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 히어로 039화
“어렵사리 내게 말한 유주의 고민을, 남에게 쉽사리 말하는 건 의리가 아니야! 난 말하지 않겠어! 유주에게 직접 물어봐라. 그것이 사나이가 정면 승부 하는 법! 여인을 대하는 예의!”
“아, 네. 그렇게 할게요. 그런데 그 고민이라는 게 많이 무거운 건가요?”
“아무래도 그렇겠지! 남녀 관계라는 건 늘 어려운 문제이며, 인륜지대사이니!”
“남녀 관계? 누가 유주 누나한테 고백이라도 했대요? 아니면 유주 누나가 누굴 좋아한대요?”
“어, 어험! 나, 난 모르는 일이야! 아무 말도 안 했어!…… 유주에게 말하지 않을 거라고 믿는다! 내 입은 진실을 단속하는 데 너무 취약하다! 하지만 너는 나와의 의리를 지켜줘야 돼!”
“네, 알았어요.”
“그럼 난 바쁜 일이 있어서 이만!”
점장님은 유니폼을 벗고 후다닥 매장을 나섰다.
하여튼 단순하다니까.
그나저나 유주 누나한테 무슨 고민이 있는 걸까?
갑자기 궁금해졌다.
무엇보다 유주 누나는 모태 솔로이기에 더욱 궁금했다.
여태껏 유주 누나에게 고백을 해오는 사람은 많았다.
누가 봐도 예쁜 얼굴이고, 잘 웃어주니까 섣불리 다가와 고백했다가 차인 남자가 수두룩하다.
그리고 유주 누나는 누군가 자신에게 고백했다 차인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번엔 유주 누나의 마음에 누군가가 들어오게 되어 버린 건가? 그게 아니고서야 연애 문제로 유주 누나가 힘들어할 리 없을 텐데 말이다.
‘모르겠다. 이따 오면 은근슬쩍 물어봐야지.’
어쩐지 요새 교대할 때마다 평소와 달리 조금 무거워 보이더니, 그런 고민이 있었군.
딸랑.
편의점 문이 열리고 손님이 들어왔다.
2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였다. 그가 카운터로 다가와 말했다.
“시종 한 갑 주세요.”
“네~”
‘담배나 술을 팔 때마다 좀 찝찝하단 말야.’
아직 내 나이 열아홉이다.
이제 곧 졸업을 할 테고 두 달만 더 지나면 성인이 되긴 하지만 술, 담배를 살 수 없는 나이인 내가 편의점 알바를 하면서 그것들을 팔고 있으니 자주 위화감이 들곤 한다.
점장님이 착하셔서 부모님 동의서를 받아 온 덕분에 알바를 시켜주긴 했지만 찝찝한 느낌은 지울 수가 없다.
삑.
스캐너로 찍은 담배를 손님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이천오백 원입니다.”
그런데 그때였다.
바레지나트의 원한이 발동했습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Yes/No]
어? 이건 또 뭐야?
‘바레지나트의 원한? 소라스의 소원처럼 영혼이 주는 퀘스트가 발동된 건가?’
이거 수락을 해야 돼, 말아야 돼?
수락을 해서 퀘스트를 완수할 경우 저번처럼 제법 많은 링크가 들어오겠지만, 실패하면 바레지나트의 힘을 잃게 된다.
바레지나트의 영혼이 내게 준 힘은 뛰어난 민첩성과 근력이다.
‘일단 영혼이 내게 퀘스트를 던졌다는 건, 내가 그것을 수행할 수 있을 거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일 텐데.’
문제는 소라스의 소원에서도 그랬듯이 내가 퀘스트를 해결할 수 있을지 없을지를 판단하는 건 순전히 영혼 개인의 잣대라는 점이다.
그들의 판단이 틀렸을 땐 퀘스트는 실패하고 영혼의 힘은 영구적으로 소멸된다.
‘이거 해야 돼, 말아야 돼?’
난 카운터 아래에서 잠들어 있는 카시아스를 슬쩍 바라봤다.
녀석은 내게 관심을 완전히 끊어 버린 채 축 늘어져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여기요.”
담배를 건네받은 손님이 3,000원을 내밀었다.
그것을 받고 오백 원을 거슬러 주기 위해 손을 내밀었는데.
팅―
“……어?”
내민 손의 위치가 하필이면 ‘Yes’와 같았고, 내 의지와 상관없이 퀘스트를 수락하고 말았다.
화아아아아악!
