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 히어로 049화
“이 지하에 마을이랑 성이 존재한다구요?”
“네. 어차피 나이트들이 그곳에 발을 디딘다는 건 불가능할 테니 큰 관심 가지지 않으셔도 돼요. 그보다 정해야 할 게 있는데요.”
“뭘 정해야 하죠?”
설열음이 카시아스를 가리켰다.
“그 고양이 이름…….”
이건 또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야?
“고양이 이름을 짓자구요……?”
설열음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여자가 내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싸움판에 데려와 놓고서 고양이 이름 따위나 짓는 게 그보다 큰일인 것처럼 얘기한 거야, 지금?
“지웅 씨는 생각해본 이름이 있나요?”
“저기……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
“제 생각엔 달봉이가 좋을 것 같네요.”
“……네?”
“달봉이요.…… 제가 전에 키우던 고양이 이름이었어요. 그런데 일 년 전 죽었죠. 괜찮을까요? 이렇게 지어도.”
역시 이 여자, 고양이에 대해서 얘기할 때만 얼굴에 표정이 생긴다.
그것은 곧 그때는 감정이 드러난다는 얘기다.
[달봉이란다, 카시아스. 좋겠다, 근사한 이름 생겨서.]
[시끄럽다.]
“마음대로 하세요.”
설열음이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이고 걸음을 옮겼다.
“그럼 콜로세움으로 가시죠.”
“콜로세움?”
설열음이 저 멀리 있는 돔 형태의 건물을 가리켰다.
“데스 파이트가 벌어지는 장소 말예요.”
* * *
설열음의 설명에 따르면 콜로세움엔 총 다섯 개의 출입구가 존재한다고 한다.
그중 네 개는 동서남북, 네 방향을 기준으로 나 있고 데스 파이트의 관객들이 입장하는 문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 남동쪽으로 나 있는 문은 데스 파이트에 참여하는 나이트들 전용 문이었다. 문의 이름은 헬 게이트. 누가 지었는지 몰라도 작명 센스 참 단순하다.
나는 설열음을 따라 헬 게이트로 들어섰다.
헬 게이트는 쩍 벌린 악마의 아가리처럼 디자인을 해놔서 기분이 영 찝찝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니 온통 붉은색으로 도배된 긴 복도가 나타났다.
들어올 땐 악마의 입을 통해 들어왔으니 여기는 식도라는 건가?
길고 긴 복도의 양옆으로는 수많은 방문이 존재했다.
그리고 방문에는 누군가의 이름이 걸려 있는 곳도, 그렇지 않은 곳도 있었다.
아무래도 여기가 나이트 대기실인 모양이다.
설열음은 리드미컬하게 걸었다.
나도 덩달아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렇게 수십 개의 방문을 지나던 와중, 설열음이 멈춰 서지도 않았는데 난 어느 방 앞에서 굳어 버렸다.
방문에는 연이랑이라는 이름이 걸려 있었다.
내가 방문을 열려고 하자, 설열음의 손이 내 팔목을 잡아챘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안 돼요.”
“아는 사람이에요. 얘 때문에 내가 여기에 온 거고.”
“그래도 안 돼요. 시합이 끝날 때까지 나이트들은 서로 접촉할 수 없어요. 그게 이곳의 규칙이에요.”
“왜 안 된다는 겁니까?”
“시합 전에 나이트끼리 시비가 붙을 수도 있기 때문이죠. 그러다 누군가 크게 다치기라도 하면 이미 짜놓은 대진표를 다시 짜야 할 테고 그것은 시합에 차질을 불러오겠죠?”
“……알았어요.”
마음 같아서는 설열음의 손을 뿌리치고 문을 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어찌 되었든 지금 아쉬운 건 나다.
게다가 다운 타운이 어떤 곳인지에 대한 파악도 전혀 안 되어 있다.
일단은 참는 게 맞다.
설열음은 조금 더 복도를 걸어가 내 이름이 걸린 방문 앞에 멈춰 섰다.
“이 안에서 기다리시면 돼요. 대전 순서가 되면 방 안의 스피커에서 알려줄 거예요. 그리고 경기 진행 상황은 모니터로 확인할 수 있어요. 그 외에도 간단한 음료수와 간식거리들이 있으니 마음대로 드셔도 돼요. 조금 피곤하시면 침대에 누워서 주무셔도 무방해요.”
