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 히어로 055화
제대로 생각은 안 나지만, 그 영화의 주인공과 주인공이 속한 특수 부대는 고통을 느끼는 신경세포를 모두 끊어 버린 이들이었다.
그래서 아무리 위험한 임무에도 용감하게 뛰어들어 해결하곤 했다.
당시에는 그게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한데 세월이 지난 뒤, 멜로 영화를 한 편 봤는데 그 영화의 주인공은 선천적으로 고통을 못 느끼는 질병에 걸려 있었다.
그렇다면 과학적으로 고통을 느끼는 신경을 끊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운 타운에 들어선 지금은 백 퍼센트 가능하다는 게 내 결론이다.
이곳의 과학은 감히 내가 판단할 수 없을 만큼 크게 발전해 있었다.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싸울 때 더욱 저돌적이 될 수 있겠지.’
지금 나와 싸우는 매드 맨처럼.
녀석은 망가지는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연이어 공격을 해댔다. 정강이 하나가 골절되어서 절뚝거리는 와중에도 멀쩡한 주먹을 내질렀다.
‘확실히 블레이드보다 힘과 스피드 모두가 우위다.’
그러나 누누이 말했지만 내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개미 중에서는 힘이 약한 개미도 있고, 힘이 센 거대 개미도 있다.
하지만 사람 앞에서는 다 똑같은 개미다.
내가 보는 블레이드와 매드 맨이 그렇다.
콰앙!
난 녀석이 지르는 주먹을 피하면서 무릎을 쭉 들어 올려 턱을 날렸다.
턱을 제대로 맞으면 뇌가 흔들려 중심을 잡지 못한다는 얘기를 들었던 적이 있다.
매드 맨은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고통은 느끼지 못하지만 다리가 부러지면 절뚝거리고 뇌가 흔들리면 평형감각을 잃는다.
그것은 육체의 구조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매드 맨은 뒤로 넘어질 듯 비틀대면서도 끝끝내 넘어지지 않았다.
난 왼발을 축으로 딛고 몸을 빠르게 회전시켰다. 그리고 오른발 뒤꿈치로 매드 맨의 턱을 다시 한번 후려쳤다.
뻐억!
매드 맨의 턱이 아래로 툭 떨어지더니 덜렁거렸다.
뼈가 산산조각 난 것이다.
매드 맨은 그 상태로 허공에 붕 떠서 옆으로 날아 바닥에 떨어졌다.
‘죽이지 않고 이기려면 기절시켜야 한다.’
매드 맨은 다시 일어나려고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지 연거푸 넘어졌다.
난 그런 녀석에게 다가가 옆구리를 걷어찼다.
매드 맨의 몸이 반 바퀴를 핑 돌아 바닥에 대자로 뻗었다.
“끝이다.”
꿈틀거리는 매드 맨의 뒷목을 손날로 내려쳤다.
퍽!
매드 맨이 사지를 파르르 떨었다.
그리고 이내 축 처졌다.
“후우우.”
난 매드 맨에게 등을 돌리고 멀어짐으로써 그를 죽일 의사가 없음을 표했다.
그러자 진행 요원들이 달려와 매드 맨의 상태를 확인하고서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3회전 시합이 끝났습니다! 결과는 나이트 어벤저의 승리입니다! 데스 파이트 첫 출전에 파죽지세로 3연승을 거둔 새로운 초신성의 등장을 박수로 환호해 주십시오!
사회자의 말에 객석에서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우와아아아아―!
동시에 머릿속에서 여인의 음성이 들렸다.
띠링!
―이번에도 시합에서 이겨주시는 바람에 여러 사람들이 고마워하고 있어요~! 축하드려요, 지웅 님~! 선행을 쌓아 312링크가 주어집니다.
됐어!
이제 내가 보유하고 있는 링크는 총 390이다.
이걸로 소켓을 충분히 업그레이드할 수 있게 되었다.
―나이트 어벤저에게는 세 번의 파이트 머니로 배당액의 0.1퍼센트인 만 오천삼백이십 달러가 지급됩니다.
15,320달러?
그럼…… 원으로 환전했을 때, 대략 1,700에서 1,800만 원 정도가 된다.
