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 히어로 043화
퍼퍽!
“크악!”
“어억!”
이번엔 둘째와 셋째가 얻어맞았다.
둘째는 머리가 터지고, 셋째는 허리가 기이하게 꺾였다.
그 두 사람도 첫째와 마찬가지로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넷째의 눈에 두려움이 자리했다.
녀석이 날 경계하며 주춤주춤 물러서다가 뒤로 돌아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내게서 도망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삽시간에 넷째를 따라잡아 등에 검을 꽂아 넣었다.
푹!
“컥!”
이후 마지막으로 낭아권을 시전했다.
어마어마한 속도로 날아간 주먹이 넷째의 뒷목을 가격했다.
퍼억!
“……!”
넷째가 앞으로 쓰러져 입과 코에서 피를 쏟으며 죽음을 맞았다.
단숨에 블러드 콴을 정리하고 나서 바이스를 노려봤다.
녀석에게선 좀 전까지 보이던 여유가 사라져 있었다.
사병들도 바이스의 호위를 포기하고서 무기를 내려놓고 무릎 꿇었다.
블랙 와이번 용병단이 사병과 바이스를 둘러쌌다.
하슬란이 앞으로 나가 바이스의 앞에 섰다.
“하, 하슬란…… 잠깐만! 이, 이야기 좀 하세!”
하슬란은 말없이 검을 들어 올렸다. 그대로 베어 버리면, 그걸로 끝.
과연 하슬란이 그럴 수 있을까?
2층 발코니엔 제이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다급한 발소리가 현관 너머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제이미가 정원으로 달려 나왔다.
“하슬란!”
하슬란의 시선은 여전히 바이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하슬란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소리쳤다.
“제, 제이미! 하, 하슬란을 설득해 다오! 어서!”
바이스의 말에 제이미가 눈물을 펑펑 흘리며 악을 썼다.
“빨리 베어 버려요!”
“……!”
“……!”
용병들은 또 한 번 충격에 빠졌다.
하지만 하슬란만큼은 이미 예상했던 일인 듯 고요하기 그지없어 보였다.
눈에서 이는 격동은 이 상황에 대한 혼란이 아니라 바이스를 향한 분노였다.
“내가 슬퍼할 거라고 생각하지 말아요! 저 사람이 내 양부라고? 하! 여태껏 날 성노리개로 다뤄왔어!”
……너무 충격이 커서 말문이 턱턱 막혔다.
지금 이게 다 사실이야?
“하슬란! 당신은 알고 있잖아! 그 인간을 죽이는 게 날 구하는 길이라는 걸! 여태껏 왜 망설이고만 있었는지도 난 이해하기 힘들었어! 날 사랑한다며? 그럼 훨씬 더 오래전에 그 검을 휘둘러야 했던 거 아니냐구!”
그 순간 바이스가 했던 말이 메아리처럼 귓전에서 울렸다.
‘감히 더러운 용병 따위가 내 딸을 넘봐?’
그게…… 날 말하는 게 아니었어?
하슬란을 말하는 거였어?
그럼 지금까지 난…… 나 혼자 뭐하고 있었던 거야?
제이미는 애초부터 하슬란을……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하고 있었던 거였어?
내가 태어나 접한 그 어떤 사건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무릎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털썩.
그 순간.
“어서 죽이고 날 데려가란 말이야!”
제이미의 고함과 함께 하슬란의 검이 땅으로 떨어졌다.
서걱!
“끄……!”
바이스의 머리가 목에서 뚝 떨어졌다.
애처롭게 서 있던 몸뚱이는 잘린 부위에서 피를 콸콸 쏟아내며 뒤로 넘어갔다.
하슬란이 깊이 한숨을 쉬었다.
“하슬란!”
제이미가 달려와 그런 하슬란을 끌어안았다.
하슬란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날 바라봤다.
그의 눈동자엔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그가 소리 없이 입만 오물거렸다. 내게…… 미안하다고 말하는 거야?
블랙 와이번 용병단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무거운 정적이 모두를 짓눌렀다.
‘……이제 된 거 아닌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그 던전에서 살아남았고, 통쾌하게 복수했다.
내가 제이미에게 청혼을 하지 못한 걸 빼면 그야말로 완벽했다.
하슬란의 품에 안겨서 울던 제이미가 날 돌아봤다.
