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일리 히어로-45화 (45/153)

데일리 히어로 045화

점점 이야기의 판이 커져 가는 느낌이다.

애초에 몰라야 할 이야기였을 수도 있다. 아니, 그게 맞는 것 같다. 하지만 이미 난 그 이야기 속에 발을 들여 놓았다. 이제는 빼지도 못한다.

“다운 타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길래 그래?”

“……데스 파이트.”

“데스 파이트가 뭔데?”

“할아버지는 데스 파이트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었어. 그것은…… 인생을 걸고 벌이는 싸움이라고.”

“그러니까 이랑이가 지금 다운 타운에 가서 그 데스 파이트라는 걸 하고 싶어 한다는 거야?”

“응.”

이랑이 이 녀석은 무슨 생각인 거야?

아직 어려서 그런가?

그래봤자 나랑 두 살 차이긴 하지만 그래도 너무 무모하다.

아직 난 다운 타운이니 데스 파이트니 하는 것들이 얼마나 위험한 건지 감이 잘 오지 않는다.

하지만 인생을 걸고 싸워야 하는 시합 같은 건 설명만 들어도 아찔한 무언가가 턱 하고 날 짓누르는 기분이다.

“다행히도 아직까지는 별일이 없었어. 이랑이는 거기에 어떻게 가야 하는지를 모르고, 할아버지도 가는 방법에 대해 알려주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나한테는 다운 타운의 커플러가 접촉해 블랙 카드를 건네고 갔다.

어떻게 된 영문일까?

아랑이도 그게 궁금한지 내 손에 들린 블랙 카드를 보며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난 일단 화제를 돌렸다.

“근데 무천도사님은 데스 파이트라는 걸 해서 늘 이겼던 거야?”

아랑이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딱 다섯 번 이기고 여섯 번째 시합에서 패하셨대.”

“그래서?”

“그다음 얘기는 안 하셨어. 대신 표정이 너무나 어두워지셨어. 난 할아버지의 그런 얼굴 처음 보는 거라서 더 묻지 못하겠더라구.”

정리해 보면, 데스 파이트는 인생을 걸고 싸우는 시합이지만, 진다고 해서 무조건 죽는 건 아닌 모양이다.

“어쨌든 할아버지가 다운 타운에 가서 데스 파이트를 진행했던 게 극천무를 오성(五成)까지 연마하셨을 때였어. 그런데 이랑이는 이제 겨우 삼성(三成)이란 말이야.”

무협 소설을 보면 가끔 저런 표현이 나온다.

어떠한 무술을 익힐 때 그 성취도에 따라 일성, 이성, 삼성 하는 식으로 나눈다.

“그런데 아직 햇병아리 같은 애가 데스 파이트에 호기심을 보이니, 할아버지는 물론이고 나랑 가족들도 다 걱정이 되는 거야.”

“그거 정말 걱정되는 일이겠다.”

아랑이의 미간이 갑자기 일그러졌다.

그녀는 날 보더니 다급히 말했다.

“지웅아, 오늘은 그냥 돌아가.”

“왜?”

“아무래도 할아버지께서 너한테 이랑이의 보디가드를 부탁하려는 것 같아. 물론 당장 뭘 어떻게 해달라는 건 아니겠지만, 이랑이가 다운 타운에 가게 되면 같이 따라가서 지켜달라…… 그런 어려운 부탁을 하지 않을까 싶어.”

“상관없어. 그냥 이야기만 듣고 그렇게 안 하면 되잖아? 차라리 내가 이랑이를 잘 타이르는 게 낫지 않을까? 다운 타운은 아직 이르다고.”

“그렇긴 하지만…….”

갈등하는 아랑이에게 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괜찮다니까. 내가 안 가면 그만인 거잖아. 이랑이의 마음도 같이 돌려놓자.”

“……응.”

“그리고 나도 무천도사님한테 여쭤볼 게 좀 많이 생겼어. 다운 타운의 사람이 어떻게 나를 알고 이런 카드를 보낸 건지, 지하 세계라는 곳은 어떤 곳인지, 사람들이 왜 인생까지 걸어가며 데스 파이트에 참가하는지.”

그리 말하는 날 아랑이는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궁금해 죽겠네. 링크를 많이 모으면 독심술 능력을 가진 영혼이 나타나 주지 않으려나?

“정말…… 궁금한 것만 묻고 말아야 돼?”

“알았어.”

아랑이는 그래도 영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로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택시 타고 가자.”

“응? 버스 타고 가도 돼.”

