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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 히어로-23화 (23/153)

데일리 히어로 023화

소라스의 사정

“무슨……?”

저 대머리 거한이 왜 나보고 소라스라 부르는 거지?

그때 머릿속에서 음성이 들려왔다.

띠링!

―소라스의 소원 퀘스트를 수락하셨네요. 지금부터 지웅 님은 소라스의 세상을 가상 체험하게 될 거예요. 지웅 님 본인이 소라스가 되어서요.

‘뭐라고?’

―소라스의 기억을 인스톨할게요. 조금 어지러우실 거예요.

여인의 목소리가 끝나자마자 갑자기 이상한 기억들이 밀려 들어왔다.

‘무럭무럭 자라렴, 소라스.’

‘엄마~! 죽지 마! 엄마아아아아!’

‘강해져야 한다, 소라스. 이 아빠는 강하지 못해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단다. 부디 넌…… 너는…….’

‘아빠! 아빠아아! 흐아아아앙!’

‘거렁뱅이 애새끼들 틈에서 대장 노릇 하는 놈치고는 기골이 제법이구나. 나랑 가지 않겠느냐?’

‘왜 저한테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주지 않는 겁니까!’

‘넌 빛 좋은 개살구다. 기골은 장대하나 무인의 재목이 아니다. 날 원망 말고 네 재능을 탓해라.’

‘소라스? 좋은 이름이네요. 전 율리아라고 해요.’

‘당신을 언제까지나 지켜주겠단 말이야!’

‘그만해요. 불가능하다는 거 알잖아요. 당신은 무엇으로도 그를 이길 수 없어요.’

‘율리아에게서 떨어져!’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꺄악! 소라스!’

‘……나도 아버지처럼 약했나 봐.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율리아.’

“끄…… 흐으으윽!”

갑자기 들어온 한 인간의 방대한 인생사에 머리가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시야가 빙빙 돌고 토기가 올라왔다.

띠링!

―소라스는 지웅 님이 자신의 마지막 기억을 행복하게 바꿔주길 바라네요~ 행복의 기준이라는 게 참 애매한 건데, 그가 어떤 행복을 바라는 건지 열심히 노력해서 알아내고, 만들어가세요. 오늘이 지나기 전에 퀘스트를 완료해야 한답니다~

“하아, 하아.”

토할 것처럼 들이친 기억들이 범람하려는 걸 내리누르는 것도 벅찬데 퀘스트 발동까지?

순식간에 흡수한 기억은 열아홉 인생을 살아온 유지웅의 것이 아니었다.

데브게니안 대륙, 벨루안 왕국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소라스의 것이었다.

인격은 기억의 지배를 받는다.

당장 날 더 강렬하게 채우는 건 소라스의 기억이었다.

한마디로 지금의 난 유지웅이라기보단 소라스에 더 가까웠다.

“괜찮은 거야?”

대머리 거한…… 아니, 투크마가 물었다.

녀석은 올해 스물둘, 나와 동갑으로 내가 이 마을에 정착하게 되면서 알게 된 친구다.

날 깨우러 온 건, 일을 하러 가기 위해서다.

한국으로 따지면 지금 시간이 아마 새벽 4시 반 정도 되었을 거다.

본래의 나와 소라스의 지식이 뒤죽박죽 섞이니 정신이 없다.

투크마의 물음에도 난 한참 동안 멍하니 있다가 겨우 대답했다.

“어…… 괜찮아.”

“빨리 준비하고 나와. 늦으면 일 못 딴다.”

“알았어.”

투크마는 한 차례 걱정스런 시선을 던진 뒤 나갔다.

‘그래, 일을 나가야지. 오늘도 허탕 쳤다간 당장 굶을지도 모를 지경이니.’

나와 투크마는 팀을 이뤄 용병 일을 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다지 실력 있는 용병들이 아닌지라 딸 수 있는 일의 종류가 적다.

그나마도 용병 길드에 늦게 나가면 따 오지 못한다.

용병 길드란 나 같은 용병들에게 일거리를 나눠주는 곳이다.

용병 길드에서는 사소한 일부터 큰일까지 사람들에게 들어온 의뢰를 길드를 찾는 용병들의 수준에 따라 배분한다.

그리고 의뢰를 완수할 시 그에 응당한 사례금을 주고, 완수 못 할 시 한 푼도 주지 않는다.

나랑 투크마는 여태껏 부여받은 일 중 단 한 건도 완수 못 한 적이 없다.