그녀는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서 그저 하염없이 울었다.
풀린 다리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몸을 일으켜 저택의 정원을 걸어 나왔다.
내 등 뒤로 조금 전까지 동료였던 용병들의 시선이 따갑게 꽂혔다.
블랙 와이번 용병단은 날 거두어 기름으로써 어린 시절 내게 가장 소중했던 것, 내 목숨을 지켜주었다.
그리고 지금, 내게서 가장 소중한 것을 앗아갔다.
이제 서로에게 빚진 것은 없다.
오히려 깨끗하게 떠날 수 있을 것 같다.
‘제이미라는 여자가 한 명뿐이겠어?’
어딘가에는 그녀와 같은 이름에, 그녀와 비슷한 미소를 짓는 여인이 있겠지.
그리고 언젠가는 나와 만나겠지.
‘고마웠어, 블랙 와이번 용병단. 좋은 추억 많이 만들어줘서.’
조용히 떠나는 건 내 마지막 선물이라고 생각해.
이것으로…… 됐어.
띠링!
―‘바레지나트의 원한’ 퀘스트를 완료하셨네요~ 비록 바레지나트는 목소리도 잃고 사랑하는 여인도 잃었지만, 바이스에게 복수를 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그의 두 눈으로 감추어져 있던 진실을 확인했죠. 바레지나트는 그걸로 충분히 만족하고 있어요. 그는 진실을 모른 채 죽어 버리는 것보다, 알고 살아가는 게 더 가치 있다 말하네요. 이제 영혼의 원한을 풀어준 대가를 드려야겠죠? 선행을 쌓아 176링크가 주어집니다.
뭐? 176링크?
잠깐!
이번 퀘스트는 제법 어려웠다고!
소라스의 퀘스트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었단 말이야!
그런데 176링크라니?
소라스의 소원을 완료했을 땐 312링크나 줬으면서!
띠링!
퀘스트 종료.
일체화되었던 영혼의 기억에서 분리되어 현실로 복귀합니다.
내 자아가 바레지나트의 육신에서 분리되었다.
바레지나트는 바이스의 정원을 나와 쓸쓸하게 홀로 걸어갔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땅으로 내려앉은 붉은 노을이 그의 앞길에 붉은 융단을 깔아주었다.
바레지나트는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뒷모습은 사무치게 쓸쓸했다.
허공을 부유하던 내 의식을 환한 빛이 감싸 안았다.
엄청난 진동, 그리고 참기 힘든 메스꺼움이 몰려옴과 동시에 바레지나트의 세계는 부서졌다.
블랙 카드
“…….”
“……?”
“…….”
“아, 뭐해요? 거스름돈 빨리 안 줘요?”
“아…… 아?”
바레지나트의 세계에서 현실로 돌아온 난, 멍한 정신을 겨우 부여잡고 지금 상황을 파악했다.
내 앞엔 시종 한 갑을 들고 손을 내민 남자가 짜증스러운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난 오백 원짜리 하나를 그에게 건넨 것도, 건네지 않은 것도 아닌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었다.
‘아, 나 거스름돈 주려다가 퀘스트 수락했었지.’
“죄송합니다! 오백 원 여기 있습니다.”
내가 오백 원을 건네주니 손님은 신경질적으로 그것을 받아 편의점을 나갔다.
“하아.”
난 카운터 한편에 숨겨놓은 작은 간이 의자에 앉아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카시아스가 그런 내 무릎에 뛰어올랐다.
“고생했다.”
“이거 정말…… 영혼들이 내주는 퀘스트 한 번 하고 나면 진이 다 빠지는 기분이야.”
그런데 여기서 질문.
“이번엔 176링크밖에 받질 못했어.”
“저번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군.”
“이상하잖아? 퀘스트 자체는 이번 것이 더 어려웠는데?”
“네가 현실에서 쌓는 선행의 기준처럼 그것도 다른 기준이 존재하는 것이겠지.”
“하아, 선행의 기준도 운이 따라주는 바람에 겨우 알아낸 건데, 이건 또 어떻게 알아내냐.”
“몇 번 더 하다 보면 감이 잡히겠지. 너무 고민하지 마라.”
그게 문제라는 거야.
솔직히 영혼들이 주는 퀘스트는 별로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정신이 나가 버리는 것 같다고, 씨팔.