“버스로 가기에는 좀 애매하고 멀어. 이 동네 버스편 엉망인 거 알잖아.”

“그래, 그럼.”

나는 아랑이과 택시를 기다렸다.

분위기가 무거워지니 우리 둘 사이엔 어색함이 내려앉았다.

빨리 택시라도 잡혔으면 좋으련만, 오늘따라 왜 이렇게 안 보이는 건지.

휘이이이잉―

“우와~ 오늘 바람 엄청 세다, 그치?”

“…….”

씨, 씹혔다?!

아랑이는 입을 꼭 다문 채, 날 쳐다보지도 않았다.

모, 못 들었겠지? 그래, 못들은 걸 거야.

[일이 재미있게 돌아가는군.]

갑자기 카시아스가 복장 터지는 텔레파시를 보내왔다.

[지금 이게 재미있냐?]

[너 말고, 다운 타운이라는 세상 말이다.]

[아, 그거…….]

[지구는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야.]

[나도 놀랐다. 사실 지금도 현실감은 없어.]

[어떤 인간들이 그곳을 드나드는지 궁금하군. 기회가 된다면 꼭 가봐라.]

[……거기 가면 싸워야 한다잖아.]

[넌 어지간해선 죽지 않을 테니 걱정 마.]

[나 참.]

“아, 택시!”

카시아스와 대화를 나누는 사이 아랑이가 택시를 잡았다.

‘오오~ 아랑이와 같이 택시를? 나란히 뒷자리에 붙어 앉아서 가는 건가?’

탁.

……아랑이는 앞좌석에 앉았다.

[푸하하하하하! 잘 논다! 아랑이한테 네 존재감은 고작 그 정도인 거다. 옆에 붙어 앉을 이유가 없는 같은 반 급우!]

카시아스가 날 비웃었고, 난 조용히 뒷좌석에 올랐다.

그러자 기사님이 카시아스를 돌아보고서 질색했다.

“고양이도 같이 태우려구요?”

“아…… 네, 안 되나요?”

“아니 뭐…… 얌전히만 가면 되긴 하는데…… 그런데 그놈 참 못생겼네. 아이코, 죄송. 제가 말실수를 했네요.”

“푸하하하하! 아니요! 괜찮습니다~ 정말 더럽게 못생겼죠? 푸하하하하!”

그때 아랑이가 놀라서 날 돌아봤다.

“어머! 고양이도 같이 있었어? 나 지금 알았어.”

“푸하하하하하하하!”

뭐? 존재감이 어쩌고 저째?

[이게 네 존재감이다, 카시아스!]

[……시끄럽다.]

* * *

“여기가 우리 집이야.”

아랑이가 어마어마한 정원을 가진 대저택의 대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랑이네 집은 신숭겸 장군묘가 있는 방동리의 한적한 시골 마을에 위치해 있었다.

덕분에 택시비가 제법 나왔다.

하지만 아랑이는 전혀 개의치 않고 그 돈을 모두 지불했다.

사실 멋지게 내가 내고 싶었지만, 아랑이는 그럴 틈을 주지 않고 현금카드를 내밀었다.

아직 성인이 아닌데도 카드를 지니고 다니는 데다가 집은 엄청나게 크다.

아랑이네 경제 수준이 대충 짐작이 갔다.

‘하긴 아랑이가 먹는 걸 감당하려면 어느 정도 벌어서는 안 될 거야.’

삐이―!

아랑이가 벨을 눌렀다.

그러자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아빠~ 저예요~”

“아랑이니?”

“네.”

“우리 집엔 무슨 일이니?”

응? 이건 뭔 소리야? 우리 집? 아랑이가 부모님이랑 따로 살기라도 하는 건가?

“아빠~ 장난하지 말고 문 열어주세요.”

뭐야, 장난 친 거였어?

부모님이 자식들을 참 정겹게 대하시는구나.

“문이 열리길 원한다면 네가 가장 부끄러워하는 비밀 하나를 말하렴!”

“아빠!”

“싫으면 담을 넘든가~? 아하하하하하하!”

“아빠, 그만하세요!”

……그다지 정겨운 건 아닌가?

아, 그러고 보니 이랑이가 이런 말을 했었다.

‘어지간하면 우리 집에 놀러오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사람들이 다 별종이라…….’

지금 난 집 안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이랑이의 말을 몸소 체험하고 있었다.

“그럼 아빠는 바빠서 이만~”

부녀간의 이상한 실랑이가 마무리되려는 찰나였다.

