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 히어로 028화
골드바는 보증서가 있어봤자 법적인 효력이 발동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건 골드바에 찍힌 각인이다.
각인의 기본 사항은 상호, 로고, 중량, 순도, 인증 기관 마크 등이다.
간혹 시리얼 넘버까지 찍혀서 나오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아무튼 내가 소울 스토어에서 산 이 골드바는 각인은커녕 어떠한 문양도 그려지지 않은 순수한 100g짜리 골드바다.
“이거 어디서 구하셨나요?”
“우리 아버지 유품이에요.”
미심쩍어하는 사장님의 물음에 상덕이 어머니가 말했다.
“아~ 그러시구나. 그런데 유품을 이렇게 팔아도 되나요?”
“당장 굶어 죽게 생겼는데 그럼 어쩌겠어요.”
“음…… 혹시 따로 문제 있는 물건은 아니죠?”
“정 의심되면 다른 데로 가보구요.”
“에이~ 사모님도. 제가 언제 의심했다 그러세요? 그냥 형식과 절차상 여쭤본 거지.”
그러더니 사장님은 골드바를 전자저울에 올려보고 돋보기로 한참 살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24K는 맞는 것 같은데 각인이 없으니 제대로 된 값 쳐주기는 힘들어요.”
사장님은 지금 각인이 없는 대신 위험부담을 할 테니 가격을 좀 합의하자는 말을 돌려 하고 있었다.
상덕이 어머니도 그 정도는 알아들었을 것이다.
“최대한 잘 쳐줘 봐요.”
상덕이 어머니가 아줌마 특유의 넉살을 부리며 밀어붙였다.
“음…… 요즘 금 매매 시세가 살 때는 한 돈에 십칠만 원, 팔 때는 십육만 원 정도 해요. 그럼 백 그램이니까 사백십만 원 정도 되는데…… 각인이 없으니 이대로 받아서 다른 손님에게 파는 건 무리라서, 가격이 조금 더 깎이는 건 이해해 주셔야 돼요.”
“얼마까지 해주실 건데요?”
“생각하신 금액 있으세요?”
“그걸 내 입으로 잘못 말했다간 호구되는 거 아닌가요?”
상덕이 어머니가 씩 웃었다.
그러자 사장님도 전보다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둘 다 웃고 있었지만 그 사이에선 팽팽한 기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결국 사장님이 먼저 가격을 제시했다.
“삼백이십 정도면 어떨까요?”
“근처 금은방 발품 팔면 그것보단 더 받을 것 같네요. 가자, 얘들아.”
“잠시만요! 전 그냥 제시를 해드린 것뿐이에요. 마음에 안 드시면 협상을 하시면 되죠~ 급하시긴.”
“합리적으로 해주세요, 사장님.”
“그럼요~ 사모님. 음…… 좋아요, 삼백오십 드릴게요.”
그 정도면 나쁘지 않다.
상덕이 어머니가 슬쩍 날 바라봤고,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상덕이 어머니가 입을 열려는 찰나.
딸랑.
가게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섰다.
“엄마~ 나 왔어.”
응? 근데 목소리가 낯설지 않다.
사장님을 엄마라 부르며 내 옆을 휙 지나가던 붉은 머리 여인이 우뚝 멈춰 서서 뒤를 돌았다.
그리고 나를 바라봤다.
“어……? 너…… 유지웅?”
놀란 얼굴로 내 이름을 부르며 다가오는 그녀는 박인비였다.
양아치 남친 사귀다가 봉변당할 뻔한 걸 내가 구해주는 바람에 무사히 넘어간 쿨한 여인.
“완전 신기해~! 완전 반가워! 여긴 어쩐 일이야?”
연락하겠대 놓고 여태껏 연락이 없더니 금은방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기에 나도 신기했다.
“금은방에 뭐 하러 왔겠어?”
“금 사러 왔어? 팔러?”
“팔러. 그런데 방금 사장님한테 엄마라고 했어?”
“응! 여기 우리 엄마 가게야. 아, 너도 어머니랑 같이 왔구나!”
인비가 내 팔에 착 달라붙더니 상덕이 어머니를 보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지웅이 어머니~! 박인비라고 해요. 보시다시피 여기 사장님 딸이구요~ 지웅이랑은 말 못할 비밀을 간직한 사이에요. 이제 보니 지웅이가 어머니 닮아서 미남이었네요~! 그런데 옆에 걔는 누구예요? 동생이에요? 몇 살? 근데 동생은 형 미모를 못 따라가네요~ 호호호호.”
