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 히어로 025화
이때 난 너한테 충동적으로 키스했었지.
바보 같게도, 당시에는 네 진짜 마음을 몰랐으니까.
마음을 갖지 못한다면 몸이라도 갖자는 심보였나 봐.
하지만 지금 너한테 할 키스는 의미가 달라.
이건 아직 덩치만큼 머리가 덜 자란 남자였을 때와는 다른 의미의 키스야.
네 마음을 이해하고 어루만져 줄 수 있는 진정한 남자로서 네게 보내는 키스야.
내 입술이 율리아의 입술에 닿았다.
촉촉하고 따뜻하고 포근했다.
율리아의 놀란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반대로 나는 눈을 감았다.
살아생전 난,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럴 수 없었지.
바로.
“이거 내가 말도 안 되는 장면을 목격했군.”
저 재수 없는 목소리로 인해서.
율리아는 내가 키스를 했을 때보다 더 놀라 날 거칠게 밀어냈다.
그다음에 그녀는 내 뺨을 날렸지.
이번에도 역시 율리아는 내 뺨을 때리려 했다.
하지만 이를 고스란히 맞아줄 생각은 없었다.
그게 다 연극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탁.
율리아의 손목을 낚아챘다. 그리고 그대로 잡아당기며 벌떡 일어섰다. 율리아가 졸지에 내 품에 폭 안긴 꼴이 되었다.
난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율리아는 ‘너 미쳤냐?’는 시선으로 날 올려다봤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진짜 미쳤어, 너한테.”
그러니까 레이브란데와 계약을 맺고서 내 마지막 기억을 바꾸려고 한 거지.
“소라스…….”
놀란 율리아를 의자에 앉혔다.
“여기서 구경해.”
내가 말하자 맥케니언이 바로 말을 이었다.
“그래, 율리아. 구경하라고. 너한테 치욕을 안겨준 남자가 내 칼에 죽는 꼴을 말이야.”
맥케니언이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율리아의 성격에 그걸 가만히 보고 있을 리가 없다.
“팰렌 기사님! 그러실 필요 없어요! 사람이 벌레가 발등을 밟고 지나간다고 화를 내나요? 소라스는 저한테 그런 존재예요!”
아무리 그래도 날 벌레와 동급 취급하는 건 좀 심했다.
맥케니언은 율리아의 말에 나와 그녀를 번갈아 보더니 미소 지었다.
한데 그 미소는 대단히 섬뜩했다.
그의 입은 웃고 있었으나 부릅뜬 두 눈엔 점점 분노가 차오르고 있었다.
“이거…… 내가 방금 놓칠 뻔한 걸 알아챘는데. 너희 두 사람…… 이미 서로를 아끼고 있군.”
율리아의 가슴이 철렁했을 것이다.
하지만 난 아무렇지도 않다.
어차피 처음부터 밝힐 생각이었으니까.
맥케니언이 검을 뽑아 들었다.
그가 살기 어린 시선으로 날 주시하며 말했다.
“감히 내가 침 흘린 여인에게 손을 대?”
“사람이 물건입니까?”
“물건이 아니니까 문제지.”
“율리아는 당신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나와 같이 살게 되면 좋아하게 될 거야.”
“헛소리 집어치우시죠.”
“지금 네 죄명은 귀족 모독이라는 걸 알고 있나?”
“귀족 모독은 즉결 처형 가능하다 그랬나요? 이미 죄 지은 거 좀 더 지어도 되겠네요, 그럼. 어떤 욕을 얻어 잡숫고 싶으십니까?”
내가 완전히 막가자는 식으로 나오니 맥케니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노보다 의문이 더 커진 모양이다.
“……제정신인가?”
맥케니언은 그 의문을 입 밖으로 내놓았다.
“당신보다는.”
나도 재치 있게 받아쳤다.
맥케니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서 크게 소리쳤다.
“너한테는 즉결 처형 따위 어울리지 않는다! 그토록 편한 죽음을 선사할 수야 없지! 밖으로 나와라! 나 맥케니언 팰렌! 팰렌 가문의 명예를 걸고 네게 결투를 신청한다!”
“……진심이십니까?”
“두 번 말하지 않는다!”
맥케니언은 소리를 빽 지르고서 여관 뒤뜰로 나갔다.
나도 그 뒤를 따랐다.
