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 히어로 052화
“오해하고 계시는 겁니다~”
오해는 얼어 죽을.
이 자식 분명히 어떤 꿍꿍이가 있는 거다.
내가 생각을 좀 하려 드니, 라헬이 빠르게 혀를 놀렸다.
“생각이 길어지면 용기는 사라진다는 말 모르시나요~? 굉장한 궁술도, 굉장한 리더십도 굉장히 좋은 능력이니 아무거나 사셔도 지웅 님은 지금보다 굉장한 사람이 될 거랍니다. 제가 보증하죠.”
네 보증은 휴지 한 장보다 가벼워서 믿을 수가 없다.
그나저나 이놈이 대체 뭘 숨기고 있는…… 아, 그렇지. 정말 바보 같았어, 내가.
“라헬.”
“드디어 결정하셨나요?”
“그런데 물어볼 게 있는데.”
“무엇이든 물어보시죠~ 상냥한 상인 라헬은 다~ 대답해 드리겠어요.”
“늘 나한테 엿 먹이려는 이유가 뭐야?”
“제가요? 누구를요? 지웅 님을요? 하하하, 뭔가 오해하고 계시네요.”
“날 엿 먹이면 라헬이 뭐 얻는 거라도 있어?”
“전혀 없습니다.”
“그래? 근데 왜 이번에도 엿 먹이려 그랬어?”
“소울 스토에서는 엿을 판 적이 없습니다만…….”
“500링크짜리 영혼의 능력을 받아들이려면 영력이 얼마나 필요한지는 얘기 안 했잖아.”
“……!”
라헬의 미소 짓는 얼굴 위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평소에는 늘 얘기해 줬었잖아. 각 영혼에 필요한 링크와 영력. 그런데 오늘은 영력에 대해서는 쏙 빼놨지. 게다가 영혼들의 능력도 대충대충 설명하고서 어떻게든 빨리 팔려고 정신없었잖아.”
“착각입니다.”
이게 진짜 죽을라고.
“착각일 리가 있냐고!”
지금 내 영력이 9다.
그런데 11의 영력을 필요로 하는 영혼을 덜컥 사 버리면 그 영혼의 능력을 흡수하지 못한다.
즉 링크만 버리게 되는 것이다.
라헬은 바로 그걸 노렸다.
“휴우, 영혼은 됐고 다른 것부터 보자.”
“골드바를 보여드릴까요?”
“아티팩트는 없어?”
“보유하신 링크로 구매 가능한 아티팩트는 없네요.”
“그래? ……거짓말 아니지?”
“그런 걸로는 거짓말 안 한답니다~”
아티팩트의 가격이 갑자기 확 치솟았다.
600링크 이상 들고 가면 새로운 아티팩트 하나 정도는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그럼 어쩔 수 없이.
“다음에 올게.”
내가 소울 스토어를 빠져나가려 하자 라헬의 얼굴에서 미소가 싹 사라졌다.
녀석이 고개를 휘휘 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그렇지. 내가 뭘 바라겠어.”
“뭐라고?”
“뭐 살 거 아니면 빨리 가보세요, 지웅 씨.”
조금 전까지는 고객님이라더니 이제는 지웅 씨란다.
하여튼 저 정신병자 같은 놈.
“안 그래도 갈 거다.”
난 소울 스토에서 나와 현실로 돌아왔다.
그때 마침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
“누구세요?”
내가 묻자 문이 벌컥 열리며 설열음이 얼굴을 내밀었다.
“들어가도 될까요?”
“……문을 열기 전에 물어봐야죠, 그런 건.”
“들어가도 된다는 말이네요.”
설열음이 대기실로 들어왔다. 그녀의 품엔 카시아스가 안겨 있었다.
“시합 잘 봤어요. 굉장하던걸요.”
일정한 목소리 톤으로 무미건조한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말해봤자 하나도 굉장하게 안 느껴진다.
“그보다 궁금한 게 있는데, 패배한 나이트는 어떻게 되는 거죠?”
이랑이의 상태가 걱정되어 죽을 지경이다.
“상태가 양호할 경우 모든 경기가 끝나자마자 노예 수속을 밟지만 상처가 심할 경우 회복실로 옮겨져 하루 동안 치료를 마친 후에 노예 수속을 밟게 돼요.”
“회복실에서 치료를 해준다구요?”
“네, 하지만 대수술을 한다거나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정도의 응급처치만 해주는 게 전부죠.”
