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 히어로 020화
잠시 동안 눈만 데굴데굴 굴리던 녀석이 겨우 입을 열었다.
“너랑 상관없는 일이니까 그냥 꺼져!”
“그렇겐 못하겠는데?”
“씨팔 진짜!”
놈이 주머니에서 스위치 블레이드를 꺼냈다.
“너 뭐하는 거야! 하지 마!”
여자가 놀라서 소리쳤다.
“닥쳐!”
놈은 여자에게 윽박지르고 날 노려봤다.
“그땐 내가 술 취해서 좀 힘들었는데, 지금은 아주 멀쩡하거든? 배 때기에 구멍 나기 싫으면 좋은 말 할 때 그냥 가라.”
내 시선이 놈의 손에 들린 칼로 향했다.
야구방망이까지는 맞아도 별 이상이 없었다.
하지만 과연 칼은 어떨까?
시리게 빛나는 날을 보고 있자니 조금 긴장이 됐다.
[쫄았냐?]
그때 카시아스가 텔레파시로 내게 말했다.
[……칼 들고 있을 줄은 몰랐지.]
[잘났다.]
[내가 제압할 수 있을까?]
[지금의 넌 선빵필승이다. 칼에 맞기 전에, 낭아권으로 날려 버려.]
[후우.]
어차피 엎질러진 물.
이제 와서 돌이킬 순 없다.
난 호흡을 가다듬고 녀석에게 다가갔다.
녀석이 엉거주춤 서서 칼을 앞으로 쭉 내밀고 날 경계했다.
‘천천히 다가가서, 바로 낭아권을 사용한다.’
놈이 위협적으로 칼을 허공에 휙휙 찔러 넣었다.
점점 둘의 거리가 좁혀졌다.
그러다 서로가 공격 사정권으로 들어온 순간.
쉭!
놈의 손에 들린 칼이 뱀의 대가리처럼 내 배를 노리고 찔러 들어왔다.
난 몸을 옆으로 틀면서 주먹을 말아 쥐고 말했다.
“낭아권.”
시동어를 말하는 동시에, 내 주먹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쐐애애애액! 퍽!
“컥!”
주먹은 정확하게 놈의 복부에 틀어박혔다.
놈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그리고 몸이 허공에 붕 떠 뒤로 죽 날아갔다.
콰당탕! 털썩!
막다른 벽에 몸을 부딪치고 바닥에 널브러진 녀석에게 다가갔다.
제법 엄청난 충격이 전해졌을 텐데도, 녀석은 기절하지 않고 손엔 여전히 칼을 쥔 채였다.
“쿨럭! 컥! 우웨에에에엑!”
놈이 다시 일어나려고 발악하다가 구토를 했다.
입에서 온갖 더러운 것이 다 게워졌다.
난 그런 녀석의 얼굴을 발로 후려 찼다.
퍽!
“억!”
놈이 옆으로 빙글 드러누우며 쥐고 있던 칼을 놓쳤다. 한데 칼이 자신의 생명줄이라도 되는 양, 다시 다급히 주우려 했다.
그렇게 놔둘 순 없지.
난 칼을 노리고서 낭아권을 시전했다.
“낭아권.”
쐐애애액! 퍽!
내 주먹에 맞은 칼이 산산조각 부서졌다.
이를 본 녀석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날 올려다보는 눈동자는 공포로 가득 차 있었다.
사람이 맨손으로 쇠를 조각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내가 놈의 턱을 한 손으로 잡고 두 눈을 쏘아보며 말했다.
“만약에 한 번만 더 저 여자한테 접근하면, 다음번엔 네가 저 꼴이 될 거야. 알았냐?”
놈은 잔뜩 질려서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하지만 그냥 이대로 일을 마무리 짓기엔 놈의 행실이 너무 악독했다.
그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소울 커넥트.”
당장 소울 스토어에 접속했다.
라헬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그에게 말했다.
“아르마의 능력을 사겠어.”
“……오늘은 어째 계속 급하시네요, 유지웅 님.”
“바쁘니까 잔말 말고 빨리 내놔.”
“그러죠.”
라헬이 짜증 나 죽겠다는 얼굴로 아르마의 영혼을 꺼내 내게 건네주었다.
“10링크 잘 받았습니다.”
영혼을 흡수한 뒤,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내 손은 여전히 놈의 턱을 쥐고 있었다.
난 레이븐 링을 이용해 아르마의 힘을 녀석에게 전이시켰다.