말을 마치며 설열음이 문을 열었다.
대기실은 작고 깔끔한 방처럼 꾸며져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니 문밖에 선 설열음이 뭔가 조금 아쉬운 시선을 내게 보냈다.
“고양이도…… 같이 들어가나요?”
“안 되나요?”
“아니, 상관없지만…….”
그녀는 내게 무슨 말을 더 하려다가 말고 체념한 듯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이걸 받으세요.”
설열음이 까만색의 복점 같은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게 뭔데요?”
“다국어 통역기예요. 정식 명칭은 닷(Dot)이구요.”
말 그대로 점이라는 뜻이군.
“이걸 귀에 부착하세요. 다운 타운에서 들리는 모든 언어를 한국어로 자동 번역 해줄 거예요.”
“이 작은 게요?”
“네, 아까도 말했지만 지구의 과학은 지웅 씨가 아는 것 이상으로 발전해 있어요.”
난 닷을 넘겨받아 귀 안쪽에 부착했다.
닷은 겉면이 테이프처럼 끈끈하게 되어 있는 것도 아닌데 신기하게 피부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럼 쉬세요. 참고로 문은 안에서 열리지 않는 구조로 되어 있어요. 그리고 특수 소재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어지간한 힘으로는 부수기 어려울 거예요. 혹여라도 문을 부수려 하는 행위를 하실 경우 자동 탈락 처리되니 주의해 주세요. 화장실은 저 문을 열면 나와요.”
대기실 오른쪽 구석엔 작은 문이 달려 있었다.
그게 화장실인 모양이다.
“그럼 쉬세요. 그리고 달봉이…… 잘 돌봐주세요.”
그 말을 끝으로 설열음은 문을 닫았다.
그리고 대기실엔 나와 달봉이만 남게 되었다.
[카시아스다!]
남의 생각 네 멋대로 읽지 좀 마라, 달봉아.
* * *
카시아스는 다운 타운에 엄청난 호기심을 보였다.
그가 여태껏 겪어왔던 인간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곳이었기 때문이다.
[과학 수준이 지상의 것과 이다지도 차이 날 줄이야. 아니, 애초에 지상에서도 더 발달된 과학이 존재했으나 공개하지 않았던 것뿐이겠지. 아울러 콜로세움에서 벌어지는 데스 파이트는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만을 위해 만든 도박이야. 다운 타운은 철저히 지구의 상위 계층만을 위해서 만들어진 곳이로군.]
카시아스는 열심히 떠들어댔지만, 난 그의 말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이랑이에 대한 걱정이 머릿속을 가득 채워 다른 사고 회로를 막아 버렸다.
테이블 위에 먹음직한 과자와 초콜릿, 빵들이 놓여 있었지만 식욕이 생기지 않았다. 당연한 얘기지만 잠도 오지 않았다.
그저 초조하게 시간만 축내고 있는데 벽에 걸린 커다란 모니터가 켜졌다. 모니터 안에는 콜로세움의 내부가 비쳐지고 있었다.
흙으로 가득 메워진 타원형의 넓은 경기장을 관객석이 빙 둘러싼 형태로, 전형적인 야구 경기장 모양이었다.
객석은 4분의 3 이상이 채워져 있었다.
객석에 앉은 이들의 면면이 잠깐 카메라에 잡혔다.
각국에서 찾아온 가지각색의 사람들이 잔뜩 흥분한 상태로 경기장을 보며 시끄럽게 소리치는 중이었다.
그때 경기장의 남문과 북문이 열리며 두 사내가 등장했다.
한 사내는 사시미를 들었고, 다른 사내는 맨주먹이었다.
그들의 등장에 장내는 더한 광기로 가득 찼다.
그것은 그야말로 광란의 도가니였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
사람들의 고함과 함성에 경기장에 들어선 두 사내의 얼굴이 급격히 경직되었다.
그리고 사회자인 듯한 남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귀족 여러분. 그럼 첫 번째 시합을 시작하겠습니다. 배팅 룰에 대해서 다시 한번 확인해 드리겠습니다. 배팅은 시합 시작 전 대진표만을 보고 할 수 있으며, 이후에는 변경이 불가합니다. 대진이 끝나고 승패가 가려지면 승자에게 배팅을 한 귀족분들은 배당률에 따라 돈을 가져가시게 됩니다. 그중에서 가장 많은 돈을 배팅한 귀족께서는 싸움에서 진 나이트를 자신의 노예로 삼을 권리가 주어집니다.
