?
“응.”
―펜던트를 앞으로 내밀어 주십시오.
시키는 대로 펜던트를 앞으로 내밀었다.
―마지막으로 가고자 하는 곳의 좌표를 말씀해 주십시오. 좌표를 모른다면 이미지를 최대한 비슷하게 떠올려 주십시오.
시키는 대로 이미지를 떠올렸다.
내가 다운 타운으로 오기 전 마지막으로 들렀던 그 숲속의 이미지를 말이다.
그러자 다시 기계음성이 들려왔다.
―대한민국 강원도 춘천 시에 소재한 구봉산 초입과 98퍼센트의 일치율을 보이며, 몇 시간 전, 이 장소에서 포털을 열었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여기가 맞습니까?
“맞아.”
―포털을 열겠습니다.
기계음성이 끊어지는 순간 공간이 찢어지며 포털이 열렸다.
난 울렁거릴 속을 벌써부터 걱정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통장 개설
포털을 나오자마자 상쾌한 바람이 콧속으로 들어왔다.
“후우우.”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띵했지만, 확 트인 경관을 보니 그래도 살 것 같았다.
카시아스와 이랑이도 나와 함께 무사히 귀환할 수 있었다.
내 뒤에 있던 포털은 금세 닫혔다.
그런데 여기에 있어야 할 것이 보이지 않았다.
설열음이 타고 왔던 바이크는 이곳에 두고 사람만 포털로 이동했었다.
한데 바이크는 어디로 간 걸까?
누가 훔쳐 갔나?
“모르겠다. 워낙 대단한 집단이니 알아서 잘 수거해 갔을 수도 있겠지.”
누가 훔쳐갔든, 다운 타운 측에서 조치를 취해 수거해 갔든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으음…….”
내게 업혀 있던 이랑이가 신음을 흘렸다.
그러더니 화들짝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녀석의 전신에 힘이 팍 들어갔다.
“뭐, 뭐야!”
“이랑아, 괜찮아. 나야, 지웅이 형.”
난 이랑이를 안심시켰다.
“지, 지웅이 형?”
“그래.”
“어떻게 된 거예요? 나…… 다운 타운 가서…….”
이랑이는 뭔가 말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비참했던 광경을 다시 떠올리기가 힘든 모양이다.
“나, 나 좀 내려줘요.”
“너 다쳐서 안 돼.”
“아니…… 괜찮은 것 같아서 그래요.”
“정말?”
“네.”
힐링 포션의 효과가 벌써 나타난 건가?
난 조심스럽게 이랑이를 내려놓았다.
그러자 녀석이 두 발로 멀쩡히 땅을 밟고 섰다.
내가 신기하게 이랑이를 바라보자, 녀석도 놀란 시선을 내게 던졌다.
“와…… 진짜 내 몸이지만 믿기지가 않네.”
“발목 괜찮아?”
“네, 하나도 안 아파요. 뭐지?”
이랑이가 바짓단을 걷어 발목을 살폈다.
그런데 발목에는 아무런 상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 정도로 크게 다쳤으면 상처가 아물었다 하더라도 상흔이 남아야 했다.
하지만 이랑이의 발목은 애초부터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깨끗했다.
비단 발목뿐만이 아니었다.
얼굴을 비롯해서 몸 전체가 멀쩡했다.
부어터지고 상처로 가득한 얼굴이 원래의 그 잘생긴 조각미남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힐링 포션이라는 거 효과가 장난이 아니구나.’
이랑이도 자기 몸 구석구석을 살펴보고, 주무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저…… 어떻게 된 거예요?”
이랑이에게 다른 차원에서 가져온 힐링 포션을 먹였다고 말할 순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거짓말을 했다.
“거기 의료 기술이 좋은가 보지, 뭐.”
잘 모르겠다는 듯 두루뭉술하게 말하니, 이랑이가 대충 수긍하는 것 같았다.
“그런가요? 하긴, 막 공간 이동 하는 그런 기계도 만들고 그러니까. ……네? 거기라구요? 그 말은…… 형도 다운 타운에 왔었다는 거예요?”
“응.”
“왜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 이랑이의 정수리를 한 대 때렸다.
빡!
“악! 왜, 왜 그래요, 형?”
“너 잡으러 따라갔다, 인마!”
“저…… 잡으러 왔다구요?”
“그래.”
그러자 이랑이는 뭔가 짐작가는 게 있는 듯 주먹으로 자기 손바닥을 탁 쳤다.
“아! 혹시 할아버지가 가라 그랬어요?”
“맞아. 무천도사님이 날 데스 파이트에 추천했어.”
“그랬구나…… 그럼…… 제 시합도 봤겠네요?”
“봤지.”
“엄청 꼴사납게 당했는데…… 부끄럽네요.”
“지금 그게 부끄러울 일이냐? 할아버지 말 안 듣고 제멋대로 데스 파이트 나간 걸 부끄러워해야지.”
“……맞아요.”
이랑이가 고개를 푹 숙이더니 눈을 꾹 감았다.
녀석의 감긴 눈꺼풀이 파르르 떨려왔다.
자세히 보니 전신이 다 떨리고 있었다.
“저…… 노예가 될 뻔했어요.”
그때의 공포가 다시금 밀려오는 모양이다.
