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 히어로 046화
넓은 정원에, 2층 저택에, 큰 도장에…… 게다가 도장의 우측으로는 작은 연못도 있었다.
아랑이가 도장을 향해 걸었다.
나도 그 옆을 따라 걸었다.
“지금 시간이면 이랑이가 할아버지한테 수련 받고 있을 거야.”
아랑이의 말과 달리 도장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내 청력은 파펠의 영혼이 가진 능력으로 인해 일반인보다 훨씬 업그레이드되어 있다.
고작 백 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은 도장에서 나는 소리 정도야 쉽게 들을 수 있다.
한데, 도장 안은 고요했다.
그러나 아랑이에게 말을 할 수가 없어서, 일단 도장 문 앞까지 같이 걸었다.
그쯤 돼서야 아랑이도 이상함을 느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도장의 문을 열었다.
“할아버지~ 이랑아~”
도장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디 갔지?”
* * *
아랑이의 부모님도 할아버지와 이랑이의 행방을 모르셨다.
결국 아랑이와 나는 텅 빈 도장에서 하염없이 두 사람을 기다렸다.
아랑이는 계속해서 이랑이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도통 연결되지가 않았다.
“얘는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벌써 한 시간이 지났다.
계속해서 걱정이 쌓여가던 그때.
“이랑아!”
누군가가 이랑이의 이름을 크게 부르며 도장에 들어섰다.
그는 다름 아닌 무천도사였다.
“할아버지!”
아랑이가 벌떡 일어나 무천도사에게 달려갔다.
“어디 갔다 오셨어요? 이랑이는요?”
아랑이의 물음에 무천도사가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너도 이랑이의 행방을 모르는구나.”
“네? 할아버지, 이랑이 어디 갔는지 모르세요?”
“아니…… 알 것 같구나. 그래서 문제란다.”
“뭐가 문젠데요? 어디로 갔는지 알면 데리고 오면 되잖아요.”
“이랑이의 방에서 이걸 발견했단다…….”
말을 하며 무천도사가 내민 것은 블랙 카드였다.
설열음이 내게 건넨 것과 똑같은 블랙 카드.
“이, 이거…….”
“다운 타운의 커플러는 데스 파이트에 출전할 나이트를 이런 식으로 불러들인단다.”
“그럼…… 이랑이가 다운 타운으로 갔단 말이에요?”
아랑이의 안색이 파래졌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구나. 으음…….”
무천도사가 혼미한 얼굴로 비틀거렸다.
“할아버지!”
아랑이가 놀라서 무천도사를 불렀다.
난 그런 무천도사를 얼른 부축했다.
무천도사는 그제야 날 발견한 듯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자네는…… 지웅 청년이 아닌가? 내가 지금 경황이 없어 눈앞에 사람을 놓고도 못 알아봤어.”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무천도사님.”
“그래, 내가 아랑이를 통해서 자네를 초대했지. 늙은이의 부름에 응해줘서 고맙구만.”
“아닙니다.”
“그리고…… 미안하이.”
“네?”
갑자기 뭐가 미안하다는 건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천도사는 내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한 채 주름 가득한 입술만 오물거렸다.
그러자 아랑이가 놀라 소리쳤다.
“할아버지…… 설마 지웅이한테 이상한 부탁 시키려는 거 아니죠!”
무천도사는 여전히 그 누구도 바라보지 않은 채 힘들게 입을 열었다.
“아니…… 이미, 부탁을 한 것이나 다름없단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지웅 청년에게도 블랙 카드가 갔을 거야.”
난 주머니에 넣어놨던 블랙 카드를 꺼내 들었다.
“네, 맞아요. 어느 여인이 저한테 이걸 주고 갔어요.”
“커플러. 특정 인물에게 블랙 카드를 건네 다운 타운과 연결해 주는 이들을 그리 부르지. 한데 그들이 어떻게 지웅 청년의 존재를 알았다고 생각하는가?”
“그게 저도 의문입니다.”
무천도사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나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대신 하늘을 올려다봤다.
“후우.”
깊은 한숨을 내쉰 뒤, 그는 비로소 내게 하려던 말을 꺼냈다.