……씨팔? 내가 지금 씨팔이랬어?
“미치겠네. 바레지나트의 말버릇이 옮겨 온 모양이야.”
“후유증이다. 바레지나트에게 완전히 동화되어 살았었으니, 그럴 법도 하지.”
“설마 이 후유증 평생 가는 건 아니겠지?”
“그건 모르는 일이지. 그러지 않기를 바랄 수밖에.”
“희망적인 얘기는 하나도 안 해주는구나. 마인드 탭.”
이름 : 유지웅
소속 : 지구, 대한민국
성별 : 남
나이 : 19
영력 : 9/9
영매 : 8
아티팩트 소켓 2/2
보유 링크 : 201
흠, 보유 링크가 201이라.
지금 살 수 있는 건 레퓌른의 영혼뿐이네.
하지만 수 속성 초급 마법은 배워봤자 당장 써먹을 곳도 없을 테고.
일단은 링크를 더 모으는 게 낫겠다.
오늘도 열심히 선행하자!
* * *
밤 열 시.
유주 누나가 헐레벌떡 편의점 안으로 들어왔다.
“미안~! 늦었어!”
“지금 정각이니까 아직 안 늦었어요~”
유주 누나는 어느새 유니폼을 걸치고서 매장에 나왔다.
“휴~ 그럼 세이프인가?”
“네.”
난 유주 누나의 얼굴을 살폈다.
하지만 딱히 뭔가 고민이 있는 듯한 얼굴은 아니었다.
“왜?”
“네?”
“왜 그렇게 내 얼굴을 빤히 봐? 뭐 묻었어?”
“아니요. 그냥 봤어요.”
“싱겁기는. 근데 너 요새 계속 몸이 좋아지는 것 같다?”
유주 누나가 말을 하며 내 배를 쿡 찔렀다.
무방비 상태에서 기습 공격을 당했다. 그런데.
“꺅!”
유주 누나가 날 찌른 손가락을 후후 불었다.
“후~ 후~”
“누나, 괜찮아요?”
“너 배에다가 뭐 솥뚜껑이라도 넣고 다니니?”
“아니요.”
“근데 왜 이렇게 딱딱해?”
아이언 스킨 때문이다.
강철 같은 피부를 손가락으로 확 찔렀으니 아플 만도 하지.
“그러게 왜 장난을 치세요.”
“무슨 운동을 어떻게 하면 몸이 이렇게 딱딱해지는 거야? 완전히 빨래판 복근 만든 거야?”
“아니 뭐…….”
내가 난감해하고 있을 때, 편의점 문이 열리며 진호 형이 들어섰다.
진호 형은 유주 누나와 야간 알바를 같이 하는 형이다.
만날 기본이 10분 지각인데 오늘은 어쩐 일이래?
“어? 빨리 왔네요?”
유주 누나의 말에 진호 형은 그저 고개만 끄덕하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유니폼을 입고 나온 진호 형이 카운터에 와서 섰고, 나는 유니폼을 벗어 사무실에 두었다.
“그럼 저 가볼게요.”
“그래, 지웅아. 잘 가~”
점장님은 요즘 유주 누나한테 무슨 걱정거리가 있는 것 같다 말했지만, 나는 잘 모르겠다.
누나가 워낙 티를 안 내니 원.
그렇다고 누나를 붙잡고 무슨 일 있는 거 아니냐고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다.
본인이 감추고 싶어 하는 걸 굳이 캐묻는 건 실례다.
내겐 지론이 하나 있다.
사람이 손을 내밀지도 않았는데 조언을 하는 건 괜한 간섭이고 잔소리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경 끄고 식당이나 가자.
* * *
목요일.
드디어 수능 날이 되었다.
새벽부터 일어나 나갈 채비를 하고서 수능 시험장으로 향했다.
수능 시험을 보는 지정 학교 입구에서는 고2 학생과 부모님들이 나와서 따뜻한 차를 나눠주고 있었다.
시험장으로 향하는 학생 중 반 이상은 가족과 함께였다.
나는 당당하게 혼자서 교실로 들어섰다.
어차피 내겐 수능이라는 것이 크게 의미가 없었다.
좋은 점수 받아서 대학을 갈 것도 아니고, 애초부터 공부로 무언가를 하겠다는 포부도 없었다.
“흐아아암~ 대충 찍고 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