전생에서도 맥케니언은 내게 결투를 신청했었다.
귀족이 평민에게 결투를 신청할 경우, 그 순간부터 전투가 끝날 때까지 둘 사이의 신분 차는 사라진다.
그리고 평민은 정정당당한 시합 속에서 본의 아니게 귀족을 죽일 수도 있다.
이 경우 법적으로 평민을 어찌하지 못한다.
결투라는 것은 그 안에서 독립된 법칙만을 지킬 수 있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 결투를 맥케니언이 내게 신청했다.
* * *
맥케니언과 나는 서로를 마주 보며 뒤뜰에 섰다.
콰르릉!
한 자락 번개가 떨어졌고, 공간이 하얗게 물들었다가 이내 어두워졌다.
맥케니언이 평민인 날 즉결심판에 처하지 않고 굳이 결투를 신청한 이유는 지금과 똑 같았다.
내게 조금이라도 더 고통스러운 죽음을 주기 위해서였다.
맥케니언이 검을 들었다. 검끝이 나를 향했다.
그런 맥케니언에게 난 한마디를 했다.
“만약 이 시합에서 제가 그쪽을 이기더라도, 아니…… 혹 도가 지나쳐 죽이더라도 모든 것은 결투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걸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일은 없을 테니 네 모가지나 잘 간수하지?”
“오시죠.”
내가 도발하자마자 맥케니언은 매섭게 달려들었다.
타이밍이 기가 막히게도 그 순간.
콰르릉!
또 한 번 번개가 쳤다.
찰나지간 지척까지 다가온 맥케니언이 검을 찔러 넣었다.
그 움직임은 깔끔했고, 빨랐다.
사실 지금 내 육신이 제법 강해졌다 하더라도 맥케니언을 상대로 필승을 장담하긴 어려웠다.
그는 노련한 기사고, 전투 경험이 많다.
그에 반해 난 그 경험이 부족했다.
육신만 강인해졌을 뿐인지라 실질적인 전투 기술도 내가 훨씬 밀린다.
하지만 이 모든 부족함을 한 방에 만회할 수 있는 무기가 있었으니, 난 전생을 기억한다는 것이다.
맥케니언의 첫 번째 공격은 내 왼쪽 어깨를 노리며 들어온다.
난 몸을 틀어 그의 검을 피하고 안쪽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
어둠 속에서 기이한 빛을 내뿜는 그의 눈이 홉떠졌다.
‘기회는 단 한 번!’
이 기회를 놓치면 두 번은 없다.
내가 기억하는 전생은 맥케니언의 첫 번째 수와, 그걸 내가 맞았을 때 이어지는 두 번째 수, 그리고 그것조차 맞았을 때 이어지는 세 번째 수까지다.
그다음엔 이곳저곳을 막무가내로 베였기에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 수가 없다.
아무튼 난 맥케니언의 첫 번째 공격을 피했고, 그로 인해 내가 기억하는 두 번째 공격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그의 공격에 맞지 않은 이상 내가 기억하는 미래는 바뀔 것이기 때문이다.
맥케니언은 찔러 넣었던 검을 빠르게 회수하며 뒤로 물러났다.
‘여기서 거리를 벌리면 안 된다!’
다시 공격할 여유를 줘선 안 되는 일!
난 재빠르게 따라붙으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맥케니언이 반쯤 회수한 검날을 모로 세워 내 어깨를 베려 했다.
자칫 잘못하면 내 어깨가 날아갈 수도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
“낭아권!”
낭아권을 시전했다.
쐐애애애애액!
총탄처럼 터져 나간 주먹은 맥케니언의 검보다 빨랐다.
뻐어억!
내 주먹이 맥케니언의 명치를 가격했다.
“커헉!”
신음과 함께 뒤로 날아가는 맥케니언.
한데 녀석의 손에 끝까지 잡혀 있던 검이.
서걱!
“큭!”
내 어깨를 약간이나마 베었다.
하지만 그 정도 상처쯤은 문제될 게 아니었다.
쿠당!
맥케니언이 안뜰에 널브러졌다.
녀석은 한차례 몸을 파르르 떨더니 이내 다시 일어서려 했다.
난 그런 맥케니언에게 달려가 검을 쥔 손을 걷어찼다.
퍽!
“……!”