“다운 타운에서 벌어지는 데스 파이트. 그 무대에 나이트의 자격으로 참전할 수 있는 이들에게 발송되는 초대권, 그게 블랙 카드라네. 그리고 그 블랙 카드를 받게 되는 이들은 백 퍼센트 타인의 추천으로 채택되지.”
추천제…… 그렇다는 건 혹시?
무천도사는 마침내 나와 눈을 맞추었다.
그의 눈동자엔 무거운 죄책감이 가득 차 있었다.
“미안하이, 지웅 청년. 내가 조금 전, 데스 파이트 주최 측에 자네를 추천했네.”
“할아버지! 어떻게…… 어떻게 그런 일을……!”
“날 욕하거라, 아랑아. 지웅 청년, 날 욕하게.”
“정말, 할아버지…… 어떻게…….”
다운 타운으로
아랑이는 정신이 혼미해진 얼굴이었다.
무천도사는 그런 손녀의 반응에 아랫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평정을 유지하고 있는 건 나밖에 없었다.
“아랑아.”
“미안, 미안해, 지웅아. 내가 대신 사과할게.”
“아니, 그럴 필요 없어. 무천도사님도 그렇게 미안해할 거 없어요.”
그러자 두 사람이 동시에 날 바라봤다.
그 시선들엔 어떻게 그토록 아무렇지 않을 수 있냐는 물음이 담겨 있었다.
나도 놀랍다.
전 같으면 펄쩍펄쩍 뛰었을 텐데, 지금은 냉정하게 상황부터 분석하고 있었다.
영혼의 힘을 얻게 돼서 성격도 변한 걸까?
아니면 소라스나 바레지나트의 기억을 거닐면서, 그들의 인격이 내게도 영향을 끼친 걸까?
아무래도 좋다.
지금의 내 모습, 난 마음에 든다.
“제가 알기로 데스 파이트의 추천 제도는 상대방이 나를 추천할 경우, 블랙 카드가 전달되고, 내가 흥미가 동해서 카드에 있는 번호로 전화를 할 경우에만 다운 타운으로 가는 것이 허락되는 듯한데, 맞나요?”
무천도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럼 무천도사님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어요. 절 강제로 다운 타운에 끌려가도록 만든 게 아니잖아요? 추천만 하신 거지. 그럼 다운 타운에 갈지 말지는 전적으로 제 의사로 선택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그 말이 맞긴 하네만…….”
“지웅아…… 너 설마?”
설마가 사람 잡는단 말이 있지.
하지만 지금은 사람 살리기 위해서 그 설마에 들어맞는 대답을 해야겠어, 아랑아.
“응. 가겠어. 다운 타운에.”
“안 돼!”
아랑이가 머리를 거세게 저었다.
“아까 내 얘기 못 들었어? 거기는 인생을 걸고 싸우는 곳이래! 그런 곳에 네가 가게 되면…… 어떻게 될지 모른단 말야.”
“그럼 이랑이는?”
“……!”
“네 동생은 어쩌고?”
“이랑이 일은 나도 걱정돼서 죽을 것 같아. 하지만 네가 간다고 무슨 수가 나는 것도 아니잖아.”
“아니, 내 생각은 달라. 무천도사님께선 무슨 수가 나기 때문에 날 추천한 것 같아.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일을 벌일 이유가 없잖아. 그렇지 않나요?”
내 예상대로 무천도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자네가 간다면…… 만약 이랑이가 데스 파이트에서 지게 될 경우, 녀석을 구원할 방법이 생기긴 하지.”
“그게 뭡니까?”
무천도사는 생각을 조금 정리하는 듯 눈을 감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렇게 뜨거운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정적을 깨고 그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데스 파이트는 쉽게 말해서 거대한 도박장이지.”
“도박장이라니요?”
“투견 도박이라는 걸 들어 봤겠지? 두 마리의 투견을 싸움 붙이고, 도박꾼들은 이길 것 같은 놈에게 돈을 걸지. 데스 파이트도 마찬가지일세. 원형 경기장에서 싸움을 벌이는 두 사람이 있고, 그들에게 돈을 건 수만 명의 관중이 있지.”