안 된다.
이랑이는 지금 응급처치만 했다가는 평생 불구로 살아야 한다.
그건 내가 용납할 수 없다.
“1회전의 모든 시합을 끝내려면 얼마나 걸립니까?”
“남은 건 두 팀이니까 삼십 분 정도예요.”
“그다음에 바로 2회전이 시작되나요?”
“10분간 휴식을 가지면서 2회전에 출전할 의사가 있는 사람들을 차출해요.”
“알겠어요.”
“2회전에 나가실 생각이세요?”
“네.”
“1회전이 끝났으니 여기서 그만두면 칠백만 원가량을 받을 수 있어요. 배팅이 그만큼 많이 됐어요.”
“안 받아도 돼요.”
“그래요, 건투를 빌게요. 그럼 달봉이는 제가 조금 더 데리고 있어도 괜찮을까요?”
난 카시아스를 슬쩍 바라보았다.
[그렇게 해도 된다고 말해라.]
[왜? 그 여자한테 반했냐?]
[무슨 그런 거지 같은 소리를. 이 계집이 날 데리고 콜로세움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더군. 파악할 수 있는 정보들이 많다.]
그런 거였군.
난 설열음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세요.”
“고마워요, 지웅 씨. 그럼 2회전 시작 전까지 푹 쉬세요.”
설열음이 대기실을 나가고 난 혼자가 되었다.
* * *
난 전투가 끝났지만 망가진 모니터로 계속 시합을 관전했다.
2회전에서 지금 시합을 치르는 누군가와 붙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적을 알면 나쁠 게 하나도 없는 법이다.
7시합의 승자와 8시합의 승자가 가려졌다.
1회전의 모든 시합이 끝나고 드디어 2회전의 막이 오르려 하고 있었다.
대기실의 문이 열리고 설열음이 아닌 주최 측의 진행 요원이 날 데리러 왔다.
난 그를 따라 움직였다.
진행 요원은 붉고 긴 복도의 끝에 있는 방문까지 날 인도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내가 있던 곳보다 열 배는 큰 공간이 나왔다. 거기엔 두 사람이 미리 와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한 명은 1회전 7시합에 승리한 나이트 방콕이었다.
닉네임도 그렇고 생김새도 그렇고 타이 사람이 틀림없었다.
키는 나보다 작고 덩치도 왜소했지만 방콕은 킥복싱과 주짓수를 섞어 놓은 듯한 기술로 상대방을 떡으로 만들어 놓았다.
급소를 때리고 관절을 뽑고 눈이나 고환처럼 물렁한 곳은 죄다 터뜨린 뒤, 전의를 상실한 상대의 목을 한 바퀴 돌려 죽였다.
그러더니 자신의 손에 묻은 죽은 사람의 피를 핥으며 광소했다.
지금도 놈은 서늘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미친놈이야.’
이 녀석과 붙게 된다면 누구 한 명은 죽는다는 생각으로 싸워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대기실에 있는 다른 한 명은…… 블레이드였다.
놈의 얼굴을 보자마자 속에서 불이 끓어올랐다.
하지만 꾹 참고 대기실에 들어섰다.
그때, 스피커에서 사회자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곧 제2회전 1시합을 시작하겠습니다. 제비뽑기로 인해 2회전 1시합을 치를 나이트는 어벤저와 블레이드로 정해졌습니다. 나이트 방콕은 대전 상대가 없으므로 매드 맨과 붙게 됩니다.
“크큭, 매드 맨이든 뭐든 다 오라 그래. 씹어 먹어줄 테니까.”
방콕은 여유를 부리며 말했다.
난 이제 방콕에게 신경을 완전히 끄고서 블레이드만 노려봤다.
내 눈에 어린 분노를 읽었는지 블레이드가 한마디를 했다.
“어차피 시합 나가면 피 튀기게 싸울 거야. 지금부터 힘 빼지 마.”
맞는 말이다.
시합에서 죽여 주마, 블레이드.
어벤저 VS 블레이드
나와 블레이드는 경기장에 나와 서로를 마주보고 섰다.
블레이드에게서 풍기는 날카로운 기도가 내 전신을 들쑤셨다.
전 같았다면 벌써 위축이 되어 공포에 떨기 바빴을 것이다.
태진이 패거리한테도 한 번 대들지 못해 빵 셔틀을 해야 했던 나니까.