환한 빛이 일어 시야를 가리더니 이내 내 몸 전체를 잡아먹었다.
이윽고 전신에 커다란 진동이 일었다.
‘으윽! 이건 정말 질색인데!’
롤러코스터를 타고 계속해서 밑으로 떨어지는 느낌.
토할 것 같은 울렁거림.
그 환영 못 할 기분을 한참 동안 느끼던 어느 순간, 갑자기 빛이 사라졌다.
* * *
“후우우.”
절로 한숨이 나왔다.
이건 내 의지가 아니다.
바레지나트의 원한을 수락하려 했던 게 아니란 말이다.
그런데 실수로 수락해 버렸고, 이제는 돌이킬 수 없었다.
지금 난 어느 차가운 벽에 등을 대고 앉아 있는 것 같았다.
눈은 감긴 채였다.
이 눈을 뜨기가 두려웠다.
띠링!
―바레지나트의 원한 퀘스트를 수락하셨네요. 지금부터 지웅 님은 바레지나트의 세상을 가상 체험하게 될 거예요. 지웅 님 본인이 바레지나트가 되어서요.
젠장, 또 한 번 거지 같은 체험을 해야 하겠군.
―바레지나트의 기억을 인스톨할게요. 아시죠? 조금 어지럽다는 거.
여인의 음성이 끊어지자마자 바레지나트의 기억들이 강제로 흘러들어 왔다.
‘우리가 누구냐! 블랙 와이번 용병단이다! 블랙 와이번은!’
‘전장에서 죽고, 전장에서 산다!’
‘람차크! 일거리 또 없어? 쉽고 비싼 걸로. 알지?’
‘고블린 토벌 어때? 너희들 고블린 토벌 전문 용병단이잖아. 이참에 용병단 이름도 그냥 바꾸지 그래? 고블린의 저주로.’
‘이번 일 끝나면 난 제이미에게 청혼할 거요!’
‘푸하하하하! 엉덩이 걷어차이지나 마라, 바렌!’
‘어? 입구가 막혔어!’
‘미쳤어…… 사방이 트랩 투성이야.’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고블린 소굴이라더니!’
‘고블린 소굴이 아니야…… 여긴 던전이야.’
‘다들 끝까지 살아남아라! 허락 없이 죽지 마!’
‘모두 죽었어…… 대장.’
‘그래도 너는 살았잖냐, 바렌. 이제 이 지긋지긋한 던전도 끝이다.’
‘단장! 황금 상자야!’
‘고생 끝이 복이 온다더니! 바레지나트! 네 실력이 거지 같은 건 알고 있겠지? 그런데 끝끝내 너만 살아남았다 이거야! 그러니 내 곁에 딱 달라붙어 있어라. 네 운 끌어다가 나도 써야겠다. 너랑 붙어 다니면 절대 안 죽겠지? 게다가 황금 상자까지 발견했잖냐? 안에 뭐가 들어 있을까? 당연히 금은보화겠지! 저걸 챙겨서 어떻게든 밖으로 나간다!’
‘……안 죽는다며. 뭐야, 이게…… 나…… 나 이번 일만 끝나면…… 제이미에게…….’
띠링!
―바레지나트는 던전에서 살아 돌아가 제이미에게 고백하고 싶어 해요. 불행하게 끝나 버린 바레지나트의 인생을 장밋빛으로 만들어줄 자신 있으시죠? 바레지나트의 인생이 본격적으로 망가지기 시작한 시점으로 보내 드렸으니, ‘소라스의 소원’ 퀘스트 때보다는 주어진 시간이 많네요? 하지만 그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거~ 명심하세요. 부디 건투를 빌겠어요~
“으윽…….”
머리가 지끈거린다.
난 주마등처럼 밀려들어 온 기억들을 정리해 봤다.
바레지나트…… 나는 천애고아다.
난 고아원에서 지내던 청소년 시절, 블랙 와이번 용병단 단장 하슬란의 손에 거두어졌다.
자연스레 블랙 와이번의 일원이 되어 그 안에서 검술을 배우며 자라났다.
블랙 와이번 용병단은 비록 큰 용병단은 아니지만 끈끈한 정으로 엮인 32명의 용병이 가족처럼 지내고 있었다.
단장 하슬란은 분에 넘치는 일은 맡지 않았다.
모두 블랙 와이번 용병단이 무난히 해결할 수 있는 일만을 맡아왔다.
그는 자신의 동료들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아꼈다.