문제는…… 우리에게 주어졌던 일 대부분이 참 소소했고, 그만큼 받는 돈도 적었다는 것 정도겠지.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집 나간 고양이를 찾아달라, 하수도 공사를 하는데 인부가 부족하다, 치안이 불안하니 우리 가족이 여행하는 동안 집을 봐줄 사람을 찾는다, 치매 걸린 할아버지를 모시고 살려 하니, 우리가 사는 곳까지 데려와 달라…… 등등.

그런 일들을 해결하며 근근이 먹고 사는 중이다.

만약 투크마와 내가 삼류 무사 정도만 되었더라도 이렇게 고생스런 삶을 살진 않았을 것이다.

물론 가끔씩 큰일이 들어오긴 한다.

귀족끼리의 전쟁에서 용병을 구하는데, 그건 거의 기사와 병사들 대신 선봉에 서 방패막이가 되는 것과 다름없다.

살아남으면 대박이지만, 죽으면 그걸로 끝이다.

게다가 이런 일에 지원한 용병 중 80퍼센트 이상이 죽는다.

20퍼센트에 내 운명을 맡기기는 싫다.

아직까지는 목숨을 걸고 뛰어들 만큼 엉망인 인생이 아니다.

* * *

투크마는 검사다.

그가 사용하는 롱소드는 그의 아버지가 남긴 유품이다.

롱소드에 담긴 의미는 좋지만, 실용적인 면에서 보자면 끔찍할 정도로 쓸모가 없다.

이미 아버지 대에 관리를 잘 못해, 여기저기 이가 빠지고 빠지지 않는 녹이 슬었다.

그런데도 투크마는 롱소드를 제대로 손볼 생각을 하질 않았다. 그럴 돈이 생기면 술을 한 번 더 사 먹었다.

그가 만약 실력이라도 좋다면 이해해 볼 만할 대목이다.

하지만 투크마는 삼류 검사 측에도 끼지 못한다.

그래서 나와 같이 다니는 거다.

나는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 무사다.

냉정하게 말해서 투크마와 비슷한 삼류보다 못한 무사다.

……어젯밤까지는 분명 그랬다.

하지만 지금의 난 새로운 힘을 얻었다.

또 다른 나, 현실의 나, 유지웅으로 인해서.

그러나 길드 마스터는 이런 사실을 모른다.

날 그저 어제와 똑 같은 무용지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런 일을 맡겼겠지.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아니지 않아?”

소똥 냄새 가득한 우사 속에서 툴툴거렸다.

하지만 나는 물 양동이 속에 비친 내 얼굴을 보느라 그런 투크마의 말에 대꾸하지 못했다.

‘그래…… 내가 이런 모습이었지.’

정말 오래간만에 보는 내 육신이었다.

큼직한 이목구비에 투박한 얼굴, 갈색 머리카락과 갈색 눈동자, 구릿빛 근육질 피부.

그것 외엔 딱히 특별할 게 없었다.

미남도 아니고, 한국에서 유행하는 말로 훈남도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연애운도 여태껏 따라주질 않았다.

투크마는 그래도 돈을 아끼고 아껴 가끔씩 창녀촌에 들르는 모양이지만, 나는 돈 주고 사랑을 사는 행위는 못 하겠다.

이런 날 보며 투크마는 촌뜨기라고 놀려댄다.

그래도 차라리 촌뜨기로 남으련다.

“야, 소라스!”

“어, 어?”

“못생긴 얼굴 뭐한다고 계속 비춰 봐?”

“뭐 인마?”

“너 속으로 내 흉봤지?”

뜨끔!

하여튼 투크마는 생긴 것답지 않게 가끔씩 예리해질 때가 있다.

“아니야! 크흠!”

“어? 헛기침하는 거 보니까 맞네.”

이런 고질병.

난 거짓말을 하면 꼭 저렇게 헛기침을 하고 만다.

“아무튼 용병이 무슨 소 우리를 청소해야 하냐고.”

“하아, 그러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중 그나마 이게 가장 돈이 되는 일이었다.

난 지금의 날 알기에 더 좋은 일을 달라고 했지만, 길드 마스터는 딱 잘라 거절했다.

“후딱 치우고 가자.”

그래, 그게 답이다.

하지만 난 후딱 치우기 싫다.

사실 길드 마스터가 다른 일을 줄 수 없다고 했을 때, 두 번 세 번 부탁하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다.

지금 내가 일하는 우사는 브락튼 씨의 것이다.

브락튼 씨는 여관도 운영하고 있는데 우사에서 그리 멀지 않다.