한데 지금은 육신이 강해지는 것과는 별개로 정신도 강해졌다.
아니, 정확히 얘기하자면 깡이 생겼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성격 자체가 조금 변한 거라고 하는 게 맞을까.
내가 카시아스를 만나 힘을 얻게 된 건 끝나가는 가을 무렵이다. 그리고 오늘은 11월 16일.
그 얼마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강해졌다는 이유 하나로 성격이 변한다는 건 무리가 있다.
물론 제법 영향은 끼쳤겠으나, 내가 전과 달라진 데에는 소라스와 바레지나트의 퀘스트를 실행하면서 그들의 인격을 대리 체험했던 것이 결정적 요인이 된 게 아닐까 싶다.
소라스도, 바레지나트도 현실의 나와는 달리 상남자라 할 수 있을 만큼 거친 인간들이었다.
말투도 험하고 성격은 불같았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불의에 굴함이 없이 맞섰다.
내가 그런 이들이 되어 살아 보니 현실의 내 성격과는 괴리감이 많았다.
나는 닮고 싶었다.
지금의 내 모습을 버리고 그들처럼 강단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 바람은 결국 내 성격을 변화시켰다.
그 덕분에 킬러 앞에서도 그리고 블레이드 앞에서도 전혀 기죽지 않고 당당히 설 수 있는 것이다.
―지금부터 제2회전 1시합을 시작하겠습니다. 이번 시합에서도 지는 쪽은 가장 높은 배팅을 한 귀족의 노예가 됩니다. 그럼 즐거운 전투를 부탁드리지요, 나이트 여러분.
사회자의 말이 끝나자 블레이드가 움직였다.
그는 민첩하게 달려오며 아무것도 없는 양손을 휙 털었다. 그런데, 갑자기 오른손에서 단검이 튀어나와 내게 날아들었다.
‘눈속임이군.’
소매 속에 숨겨 놓은 단검을 던진 것이다.
애들 장난 같은 짓이다.
바람을 가르며 날아든 단검을 낚아채, 그대로 돌려 블레이드에게 되던졌다.
쐐애애애액!
단검은 날아오던 속도보다 빠르게 날아갔다.
질풍처럼 달려오던 블레이드가 눈을 부릅뜨며 허리를 아래로 굽혔다.
단검이 그의 머리카락을 스치며 지나갔다.
녀석이 주춤하는 사이, 내가 앞으로 달려 나갔다.
바레지나트의 민첩성을 블레이드는 따라오지 못했다.
나는 놈보다 훨씬 빨랐다.
덥석!
갑자기 코앞에 나타난 날 본 블레이드의 얼굴에 당황함이 어렸다.
몸을 뒤로 빼려는 놈의 멱을 잡았다.
그리고 주먹을 휘둘렀다.
뻑!
“……!”
블레이드가 안면을 정통으로 얻어맞고 코피를 흘렸다.
녀석이 아무리 빠르고 강하다고 해봤자 인간의 몸이다.
하지만 내 육신은 인간의 한계를 훨씬 초월했다.
빠악! 빡! 빠아악!
연달아 세 방의 주먹을 더 얼굴에 꽂아 넣었다.
“우워어어어!”
속수무책으로 얻어맞기만 하던 블레이드가 괴성을 질렀다.
놈이 멱을 쥔 내 손을 잡고 바닥을 차 허공에 떴다. 그 상태로 공중제비를 돌며 내 팔을 꺾으려 했다.
그러나 그건 최악의 선택이었다.
“낭아권!”
킬러와의 대결에서는 사용하지 않았던 낭아권을 시전했다.
말아 쥐고 있던 왼 주먹이 대포알처럼 튀어 나가며 허공에 거꾸로 뜬 블레이드의 명치를 가격했다.
퍼억!
“크허어……!”
블레이드가 입에서 피와 부러진 치아들을 토해내며 뒤로 날아갔다.
난 이번에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
낭아권을 제대로 얻어맞은 블레이드는 총을 벗어난 총알처럼 날아가 경기장 벽에 등을 부딪쳤다.
콰아앙!
“쿨럭!”
철벽에 부딪친 블레이드가 피를 토하며 대자로 뻗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놈이 끝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블레이드는 지금까지 내가 만나본 인간들 중에 가장 강하다.
물론 내 입장에서 보자면 그래봤자 연약한 인간일 뿐이다.
“크흑…….”
놈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