이번에도 그가 길드 마스터 람차크에게 물어 온 일은 어렵지 않은 것이었다.
고블린 토벌.
그것은 우리 용병단이 늘 해오던 일이었다.
고블린들이 그다지 강하지 않은 몬스터이기도 했고, 무리를 지어 살긴 하지만 대규모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녀석들은 늘 땅속에 굴을 파서 생활한다.
우리는 그 굴속으로 쳐들어가 고블린 부족의 씨를 말려 버리곤 했다.
이번에도 그런 간단한 일일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굴속으로 들어가자마자 입구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었다.
폭발에 휘말린 우린 먼지 구덩이에 처박혀 기절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세 명의 용병이 죽어 있었고, 열이나 되는 용병이 치명상을 입었으며, 입구는 막혀 버렸다.
하슬란 단장은 어떻게든 치명상을 입은 이들을 살리려 애썼다.
그러나 그들은 다 하루를 버티지 못하고 죽어 버렸다.
하슬란은 죽어 버린 동료들의 시체를 바라보며 소리 죽여 울었다.
나도 그 모습을 보며 울다 지쳐 잠깐 잠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 다시 정신이 들었다.
눈을 떴다.
벽에 걸어놓은 횃불 몇 개만이 어두운 동굴 안을 겨우 밝히고 있었다.
하슬란은 더 이상 울지 않았다.
그는 어두운 얼굴로 떠날 채비를 했다.
“가자.”
그의 명령에 우리는 횃불을 챙기고 짐을 정비해 걸음을 옮겼다.
슬픔에 빠져 아무것도 못하면 이대로 모두가 죽는다.
살아야 했다.
‘이 좆 같은 곳에서 반드시 살아 나간다.’
가슴속에서 울화가 치밀었다.
유지웅으로 살아갈 때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그런 지독한 감정들이 뒤섞여 화산처럼 폭발했다.
이건 바레지나트의 삶이 내게 전하는 감정이다.
이 던전에서 내 사지는 조각조각 찢겼다.
뱃가죽이 터지고 내장이 튀어나왔다.
그걸 내 눈으로 확인하면서도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짧은 시간 지옥 같은 고통이 밀려드는가 싶더니 눈앞이 어두워졌다.
‘씨발! 개 엿 같은!’
더러운 기억이 떠올라 몸을 떨며 속으로 욕을 뱉었다.
‘반드시 살아, 반드시! 용병은! 나 바레지나트는 전장에서 죽고, 전장에서 산다!’
이미 한 번 겪어봤던 삶.
어디에 어떤 트랩이 설치되어 있는지, 어떤 몬스터들이 습격하는지 모두 알고 있다.
게임으로 치자면 치트키를 쓰고 플레이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난 앞서 가던 하슬란에게 다가가 말했다.
“단장, 내가 앞장설게.”
“바렌?”
하슬란이 탐탁찮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빨리 죽고 싶으면 네 손으로 모가지 따. 나한테 이런 식으로 부탁하지 말고.”
“살려고 그러는 거야.”
“안 돼.”
“안 죽을게, 젠장!”
짜악!
하슬란이 내 뺨을 그대로 후렸다.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있었지만 난 그것을 그냥 맞았다.
하슬란이 노한 얼굴로 날 노려봤다.
“내게 얼마나 많은 죗값을 더 얹어주려고 이 짓거리야, 이 빌어먹을 새끼야!”
“안 죽는다고.”
“꺼져, 씨팔. 꼴도 보기 싫으니까.”
하슬란이 몸을 돌리려 했다.
난 그런 하슬란의 멱을 잡아 내 쪽으로 되돌렸다.
그와 동시에 하슬란이 주먹을 날렸다.
하지만 난 그것을 손으로 막아냈다.
턱!
“……!”
하슬란의 놀란 시선이 내 얼굴과 내 손에 막힌 그의 주먹을 오갔다.
“믿어봐. 나뿐만 아니라 살아남은 식구들 어느 누구도 안 죽게 할 테니까.”
“안 된다고 몇 번을……!”
난 오른손을 내 왼쪽 가슴에 대고 하슬란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러자 하슬란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내가 태어나서, 아니 블랙 와이번 용병단이 된 이후 처음으로 보여준 영혼의 맹세일 것이다.
내 모든 것을 걸 테니, 부디 나를 믿어달라는 블랙 와이번 용병단의 제스처.
하슬란은 한참 동안 날 바라보고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