가슴에서 튀어나온 미세한 빛이 팔을 타고 레이븐 링에 머물렀다가 놈의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제야 난 놈의 턱을 놓아주었다.
아르마의 힘은 남성을 유혹하는 것이다.
이제 저 녀석 주변엔 온갖 남자가 다 꼬이게 되겠지.
평생 여자보다 남자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또 모르지.
사채업자들이 녀석한테 반해서 돈 대신 몸으로 갚으라고 할지.
띠링!
―전에 사귀었던 양아치 남친 때문에 위기에 처한 여인을 구해주셨네요~ 백마 탄 왕자님 같았어요. 선행을 쌓아 5링크가 주어집니다.
5링크?
그 말은 이 더러운 상황에 처한 여인 말고, 네 사람이 더 그녀를 도와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는 얘기다.
‘네 명은 이걸 보고서도 그냥 지나쳤다는 거겠지.’
착잡했지만 그들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괜한 일에 휘말리기 싫었겠지.
난 골목을 벗어났다.
여인이 그런 내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양념의 비법 2
“정말 고마워.”
여인은 내게 뭐라도 보답을 하고 싶다며 카페로 끌고 들어갔다.
난 지금 그런 것보다 얼른 무뼈 국물 닭발을 만들어보고 싶어 죽겠다.
하지만 그녀가 이대로 가면 자기 마음이 계속 불편할 것 같다며 잡아끄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카페에 와 평소에 잘 마시지도 않는 아메리카노를 홀짝이게 되었다.
으…… 써.
이 쓴 걸 사람들은 왜 그렇게 좋아하지?
그럴 거면 차라리 보약을 지어 먹지.
“난 박인비야.”
박인비? 특이한 이름이다. 그런데 왜 아까부터 계속 반말인 걸까? 내가 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자니, 인비가 불쑥 물었다.
“혹시 반말하는 거 불편해?”
“불편하다기보단…… 그래도 초면인데…….”
“그냥 편하게 말 놓자, 우리. 나 스물한 살인데, 그쪽은? 나보다 나이 많으면 오빠라고 부를게.”
“……열아홉.”
“열아홉? 그럼…… 고딩?”
“응.”
“뭐야~ 말 놔도 되겠네. 누나라고 부를래? 싫으면 그냥 이름 불러도 되고.”
뭐가 이렇게 쿨해?
내가 여태껏 살아오면서 만난 사람 중 제일 쿨한 것 같다.
“그래서 네 이름은 뭐야?”
“유지웅.”
“이름 멋지네~”
인비가 말갛게 웃었다.
말투와는 달리 그 모습이 꼭 티 없는 어린아이 같았다.
그런데 어쩌다 그런 양아치를 사귀어 가지고, 이런 꼴을 당한 건지.
“너 아니었으면 어떻게 됐을지…… 생각만 해도 소름 끼친다. 칼까지 가지고 다닐 줄은 몰랐어, 진짜.”
인비는 한숨을 푹 내쉬며 붉은색으로 염색한 머리를 뒤로 넘겼다.
이제 보니 눈동자도 검은색이 아니라 붉은색이다.
컬러 렌즈 같은 걸 착용한 모양이다.
“근데 나 이제 그만 가봐도 될까? 할 일이 있어서.”
“많이 바빠?”
“조금.”
“커피 다 마시고 가.”
그 말에 쓰디쓴 아메리카노를 원샷했다.
“이제 됐지?”
“근데, 아까 그 인간이랑은 어떻게 알아?”
“내가 아르바이트하는 편의점에 와서 난동 부렸었어.”
“편의점 아르바이트 해? 어디서?”
“우리 동네서.”
“어느 동넨데?”
“……몰라도 돼. 진짜 간다.”
“그럼 잠깐만! 부탁 하나만 더 들어줘!”
“뭔데?”
“나 지금 혼자 두고 가면 그 인간이 또 찾아와서 행패 부릴지도 몰라.”
“호되게 혼냈으니까 찾아오는 일 없을 거야.”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전화 좀 빌려줘. 아는 오빠 불러서 나 좀 데려가라고 하게.”
“넌 핸드폰 없어?”
“배터리가 다 됐단 말야.”
에효, 그래 선행 한 번 더 하는 셈 치고 주자.
난 핸드폰을 인비에게 건네주었다.
인비가 빠르게 번호를 찍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갑자기 어디에선가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인비는 자신의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전화를 받더니 씩 웃었다.
“뭐야? 너한테 전화한 거야? 배터리 없다며?”
