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 히어로 018화
마치 어디선가 본 듯하다.
그때였다.
“지웅아!”
“지웅이 형!”
아랑이와 이랑이가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행이다.
하마터면 이상한 할아버지에게 잡혀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는 판국이었는데, 너희들이 날 살려주는구나.
난 그들 남매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한데…….
“어? 할아버지, 여기서 뭐해요?”
노인을 본 이랑이의 말이었다.
“할아버지, 산책 나간다고 하시더니 여기 오시려는 거였어요?”
이건 아랑이의 말.
노인은 검지로 날 가리키며 두 남매에게 물었다.
“얘들아, 너희들이 아는 청년이냐?”
“네, 오늘 같이 점심 먹기로 약속한 친구예요.”
“아~ 그럼 우리 이랑이를 불량배들한테서 구해주었다는 게……!”
아랑이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랑이는 눈을 크게 뜨고 신기한 듯 소리쳤다.
“우와~! 대박! 이런 우연이! 역시 형이랑 우리 남매는 뭔가 있다니까!”
“지웅아, 인사드려. 우리 할아버지셔.”
이게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우연도 이런 우연이 따로 없다.
정신이 없었지만 일단 웃어른에 대한 예의부터 갖추는 게 도리겠지.
“안녕하세요. 아랑이랑 같은 반 친구 유지웅이라고 합니다.”
“그래그래~ 난 아랑이 할애비 되는 사람일세. 앞으로 무천(武天)도사라고 부르면 돼.”
무, 무천도사.
뭐지, 이 무협에서나 나올 법한 작명 센스는?
현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별호다.
“어휴, 할아버지. 그 별호 촌스럽다니까.”
“이랑이 말이 맞아요. 다른 별호로 바꿔보실 생각은 없으세요?”
“이놈들이 눈만 뜨면 그 소리! 내 별호 가지고 두 번 다시 말 말랬거늘!”
아랑이의 할아버지, 아니 무천도사의 호통에 두 사람은 입을 딱 다물었다. 무천도사는 계속 말을 이었다.
“험험, 내가 첫 대면인 사람 앞에서 실례를…….”
“아니요, 괜찮습니다.”
“근데 우리 아랑이랑 이랑이가 참 좋은 인연을 곁에 두었구나. 방금 이 청년이 지나가던 소매치기를 잡았단다. 대부분의 현대인은 이런 상황에 맞닥뜨리면 혹여라도 자기한테 불똥이 튈까 쉽게 나서지 못하는 법인데 말이야.”
무천도사의 칭찬에 나보다 이랑이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럼요! 지웅이 형인데 당연하죠.”
아랑이가 날 보며 방긋 미소 지어주었다.
아…… 더없이 행복하다.
선행을 쌓는다는 건 정말 좋은 일이구나.
잠깐, 그런데 무천도사가 이랑이의 할아버지라는 건…….
“이랑아, 혹시 친할아버지셔?”
“네.”
“그럼 네게 극천무를 일인전승해 주시는 분이 바로?”
“맞아요. 할아버지세요.”
그랬구나.
어쩐지 연세에 비해 정정하시더라니.
무천도사는 우리가 나누는 대화를 가만히 듣다가 끼어들었다.
“젊은이들의 소중한 시간을 내가 이런 식으로 빼앗아선 안 되겠지. 난 이 소매치기를 경찰에게 인계할 테니, 젊은이들은 소중한 청춘을 즐기도록 하거라. 아, 그리고 지웅 청년.”
“네?”
“언제 한번 우리 집에 오도록 하지.”
“제, 제가요?”
무천도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삼대가 같이 살고 있으니 아랑이, 이랑이도 집에 있을 테고…… 그리 불편하진 않을 것 같다 생각하네만, 어떤가?”
그 말인 즉 아랑이의 집에 초대된다는 얘기인가?
당연히 거절할 리가 없다!
“불러만 주신다면 언제든지 가겠습니다, 무천도사님!”
“헛헛헛! 호탕해서 좋군.”
그런데 그때 이랑이가 불안한 듯 끼어들었다.
“저기, 할아버지! 혹시 지웅이 형한테 그 일…… 시키려는 건 아니지?”
무천도사는 이랑이의 물음에 대답 대신 오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바람처럼 움직여 기절한 소매치기를 안고 금세 떠나 버렸다.
마치 귀신에 홀린 듯한 광경이었다.
어떻게 사람의 움직임이 저럴 수가 있는 건지.
무천도사가 사라진 후, 이랑이에게 물었다.
“이랑아, 그 일이라는 게 뭐야?”
이랑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에요, 형. 신경 쓰지 말아요. 그리고 어지간하면 우리 집에 놀러 오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왜?”
“사람들이 다 별종이라…….”
딱!
아랑이가 이랑이의 정수리를 때렸다.
“악! 왜 때려, 누나!”
“가족들한테 별종이 뭐니.”
“별종 맞잖아!”
“다들 개성이 뚜렷한 것뿐이야.”
“그게 그거지…….”
이거 뭔가 께름칙하다.
무천도사가 초대하면 가야 하는 거야, 말아야 하는 거야.
아니, 근데 그 전에 어떤 식으로 날 초대한다는 건지도 모르겠다.
[지웅.]
깜짝이야!