맥케니언은 검을 놓쳤다.
놈의 가장 큰 무기가 사라졌다.
이제 맨손 대 맨손이다.
한데 녀석은 내게 큰일격을 한 방 먹었다.
앙다문 놈의 입술 사이로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퍽!
그대로 옆구리를 걷어찼다.
“커헉!”
입이 열리며 피가 한 움큼 쏟아졌다.
이번에는 양쪽 발목을 짓밟았다.
콰직! 우두둑!
“끄으!”
뼈가 부러지며 발목이 이상한 방향으로 꺾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끝내면 안 된다.
종아리부터 허벅지까지 정신없이 밟아 다리뼈를 가루로 만들었다.
“이, 개 같은 자식이……!”
맥케니언은 제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인지를 못 하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확실하게 인지할 수 있도록 해줘야겠지.
난 놈이 놓친 롱소드를 들고 왔다.
그리고 녀석의 어깨에 망설임 없이 박아 넣었다.
푹!
“끄아아아악!”
놈이 죽겠다고 비명을 질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살 속 깊이 박힌 롱소드를 아래로 휙 내리그었다.
거거거걱!
뼈와 살이 잘리며 어깨가 반 이상 떨어져 나갔다.
“끄어…… 어어어억!”
맥케니언의 눈이 뒤로 돌아가려 했다.
저대로 놓아두면 기절한다.
하지만 편하게 기절하는 것을 용납할 것 같은가?
전생에서 내가 받았던 고통! 딱 그 배만큼만 받아라.
난 롱소드를 마구 휘둘렀다.
서걱! 서걱! 서거걱!
“끄아아아아아악!”
롱소드는 맥케니언의 살을 포 뜨기 시작했다.
드러누운 맥케니언의 주변으로 피와 잘린 살점들이 가득했다.
“사, 살려줘어…….”
맥케니언은 고통을 참지 못하고 넋이 나가 내게 결국 목숨을 구걸했다.
그러나 난 놈의 사정을 봐줄 생각이 없다.
“나도 너한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지.”
맥케니언은 참혹하게 내 목을 벴다.
아울러 지금 나도.
서걱!
맥케니언이 삶을 구걸하는 가장 치졸한 모습일 때 그의 마지막을 장식해 주었다.
“후우.”
그제야 들고 있던 롱소드를 놓았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비가 내 몸에 묻은 피를 다 씻어주었다.
* * *
그것은 정정당당한 결투였다.
여관에 묵고 있던 모든 사람이 우리 둘의 싸움을 봤고, 그들이 이 결투의 과정과 결과가 정당했음을 증명해 주는 증인이었다.
앞으로의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당장 걱정해야 할 건 지금이다.
맥케니언을 죽이고 나면 다른 일들은 전부 해결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율리아는 작은 방 안에 나와 단둘이 마주 보고 앉아서 왜 아무 말도 없는 걸까?
지독한 적막은 우리 두 사람을 무겁게 짓눌렀다.
“저…… 율리아.”
결국 내가 먼저 못 참고 입을 열었다.
율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그냥…… 이 상황이 혼란스러울 뿐이야.”
“난 다 알고 있어, 율리아.”
“알고 있다고 뭘? 내가 널 사실 좋아했다는 걸? 그래서 네가 다치는 걸 원치 않아 맥케니언에게 가려 했다는 걸? 그럼 나 때문에 네가 손에 피를 묻히는 것도 몸서리쳐지게 싫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겠네!”
“…….”
그거였나.
한참 전부터 날 압박하던 네 무거운 분위기의 원인이?
“율리아.”
“……오늘은 얘기하고 싶지 않아. 그만 가줘.”
내게 남은 시간은 오늘 하루가 전부다. 오늘이라는 건 자정이 넘기 전까지를 말한다.
이런 상태로 오늘이 지나 버리면, 그것은 곧 퀘스트 실패를 뜻하며, 소라스의 힘을 잃고 만다.
그렇다고 여기서 더 잡고 있어 봤자 상황만 악화될 뿐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 한참을 고민하다가 일단 한발 물러서기로 했다.
“그래. 가볼게.”
의자에서 일어나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 발을 겨우 옮겼다.
그대로 문을 열고 나서려는데, 율리아의 음성이 나를 붙잡았다.
“소라스.”
뒤를 돌아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