“뻥이지. 이렇게라도 안 하면 네가 번호 안 줄 거 뻔하잖아.”
“…….”
할 말이 없다.
쿨한 건 둘째 치고 엄청나게 적극적인 여자다.
“번호 저장해 둘게. 내가 연락하면 받아야 돼?”
난 대답 없이 핸드폰을 빼앗았다.
카페를 나서는 내 뒤로 인비의 음성이 들려왔다.
“나 너 마음에 들어! 또 만나자!”
과연 만날 일이 있을까 싶다.
* * *
마트에서 무뼈 국물 닭발 요리에 필요한 재료들을 모두 사 가지고 집으로 왔다.
누나는 피곤한 업무에 지쳐 벌써 잠이 든 모양이다.
난 누나가 깨지 않도록 조리 도구들을 내 방으로 가지고 왔다.
우선은 기본 양념장을 준비해야 한다.
기본 양념장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재료는 고추장과 고춧가루, 간장, 다진 마늘, 청주, 물엿이다.
그것들을 적절한 비율로 섞어준 뒤, 다음으로 해야 할 건 내가 파악한 다섯 가지 과일, 야채들을 갈아 넣는 것이다. 한데 그중 하나는 매실 엑기스였고, 다른 하나는 즙만 짜 넣어야 하는 레몬이었다.
따라서 실질적으로 갈아야 하는 재료는 세 가지였다.
그 세 가지는 양파와 사과, 배였다.
일단 과일들을 손질했다.
도마 위에 과일을 놓고 네 조각으로 잘라 껍질을 벗기는데, 그 손놀림이 기가 막혔다.
전문 주방장의 손놀림 같았다.
내가 하면서도 놀랄 지경이었다.
영혼의 힘은 매번 날 경이롭게 만든다.
손질된 과일들을 알맞은 비율로 믹서기에 갈아, 미리 만들어놓은 양념장에 섞었다.
그리고 휴대용 가스레인지에 볼이 깊은 프라이팬을 얹고, 닭발을 양념에 무쳐 끓였다.
요리가 완성되며 퍼지는 향이 기가 막혔다.
드디어 무뼈 국물 닭발이 완성되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첫 시식을 해보려는 그때.
벌컥!
“깜짝이야!”
내 방문이 갑자기 열렸다.
문 앞에는 자다 깬 누나가 엄청난 몰골로 코를 벌름거리며 서 있었다.
“이게 무슨 냄샌가 했더니, 네가 범인이었구나.”
“놀랐잖아!”
“근데 이게 웬 난장판이냐?”
“그냥…… 요리 좀 해봤어.”
“요리? 네가? 라면도 잘 못 끓이는 게?”
“안 끓였던 거지, 하면 잘해!”
“허이고, 기특해서 돌아가시겠네.”
“아, 빨리 가서 자.”
“자긴 뭘 자.”
누나는 기어코 내 방으로 들어왔다.
그러더니 내가 들고 있던 집게를 빼앗아 닭발 하나를 집어 입에다 턱 넣었다.
난 기대하는 눈빛으로 그런 누나의 반응을 살폈다.
누나는 닭발을 오물오물 씹다가 꿀꺽 넘기더니 휘둥그레진 눈으로 날 바라봤다.
“어때?”
누나는 한참 입맛을 다시더니 말했다.
“이거 정말 네가 한 거 맞아?”
“응.”
“의외네~? 제법 맛있다?”
“고작 그거야?”
“고작 그거냐니?”
“엄청 눈 뒤집어지게 맛있거나 뭐 그렇진 않아?”
“야, 닭발 맛이 다 거기서 거기지. 그런 게 어디 있냐? 게다가 네가 한 건데.”
뭐? 그럴 리가 없는데.
나는 누나에게 집게를 빼앗아 닭발을 먹어보았다.
그런데.
“…….”
맛있었다.
확실히 맛은 있는데, 내가 먹어봤던 용용닭발집의 맛을 따라가긴 힘들었다.
‘뭐가 문제지?’
그 집의 양념 맛은 완벽하게 간파했다.
그리고 비율도 제대로 맞췄다.
그런데 그 맛이 나질 않았다.
내게는 리조네의 절대미각도, 마르펭의 요리 실력도 있었다.
절대로 실패할 리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왜 이런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야, 집에 소주 있냐?”
누나는 분위기 파악도 못 하고 소주를 찾았다.
“소주 안주 하기로는 딱이다.”
“누나, 나 지금 심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