그럼 데스 파이트는 거대한 도박판이나 다름없다는 거잖아? 그것도 인간의 인생을 걸고 싸우는.
아랑이도 이런 얘기까지는 듣지 못했는지 놀라 벌어진 입을 두 손으로 가리고 있었다.
한 번 운을 뗀 무천도사는 그다음 얘기를 담담하게 이어나갔다.
“도박의 규칙은 별게 없지. 자신이 돈을 건 나이트가 이길 경우, 배당률에 따라 돈을 벌어 가네. 질 경우엔 전부 날리는 거지. 아울러 싸움에서 이긴 나이트는 도박꾼들이 건 돈의 0.1퍼센트를 파이트 머니로 가져간다네. 대략 그 돈이 적을 땐 몇백에서 클 때는 몇천 정도 되지만, 수령 가능한 파이트 머니의 상한선은 천만 원이 최고일세. 한데, 중요한 건 이게 아니야. 싸움에서 진 나이트의 처우일세.”
“……지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노예가 되지.”
아랑이의 휘둥그레진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아마 무천도사의 얘기에 이랑이를 대입하고 있을 테지.
“누구의 노예가 된다는 말입니까?”
“싸움의 승자에게 가장 큰돈을 건 도박꾼의 노예가 된다네.”
“하…….”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건 정말 도박을 위해 최적화되어 있는 시스템이다.
승자에게 가장 큰돈을 건 사람이 패자를 노예로 삼을 수 있다. 그 룰만 보면 돈도 따고 노예도 가질 수 있는 일석이조의 시스템이라고만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가장 큰돈으로 도박에서 승리하길 원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배팅액이 커야 한다.
돈 있는 이들은 너도 나도 어마어마한 돈을 배팅할 것이다.
도박의 판이 절로 커지는 것이다.
‘그래서 인생을 건 싸움이라고 했던 거였어.’
사람의 인권을 대가로 도박을 벌인다.
그런 역겨운 싸움이 벌어지는 곳이 데스 파이트였다.
“그런데…… 노예가 되었다가 다시 풀려나는 경우도 있다.”
“그게, 뭔데요, 할아버지?”
아랑이가 잔뜩 물 먹은 음성으로 힘겹게 물었다.
“데스 파이트에서는 나이트가 연속 세 경기를 이길 때마다 상품을 주지. 현금 오만 달러. 혹은 세이브 카드(Save card).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어.”
나 참, 인생을 걸고 싸우는데 세 번 이긴 것에 대한 대가가 겨우 오만 달러? 대충 1달러당 1,200원으로 잡고 계산해 봐도 고작 6,000만 원이 고작이다.
인생과 바꾸기에는 터무니없이 보잘것없는 보상이다.
세이브 카드라는 건 뭐지?
“세이브 카드는 말 그대로 구원의 종이야. 이것을 지니고 있으면 자신이 다음 싸움에서 졌을 때, 노예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있지. 더불어 이미 노예가 된 사람을 구원할 수도 있다네. 중요한 건 세이브 카드를 얻기 위해서는 하루에 연속 세 경기를 치러야 한다는 점이지.”
“연속으로 세 경기를 치른다구요?”
“그렇지. 데스 파이트에 초대된 나이트는 한 번의 전투에서 승리하면 그 이후의 전투는 참여하지 않고 그냥 지상으로 돌아와도 된다네. 하지만 그중에서 2회전에 나가고 싶은 이들이 있을 경우 그들끼리 2회전을, 거기서 이긴 이들 중에서 다시 3회전에 나가고 싶은 이들이 있을 경우 3회전을 연속해서 치르게 되지. 한데 만약 누군가 2, 3회전을 나가고 싶다고 했을 때, 다른 나이트들이 전부 나가기 싫다고 했을 경우엔 매드 맨(Mad man)들이 상대로 나서게 되지.”
“매드 맨이요?”
“우리나라 말로 번역하자면 광인(狂人). 전투와 살육에 미친 자들일세. 그들은 다운 타운에서 만들어낸 광전사로 늘 살의에 물들어 있지.”
이제야 알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