누군가의 노예로 평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
그건 정말 괴로운 일일 것이다.
자신의 인생이 전부 사라지는 것이니 말이다.
그래서 데스 파이트는 인생을 거는 게임이다.
시합에서 지면, 죽거나 노예가 된다.
한참 동안 침묵 속에서 발발 떨던 이랑이가 문득 고개를 들더니 놀라서 소리쳤다.
“그, 그럼 형이 절 구해준 거예요?”
“응.”
이랑이는 손가락 세 개를 펼쳐 보였다.
“세 번…… 이겼어요?”
“그래.”
“우와, 형 진짜 장난 아니네요. 역시 내가 사람 하나는 잘 본 것 같아요. 근데 세이브 카드 선택 안 했으면 오만 달러 받는 거였잖아요? 그 큰돈을 포기하고 절 구해주신 거예요? 하, 감동이 진짜…….”
에라이 한 대 더 맞아라.
빡!
“아야!”
이랑이가 정수리를 감싸고 눈물을 찔끔 흘렸다.
“지금 감탄할 때냐? 너 완전히 인생 말아먹을 뻔했어!”
“……알아요. 죄송해요.”
“그런 말은 돌아가서 무천도사님이랑 아랑이한테 해.”
“네.”
“그리고!”
마지막으로 크게 호통을 치려하는데 이랑이가 내 말을 끊었다.
“알아요. 두 번 다시 다운 타운에 가지 않을게요.”
“약속하는 거다?”
“믿으세요. 사나이가 한 번 약속했으면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지켜야 하는 법!”
이랑이가 주먹을 불끈 쥐고 고개를 끄덕였다.
에효, 저놈의 철딱서니.
* * *
이랑이는 불같이 노한 무천도사 앞에서 두 손을 앞으로 공손히 모으고 고개를 최대한 수그린 채 가만히 서 있었다.
넓은 도장 안이 무천도사의 노기로 가득 찬 것만 같았다.
아랑이도 눈꼬리를 치켜 올리고 이랑이를 노려봤다.
두 사람 다 이랑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네 이놈!”
한참 동안 이랑이를 보고 있던 무천도사가 일갈을 내질렀다.
이랑이가 찔끔해서는 더 고개를 조아렸다.
“미안해, 할아버지.”
“아무리 철이 없기로서니 데스 파이트에 출전을 해?! 자칫 잘못하면 네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길 수 있다고 늘 말했잖느냐!”
“……할 말이 없어.”
“이랑아, 너 정말 이번엔 너무했어. 할아버지랑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아랑이도 한마디를 했다.
“미안해, 누나.”
“더 말할 것 없다! 앞으로 한 달간 지옥 훈련이다! 알겠느냐!”
“하, 한 달이나?”
“뭣이?!”
“아, 알았어, 할아버지! 군말 없이 지옥훈련 할게.”
“네 방에 가 있거라!”
이랑이는 한숨을 푹 쉬고서 도장을 나갔다.
그러자 아랑이가 다가와 내 손을 덥석 잡고 눈물이 그렁그렁해져서 말했다.
“고마워, 지웅아. 너 아니었으면 정말 어찌 됐을지…….”
무천도사도 아랑이의 옆에 서서 그윽한 시선을 내게 던졌다.
“지웅 청년. 내 이 빚을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네.”
“다 잘됐으니까 그걸로 된 거죠.”
“그렇지 않아. 자칫 잘못했으면 지웅 청년의 인생도 어찌 될지 몰랐을 텐데……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이랑이를 데려와 줘서 정말 고맙네.”
아랑이도 그 말에 동의했다.
“맞아. 그리고 그 큰돈을 포기하고서 세이브 카드를 선택하는 것도 쉬운 게 아니었을 텐데.”
“참으로 보기 드문 청년인 게지. 뿐만 아니라 강한 힘도 갖고 있질 않은가. 데스 파이트에서 세 시합을 연속으로 이긴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닐 텐데.”
사실 그렇게 어렵진 않았다.
소라스와 바레지나트의 퀘스트를 하며 상대했던 인간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정말 괜찮아요.”
내가 한사코 괜찮다는데도, 무천도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야. 자네는 이미 우리 가문의 은인일세. 아무런 보답 없이 넘어간다는 건 못할 짓이지. 자네가 원하는 게 있다면 뭐든 말해보게. 내 능력 안에서 가능한 건 무엇이든 주겠네! 돈을 원한다면 돈을 주고, 아랑이를 달라 하면 주겠네!”
말을 하며 무천도사가 아랑이의 등을 찰싹 때렸다.
그에 아랑이의 뺨이 확 붉어졌다.
“하, 할아버지?”
“왜? 싫으냐?”
무천도사는 눈을 샐쭉하게 뜨고 아랑이를 바라봤다.
그러자 아랑이가 급격하게 당황해서 시선을 어디에도 두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했다.
“솔직히 난 네가 지웅 청년이랑 한 지붕 아래 살면 참 좋을 것 같구나. 요즘 같은 세상에 저런 청년이 어디 있겠니?”
“제,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이런 숙맥 같으니라고, 쯧쯧.”
무천도사가 혀를 찼다.
이제는 아랑이뿐만 아니라 내 뺨도 붉어진 것 같다.
“지웅 청년.”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