그래 바로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지.
사회자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시합에서 패배자가 죽거나, 하루 동안 세 번의 경기를 치러 우승한 나이트가 그 노예에게 세이브 카드를 준다면 안타깝게도 가장 많은 돈을 배팅한 귀족께서는 노예를 가질 수 없게 됩니다.
지금 그릴 수 있는 가장 좋은 그림은 이랑이가 1승을 올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무천도사의 말에 의하면 1승을 올리고 돌아올 수도 있고, 스스로 원할 경우 그 이상 전투에 나갈 수도 있다고 했다.
그것은 순전히 1회전을 통과한 이들 스스로의 의지로 정해진다.
그리고 만약 내가 2회전을 나가길 원했는데, 1회전에서 승리한 이들 중 아무도 2회전에 나가길 원하지 않는다면 매드 맨 중 한 명과 내가 대결하게 된다.
어찌 되었든 이것은 최악의 시나리오다.
이랑이가 시합에서 졌을 경우 말이다.
녀석이 1회전 싸움에서 가볍게 이기고 집으로 돌아간다고 해준다면 나로서는 더 바랄 게 없다.
―나이트들에게 경기 룰에 대해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나이트들은 총기류가 아니라면 어떤 무기를 사용해도 무방합니다. 경기 중 상대방을 죽여도 상관없습니다. 그럼 오늘의 데스 파이트 1회전 제1시합, 나이트 사시미 대 나이트 핵주먹! 시작하겠습니다.
사회자의 음성이 끝남과 동시에 우레와 같은 함성이 울려 퍼졌다.
모니터는 다시 경기장에 나온 두 사내의 모습을 번갈아 비췄다. 사내들은 하나같이 잔뜩 긴장한 얼굴이었다.
[사시미와 핵주먹? 닉네임을 정하는 모양이군.]
두 나이트는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탐색전을 벌였다.
싸움에서 지게 되면 죽거나 누군가의 노예가 된다.
그런 부담감이 몸을 짓눌러 쉽게 움직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우우우우우우우―!
두 사람이 계속해서 대치하고 서 있기만 하자 객석에서 야유가 들려왔다.
“빨리 해, 이 머저리들아!”
“눈싸움은 계집애들이나 하는 거 아닌가!”
야유 속에서 들리는 몇 가지 언어들을 잡아냈는지 귀에 붙인 통역기 닷이 자동 번역을 해주었다.
사내들은 쏟아지는 비난 속에서도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
그러다 나이트 사시미가 무언가를 결심했는지 아랫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고서는 앞으로 달려 나갔다.
나이트 핵주먹도 눈을 크게 떴다.
둘 다 비로소 큰 결심을 한 것이다.
그들이 인생을 걸어야 하는 데스 파이트에 참가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돈일 수도, 노예가 될 처지에 놓인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다.
어찌 되었든 그들은 지금 싸워야 하는 무대에 서 있고 이겨야 하는 입장에 처했다.
사시미는 급격히 둘 사이의 간격을 좁히고 들어갔다.
핵주먹이 사정권에 들어오는 순간 그는 들고 있던 사시미를 날카롭게 휘둘렀다.
그 움직임이 신속 정확하고 날랬다.
하지만 핵주먹도 쉽게 공격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는 민첩하게 몸을 움직여 빠르게 날아드는 사시미 공격을 모조리 피해내며 반격을 시도했다.
휙!
주먹이 번개처럼 뻗어나갔다.
사시미가 그것을 피하자, 뒤이어 세 번의 주먹이 더 날아들었다.
그것을 잘 피하던 사시미가 얼굴에 정통으로 한 방을 얻어맞았다.
퍽!
사시미의 허리가 뒤로 확 꺾였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사시미가 제대로 한 방 먹은 줄 알 것이다. 하지만 사시미는 주먹에 얻어맞는 순간 들고 있던 사시미의 날을 하늘로 향하게 하고 핵주먹의 팔꿈치에 꽂아 힘껏 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