……얘를 어쩐다냐.
상덕이가 입을 쩍 벌렸고 상덕이 어머니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기, 아가씨? 지웅이는 내 아들이 아니고, 지웅이보다 못생긴 얘가 내 아들인데? 그리고 내 아들은 나 닮았다는 얘기 많이 듣고.”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인비는 상황을 인지한 모양이었다.
“어머, 그러세요? 죄송해요~ 제가 실수했네요. 하긴 조금 말이 안 되는 유전자 조합이긴 했어요, 그쵸?”
“…….”
이제 상덕이 어머니는 미소마저 사라졌다.
상덕이는 거의 울 듯한 얼굴이었다.
그 광경에 인비의 어머니, 금은방 사장님이 어쩔 줄 몰라 했다.
“이, 인비야! 너 그게 무슨 경우 없는 얘기니?”
“왜? 내가 뭐 이상한 말 했어?”
인비는 성격만 쿨한 게 아니라 눈치까지 없다.
상덕이 어머니가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 것 같은 얼굴로 사장님을 노려보며 말했다.
“못생긴 아들 둔 엄마가 팔러 온 골드바를 얼마까지 쳐준다구요?”
사장님이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대답했다.
“제, 제가 사백만 원이라 그랬었죠?”
“당장 현금으로 주세요!”
“네, 네.”
의외의 복병으로 인해 결국 신경전은 상덕이 어머니의 승리였다.
* * *
어떻게 보면 인비의 도움을 받은 건가?
그녀가 눈치 없이 막 행동하는 바람에 우리는 결국 골드바를 사백만 원에 팔 수 있었다.
지금은 근처 분식집에 와서 상덕이와 상덕이 어머니, 나, 그리고 필사적으로 우리를 쫓아온 인비, 이렇게 넷이 모여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원래는 상덕이가 우긴 대로 스테이크라도 사줄 생각이었지만 상덕이 어머니가 한 푼이 아쉬운 마당에 그건 안 될 소리라며 분식점으로 우릴 이끌었다.
테이블엔 떡볶이와 내장이 가득 섞인 순대, 김밥, 튀김, 그리고 음료수가 놓여 있었다.
상덕이는 상당히 허기졌었는지 한 상 가득한 분식에 정신을 반쯤 놓고 있었다. 나머지 정신 반은 인비의 얼굴을 힐끔힐끔 훔쳐보는 데 소모하고 있었다.
상덕이 어머니는 떡볶이 국물에 순대를 찍어 드시면서 인비를 못마땅하게 바라봤다.
무려 두 사람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고 있는데도, 인비는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하며 내게 말을 걸었다.
“운명이라는 걸 믿어? 난 별로 믿지 않았는데, 어쩌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아까 했어. 하고 많은 금은방 중에 어떻게 네가 우리 가게에 들어올 수 있겠어? 게다가 그거 알아? 나 엄마 가게 잘 안가. 오늘은 용돈 떨어져서 좀 뜯어내러 간 거였거든. 그런데 거기서 너랑 딱 마주치다니. 진짜 신기하지 않아?”
“그냥 우연이야.”
“우연에 우연이 겹치면 운명이라는 말 몰라?”
어디서 주워들은 건 있어가지고.
“운명이라는 걸 너무 막 갖다 붙이지 마.”
“하여튼 뻣뻣하기는.”
“그보다…… 아니다.”
“뭐? 물어봐.”
하마터면 말실수할 뻔했네.
빨리 딴청이나 부리자.
“아니야. 밥이나 먹어. 상덕아, 천천히 먹어라. 음료수도 좀 먹으면서. 체하겠다.”
난 상덕이를 챙기면서 떡볶이며 튀김, 순대들을 마구 집어 먹었다. 신기한 것은 리조네의 절대미각이 음식들을 먹는 순간 그 안에 들어간 재료들을 귀신 같이 알아맞힌다는 것이다.
분식에 들어간 재료와 조미료 중 내가 못 먹어본 것은 없었다. 집에 가면 똑같이 만들 자신이 있었다.
“상덕이 다 챙겼으면 이제 말해봐.”
“뭘?”
“나한테 하려던 말.”
“그런 거 없어.”
“아~ 알겠다. 너 그거 물어보려 그랬지?”
“그거?”
“왜 전화 안 했냐고. 맞지?”
“…….”
인비는 쿨한 데다 눈치가 없는 줄 알았다.
그런데 왜 이런 눈치는 이토록 빠른 걸까?