난 오로지 이랑이를 구하기 위해서 싸웠던 것뿐인데 생각지도 못한 목돈이 들어오게 되었다.
―아울러 하루 동안 3회전의 시합을 모두 우승했으니 그에 대한 특전으로 현금 오만 달러, 혹은 세이브 카드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선택하겠습니까?
지금 여기서 바로 선택해야 하는 건가?
관중들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날 지켜보고 있었다.
내 선택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으므로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세이브 카드를 선택하겠어.”
그러자 관중석이 술렁거렸다.
진행 요원 한 명이 내게 다가와 황금색의 얇은 카드 한 장을 내밀었다.
카드의 양면에는 세이브 카드라는 검은색 글자만 덩그러니 적혀 있었다.
그 외에 별다른 특징은 없는 카드였다.
내가 그것을 받자, 사회자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세이브 카드를 선택했군요. 그것을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보관하시겠습니까, 타인을 위해 사용하시겠습니까?
아예 이 자리에서 끝장을 보라는 얘기군.
난 세이브 카드를 높이 들고 말했다.
“세이브 카드를 나이트 핸섬에게 사용하겠다.”
―아~ 나이트 어벤저는 세이브 카드를 노예가 될 처지에 놓인 나이트 핸섬에게 사용했습니다. 이로써 나이트 핸섬은 노예에서 해방되었습니다. 나이트 핸섬의 주인이 될 예정이었던 귀족께서는 참으로 안타깝겠네요. 하지만 규정은 규정, 어쩔 수 없음을 양해 부탁드립니다.
사회자의 멘트가 끝나자 객석에서 누군가가 욕설을 내뱉었다.
“젠장! 저 빌어먹을 새끼!”
난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경기장에 가득한 웅성거림 때문에 그 소리를 못 들었겠지만 지금의 내 청력은 이를 확실하게 포착했다.
“감히 내 노예를 해방시켜?!”
수많은 귀족 중 배가 불뚝 나오고 머리에 터번을 쓴 아랍계 콧수염 중년 사내가 양손을 휘저으며 악을 쓰고 있었다.
그가 이랑이를 갖게 될 귀족이었던 모양이다.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
그냥 안 넘어가면 어쩔 건데?
―나이트 어벤저는 이만 퇴장해 주십시오.
앞으로 나 볼 일 없을 거다.
이랑이 데리고 나가면 두 번 다시 여기에 발도 붙이지 않을 거니까.
* * *
대기실로 돌아가니 설열음이 문 앞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품엔 카시아스가 안겨 있었다.
저 자식이 뭐하자는 거야?
“잘 싸우시네요.”
“그쪽이랑 말 섞기 싫습니다.”
“대화 나누자고 온 게 아니니 너무 날 세우지 않아도 돼요. 따라와요. 나이트 핸섬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 드릴게요.”
설열음은 마치 나와 아무런 일도 없었던 사람마냥 행동했다.
일말의 감정도 없이 얘기하고서는 쿨하게 등을 돌려 걸어갔다. 난 조금 찝찝한 마음으로 그녀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리고 카시아스에게 말했다.
[왜 또 거기 가서 안겨 있어?]
[내가 안긴 게 아니라 이 여자가 와서 안았다.]
[안아준다고 안기냐? 넌 자존심도 없어?]
[이 여자랑 감정싸움 한 건 너지, 내가 아니야. 그만 찡찡거려라, 사내자식이.]
[이건 아군인지 적군인지…….]
카시아스와 말싸움을 하며 걷다 보니 설열음이 어느 방문 앞에서 멈춰 섰다.
난 미처 그걸 인지 못하고서 걷다가 가까스로 걸음을 멈췄다.
하마터면 그녀에게 부딪힐 뻔했다.
“여기가 의료실이에요. 나이트 핸섬은 이 안에 있어요.”
설열음이 문을 열어주었다.
그러자 그 안으로 일반 병원의 응급실처럼 꾸며진 공간이 나타났다.
총 스무 개의 침대 중, 네 개의 침대에 부상자가 누워 있었다. 그중 한 명은 내게 심하게 당한 블레이드였다.
놈은 전신에 붕대를 감고서 산소호흡기를 낀 채 링거를 맞고 있었다.
나머지 둘은 별 관심 두지 않아도 되는 녀석들이었다.