아랑이가 다급하게 말했다.

“저, 아빠 비자금 어디에 숨겨뒀는지 다 알아요!”

“…….”

“엄마한테 말할까요?”

덜컹!

바로 문이 열렸다.

“하여튼…….”

아랑이가 툴툴대며 정원으로 들어섰고, 나도 그 뒤를 따랐다.

그러자 정원 안에 지어진 커다란 2층 저택의 현관문이 열렸다.

이어, 아랑이의 아버지일 것으로 추정되는 털보 아저씨가 맨발로 달려 나왔다.

“내 따아아아알~!”

“꺅!”

아랑이 아버지는 아랑이를 품에 안고 덥수룩한 수염을 얼굴에 마구 비벼댔다.

“엄마한테 말하지 않을 거지~?”

“알았으니까, 그만 하세요!”

“아하하하하하, 응?”

아랑이 아버지가 날 바라보며 사람 좋은 미소를 머금었다.

“누구니?”

“아, 저는 유지웅이라고 합니다.”

“우리 반 친구야, 아빠.”

“아~ 아랑이 친구?”

“네, 처음 뵙겠습…….”

“남자 친구는 용납 못해애애애애애!”

아랑이 아버지의 표정이 갑자기 바뀌었다.

흡사 악마 같은 얼굴로 날 잡아먹을 듯 노려보며 고함쳤다.

그때, 아랑이 아버지의 뒤로 누군가가 소리 없이 다가왔다.

나이가 지긋해 보임에도 곱고 구김 없는 얼굴의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아마도 아랑이 어머니인 모양이다.

“여보?”

아랑이 어머니가 나긋나긋 아랑이 아버지를 불렀다.

아랑이 아버지는 언제 그랬냐는 듯 함박 미소를 지으며 돌아봤다.

“응~ 여보~”

짝!

맙소사.

방금 아랑이 아버지 따귀 맞은 거 맞지?

“손님 앞에서 지금 뭐하는 거예요~ 손님 놀라시잖아요.”

……놀란 걸로 따지자면 어머니께서 아버지 따귀를 때릴 때 훨씬 더 놀랐습니다만.

“응~ 그랬겠다. 내가 실수했네요, 아하하하.”

아랑이 아버지는 따귀 맞은 게 아무렇지도 않은지 넉살 좋게 웃어 넘겼다.

짝!

그런데 아랑이 어머니는 반대쪽 따귀도 때리셨다.

한데 얼굴엔 여전히 포근한 미소가 드리워져 있었으며.

“앞으로 그러지 말아요. 손님이 우리 집안 꼴 잘 돌아간다고 흉보면 어떡해요, 그쵸?”

말투 또한 나긋나긋 감미롭기 그지없다.

‘……이랑이가 집에 오지 말라고 한 이유를 알겠어.’

이거 완전 문화 충격이다.

나도 모르게 턱이 쩍 하고 벌어진다.

아랑이 어머니가 나를 바라보며 더 진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랑이 친구라고 했죠?”

“네? 아, 네.”

“우리는 아무런 간섭도 안 할 테니까 편하게 있다 가요. 너무 어른 흉내 내는 행동만 하지 말구요~”

어, 어른 흉내 내는 행동?

지금 그 말씀은 설마…….

“엄마, 아빠~ 얼른 들어가세요.”

아랑이가 더 참지 못하고 두 분을 떠밀었다.

그러자 아랑이 아버지가 호탕하게 웃으며 뒤돌아서서 아랑이 어머니에게 팔짱을 끼고 저택으로 이끌었다.

두 분이 사이좋게 현관으로 들어서는 도중, 아랑이 아버지가 슬쩍 어머니의 엉덩이를 만졌고.

짜악!

따귀를 한 대 더 얻어맞았다.

“…….”

아마 지금 내 표정 상당히 넋이 나가 있겠지?

“미안, 지웅아. 놀랐지?”

“아, 아니, 괜찮아.”

“어? 그런데 고양이는 어디 갔어?”

“응?”

잠깐 정신을 놓고 있는 사이 카시아스가 사라졌다.

하여튼 신출귀몰한 놈이라니까.

“어디서 놀고 있겠지, 뭐. 걱정 안 해도 돼. 그보다 무천도사님은 어디 계셔?”

“아, 할아버지는 하루의 대부분을 도장에서 보내셔.”

“도장?”

“응, 저기.”

아랑이는 손으로 저택 옆에 조금 떨어져 지어진 커다란 목조 건물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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