인비의 포크가 떡볶이 떡 세 개를 한 번에 찍었다.
“사실 전화번호 딴 날 저녁에 바로 연락하려고 했었거든? 그런데 괜히 기다리고 싶더라. 네 연락.”
“좋겠다.”
인비의 얘기에 상덕이가 느닷없이 말했다.
그에 인비와 내가 녀석을 쳐다봤다. 상덕이는 인비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화들짝 놀라 열심히 숟가락질을 해댔다.
……상덕아, 네가 숟가락으로 떠먹고 있는 거 음료수다.
저 녀석 아무래도 인비에게 빠진 모양이다.
하긴, 얼굴만 놓고 보면 인비도 상당한 미인이다.
상덕이가 빠질 만도 하다.
“앞으로도 연락할 일 없을 테니까 기다리지 마.”
“응. 그러려고.”
응? 의외로 말이 통하네?
“오늘 그것보다 더 놀라운 일을 경험했잖아. 너와 내가 운명적으로 만났다고. 그런데 연락 기다릴 필요 뭐 있어? 앞으로는 내가 하고 싶을 때마다 할 거야.”
……그럼 그렇지.
애초에 대화가 통할 인물이 아니었다.
“아무튼 오늘은 밥만 먹고 돌아가. 하루 종일 할 일이 많아.”
“나도 밥만 먹으러 온 거야. 엄마한테 용돈 한 푼이라도 더 받으려면 열심히 일 도와주는 척이라도 해야 하거든.”
열심히 도와주는 척이라니.
내가 저런 딸을 낳으면 속 뒤집어져서 못 살 거야.
“아, 그리고 앞으로 우리 가게에 뭐 팔거나 사러 올 일 있음 맘 편하게 와. 괜히 친구네 아주머니 모셔 오지 말고.”
“엉? 그걸 어떻게 알았어?”
“아주머니가 금 판 돈, 밖에 나오자마자 너한테 다 줬잖아.”
역시 눈치가 빠른 게 맞는가 보다.
“내가 엄마한테 잘 말해놓을게. 너한테는 돈 후려칠 생각 말라고.”
“네가 말해놓으면 어머니가 그래~ 알았다~ 하셔?”
“아니~ 혀 깨물고 죽어 버리는 꼴 보기 싫으면 그렇게 하라고 협박해야지. 그럼 들어줘. 어쩔 거야? 딸이 죽겠다는데.”
인비는 해맑게 웃으며 엄청난 소리를 해댔다.
그 바람에 나를 포함한 나머지 세 사람은 넋 빠진 얼굴로 그녀가 밥 먹는 것을 바라만 보게 되었다.
인비가 그런 우리 셋을 번갈아 보다가 뺨에 한 손을 대며 예쁜 척을 해댔다.
“내가 그렇게 예뻐요?”
“……네.”
상덕이가 대답했고.
“밥이나 처먹어!”
따악!
“악!”
상덕이 어머니가 녀석의 정수리를 가격했다.
아이고, 이런 아침은 내가 그린 그림이 아닌데!
* * *
분식집에서 나오자마자 봉변을 당했다.
니야오오옹! 하아악!
“으아악!”
이 미친 똥고양이가 기다렸다는 듯 날아올라 발톱으로 내 얼굴을 할퀸 것이다.
그러고서는 날 한 번 째려본 뒤.
[혼자서 맛있는 거 처먹으니 좋냐?]
라고 텔레파시를 보내더니 사라졌다.
놀란 인비가 내 뺨을 감싸더니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지웅아! 괜찮아? 어머어머, 얼굴에 발톱 자국 그대로 났어! 피 나잖아! 흉 지겠다, 어쩌니? 이 잘생긴 얼굴에…….”
걱정을 하던 인비의 입꼬리가 슬슬 위로 올라갔다.
“아니다. 얼굴에 이런 상처 생기면 그것도 섹시하겠다.”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난 인비의 손을 뿌리치고 약국부터 찾았다.
* * *
졸지에 얼굴에다 반창고를 덕지덕지 붙인 채로 인비와 작별을 했다.
이후 우리 셋은 상덕이네 집으로 향했다.
상덕이네 집 냉장고는 이미 무뼈 국물 닭발의 숙성 양념들로 가득했다.
상덕이 어머니는 그중 오 일 전에 새로 만든 양념 소스를 꺼냈다.
뚜껑을 열고 붉은 양념 소스를 바라보며 우리 셋은 긴장했다.
그 양념 소스는 기존과 달리 들어가는 과일의 비율 배합을 다시 조정해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