난 이랑이에게 다가갔다.
이랑이의 상태도 좋지 않았다.
아킬레스건이 끊어진 다리에 깁스를 하고서 입에 산소호흡기를 착용했다.
얼굴은 부어터져서 엉망이었다.
“이랑아!”
이랑이의 몸을 흔들어 보았지만 녀석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 멀리 구석에 의사 가운을 입은 중년 사내가 작은 책상 하나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저기요!”
내가 그를 불렀지만, 그는 날 한번 슥 보더니 모른 체했다.
“의사 선생님! 이랑이 괜찮은 겁니까?”
“…….”
하지만 의사는 묵묵부답이었다.
내가 뭐라고 더 하려 하자, 설열음이 다가와 말했다.
“소용없어요. 닥터 챈의 임무는 다쳐서 실려 오는 부상자들을 응급처지하는 것뿐. 그 외엔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아요. 그는 당신의 질문에 대답해주는 것도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대답하지 않을 거예요.”
뭐 저런 인간이 다 있지?
하여튼 다운 타운에 발 들이는 모든 놈들은 정상이 아니다.
데스 파이트 관계자들은 더더욱!
“마인드 탭.”
“네?”
내 혼잣말에 설열음이 되물었지만, 무시했다.
마인드 탭을 열어, 아티팩트 소켓을 터치했다.
팅―
아티팩트 소켓을 업그레이드하시겠습니까?
업그레이드 비용은 200링크입니다.
[Yes/No]
‘Yes’를 터치해서 아티팩트 소켓을 업그레이드했다.
이제 인피니트 포션을 사용할 수 있다.
안주머니에 잘 넣어뒀던 것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병에 담긴 물에서는 희미한 빛이 일고 있었다.
“그건 뭐죠?”
설열음의 질문을 한 번 더 씹어 삼켰다.
이랑이의 산소호흡기를 떼어내고 입을 벌려 힐링 포션을 조금씩 부어 넣었다.
다행히 녀석은 그것을 모두 받아 넘겼다.
완전히 의식이 없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이제 이랑이 내가 데려나가도 되는 거죠?”
“네.”
난 이랑이를 들쳐 업고 나가려 했다.
순간 코앞에 황금빛 봉투 하나가 척 나타났다.
그걸 내민 건 설열음이었다.
“뭡니까?”
“파이트 머니예요. 챙겨 가세요. 이걸 전해주려고 기다렸던 거예요.”
황금 봉투를 들고서 날 바라보는 설열음의 눈은 공허했다.
눈이 마음의 창이라면 그녀의 마음 역시도 텅 비어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정말 특이한 여인이다.
잠시 멍하니 있자니 설열음의 품에 있던 카시아스가 황금 봉투를 입으로 낚아채 내 머리로 뛰어올랐다.
[어서 가자.]
[응.]
“그럼 이만. 다신 볼 일 없을 겁니다.”
설열음은 카시아스의 행동에 충격을 먹었는지 좀 전과 달리 동요하는 얼굴이었다.
“달봉이…… 따라가려고?”
카시아스는 설열음을 외면했다.
설열음이 애타는 시선을 달봉…… 아니, 카시아스에게 보내다가 작게 한숨을 폭 쉬었다.
“그래, 잘 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해드릴 게 있어요, 지웅 씨.”
“빨리 말해요.”
“혹 주변에 누군가를 추천하고 싶다면 전화기의 샵(#)버튼을 일곱 번 누르면 돼요.”
“뭐라구요?”
“아마 어디로도 전화가 연결되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그냥 끊으면 전화를 건 사람이 지웅 씨라는 게 확인되는 즉시 다시 전화가 갈 거예요. 그때 추천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 나이, 성별, 사는 지역을 말씀해 주시면 돼요.”
이 여자가 근데 끝까지…….
잠시 잊고 있던 분노가 확 하고 터졌다.
콰앙!
주먹으로 의료실 벽을 때렸다.
퍼서석.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벽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그제야 내가 불러도 한 번 돌아보지 않던 의사가 힐끔 시선을 주었다.
하지만 관심 없다는 듯 이내 다시 고개를 돌렸다.
난 설열음을 노려보며 한 자 한 자 씹어 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