브락튼 씨는 휘하에 종업원도 많이 데리고 있다. 그래서 종업원들이 종종 소의 젖을 받으러 오곤 한다.

중요한 건, 내가 첫눈에 반한 그녀 율리아도 브락튼 씨의 여관에서 일하는 종업원이라는 거다.

그리고 오늘은 그녀가 소젖을 받으러 오는 날이다.

내가 온전한 소라스로서 한 치 앞도 모르는 인생을 살아가던 때는, 그녀가 오늘 우리가 브락튼 씨의 우사 청소 의뢰를 받은 이 시점에 소젖을 짜러 오리라는 걸 몰랐다.

그래서 길드 마스터에게 더 좋은 일을 달라고 엄청나게도 강짜를 부렸다.

하지만 결국 난 투크마와 소 우리를 청소하게 되었고, 거기에서.

“어? 투크마! 소라스!”

소젖을 짜러 온 율리아와 만나게 된다.

“어~ 율리아! 소젖 받으러 온 거야?”

율리아가 한 손에 든 양철통을 들어 보이며 밝게 웃었다.

“응! 오늘 우사 청소해야 한다더니 너희들이 의뢰 맡았구나?”

쪽팔린다.

율리아에겐 조만간 엄청난 용병이 될 거라고 입버릇처럼 떠들어대는 나였다.

하지만 현실은 직시해야 한다.

도피만 해서는 답이 나오질 않는다.

“율리아, 어서 일 봐.”

“응, 실례할게.”

율리아는 능숙한 솜씨로 소젖을 짜, 양철통에 가득 담았다.

“역시 젖 짜는 건 율리아를 따라올 사람이 없다니까.”

투크마가 농을 던졌다.

“왜? 네 젖도 짜줄까?”

씩 웃으며 응수하는 율리아.

투크마는 질색하며 가슴을 가렸다.

“계집애가 그게 할 소리야?”

“참 나. 끝까지 해보지도 못할 거, 엉기기는?”

율리아가 콧방귀를 꼈다. 그러더니 고개를 휙! 돌려 날 쏘아봤다.

“소라스!”

“응?”

“오늘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

“늘 안 좋지.”

“그럼 얼굴 좀 펴. 늘 안 좋으니 오늘 안 좋다고 유난 떨 것도 없겠네!”

“알았어. 어서 들어가 봐. 늑장 부린다고 브락튼 씨한테 핀잔 받겠다.”

“안 그래도 갈 거거든~! 그럼 나중에 봐!”

활달하게 돌아가는 그녀의 뒷모습이 대단해 보인다.

율리아는 사실 얼마 전부터 나와 불편한 관계가 되었다.

그녀가 내 마음을 알았다는 것이 첫 번째, 그리고 그녀를 눈독 들이는 기사가 있다는 것이 두 번째, 마지막으로 그 사실을 내가 알아 버렸다는 것이 세 번째다.

율리아를 노리는 기사의 이름은 맥케니언 팰렌.

다들 팰렌 경이라고 하지만 나는 그 자식이라 부른다.

우리 마을 토박이도 아니면서 이 마을이 마음에 들었다는 핑계로 벌써 보름째 엉덩이를 붙이고 있다.

그것도 율리아가 일하는 브락튼 씨의 여관에서.

그 자식은 마을보다 율리아가 마음에 든 것이다.

이미 브락튼 씨에게 율리아를 자신에게 팔라고 몇 번이나 설득했다고 한다.

그때마다 브락튼 씨는 율리아는 자신에게 가족 같은 존재라 그럴 수 없다고 거절했다는 게 율리아의 말이다.

하지만 기사가 눈 까뒤집고 저돌적으로 나오면 결국 평민인 브락튼 씨는 어쩔 수 없이 율리아를 팔아 넘겨야 한다.

아니, 그땐 돈 한 푼 받지 못하고 율리아만 빼앗길지도 모른다.

지금은 그 자식이 율리아에게 좋은 이미지 심어주겠다고 신사적으로 나오는 것뿐.

난 그 자식처럼 눈이 쫙 찢어진 인간 중 좋은 성깔 가진 놈을 못 봤다.

당장 길드 마스터만해도 눈이 쫙 찢어지지 않았냔 말야.

그러니까 만날 우리를 못 믿고 가장 낮은 등급의 의뢰들만 맡기는 거지.

어찌 되었든 좋다.

난 지금 다시 돌아왔다.

내가 죽음을 맞이하던 날 아침으로.

오늘 하루 종일 내게는 행복한 일이라고는 하나도 일어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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