[갑자기 이렇게 텔레파시 좀 보내지 마.]
[방금 그 노인, 보통이 아니야.]
[그렇게 대단해?]
[지구인들 입장에서 보자면. 내 입장에서 판단해 볼까? 사람 앞에 개미 꼴이지.]
[……잘나셨습니다.]
[하지만 조금 놀란 건 사실이다. 지구인들의 수준은 다들 거기서 거기일 거라 생각했었는데.]
[지금 나랑 싸우면 누가 이겨?]
[초딩이냐? 그런 걸 묻게.]
[그런 의미가 아니잖아! 그냥 무천도사님이 얼마나 강한 건지 궁금해서 물어본 거잖아!]
[확실하게 대답해 주마. 네가 백 퍼센트 진다. 이길 가능성은 개미 눈곱만큼도 없어.]
[그렇게 강하다고?]
[그래. 어쩌면…… 지구도 겉보기완 다르게 속에선 재미있는 일이 많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군. 혹여라도 그 노인이 널 초대한다면 꼭 그에 응해라.]
카시아스가 저렇게까지 관심을 보이니 나도 흥미가 생겼다.
[알았어.]
둘의 대화는 거기에서 끝났다.
한데 이 녀석 어디에 있었던 거야?
오늘은 집에서 나올 때부터 보이질 않던데.
난 주변을 휙휙 둘러봤다.
카시아스는 바로 옆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나 이제 배고프다, 지웅아. 빨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그래요, 형. 나도 배고파요.”
“아, 그래. 뭐 먹으러 갈까?”
“내가 아는 맛집이 있는데 일단 거기에서 간단히 요기 좀 할까?”
아랑이의 말이었다.
“그래, 그러자.”
우리 셋은 나란히 서서 아랑이의 안내를 받으며 맛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어째 아랑이의 말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
아는 맛집에서 간단히 요기를 한다고?
* * *
놀라운 경험을 두 가지나 했다.
그중 하나는 아랑, 이랑 남매와 벌써 다섯 번째 점심을 먹고 있다는 것이다.
두 남매는 서로 번갈아 가며 맛집을 추천했고, 들른 곳마다 음식이 전부 맛있었다.
문제는 그들이 먹는 양이었다.
난 설마 아랑이가 이렇게나 대식가일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아랑이도 이랑이도 들르는 맛집마다 꼬박꼬박 1인분 이상씩의 음식을 해치웠다.
한데도 여전히 허기진 얼굴로 열심히 갈비를 먹고 있었다.
게다가 내게는 돈을 내지도 못하게 했다.
이건 고마움의 표시로 그들이 대접하는 거니 그냥 맛있게 먹으란다.
그 마음이야 고맙지만…… 이미 난 두 번째 맛집에서 나오는 순간 배가 차 있었다.
세 번째 맛집부터는 그냥 음식의 맛만 볼 뿐이었다.
‘저렇게 먹으면서 살이 안 찌다니.’
참 신기한 노릇이었다.
가만 보면 이랑이보다 아랑이가 더 먹는다.
그것도 참 복스럽게 잘 먹는다.
먹는 모습도 어쩜 그리 예쁜지…… 이게 아니지.
아무튼 대식가 남매의 모습에 한 번 놀랐고, 두 번째로 놀란 건 음식을 맛볼 때마다 내가 잡아내는 재료 때문이었다.
무슨 음식이 들어오든 간에, 그 요리를 하는 데 들어간 재료들이 내가 한 번이라도 먹어본 것이라면 전부 머릿속에 파파팍 떠올랐다.
게다가 그 재료들이 어떠한 비율로 배합된 것인지까지 정확하게 짚어낼 수 있었다.
이 정도의 절대미각이라면 맛집의 음식을 먹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그 요리를 베낄 수 있을 듯했다.
내게는 리조네의 절대미각뿐만 아니라 마르펭의 요리 실력도 있으니 말이다.
다행히도 둘 다 액티브 소울이 아닌 패시브 소울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바로 내가 먹어보지 못한 요리의 재료는 밝혀낼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세상에는 향신료만도 그 종류가 어마어마하다.
어디 향신료뿐인가?
요리에 들어가는 야채, 과일, 조미료, 고기부터 시작해서 특이한 요리에 들어가는 특이한 재료들까지.
내가 과연 그중에 얼마나 많은 걸 먹어봤을까?
그러다 보니 맛집의 음식들을 먹어도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는 재료들 때문에 맛의 비법을 밝혀낼 수가 없었다.
물론 그런 비법을 알아낼 필요가 없는 삼겹살집도 있었다.
하지만 삼겹살은 우리 가게가 승부수를 던지기에 불안 요소가 너무나 많았다.
‘이래서 제대로 터뜨릴 만한 요리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그러한 불안감이 커져 갈 무렵 다섯 번째 맛집에서의 식사도 끝났다.
밖으로 나온 남매는 마지막 여섯 번째 맛집으로 날 이끌었다.
그들이 선택한 메뉴는 바로 매운 닭발이었다.
“닭발?”
“응. 지웅아, 여기 못 와봤지?”
닭발집 상호 이름은 용용닭발이었다.
대충 지은 듯한 상호와는 달리 유리문 너머 보이는 가게 내부는 손님으로 가득했다.
“닭발을 그다지 즐기는 편이 아니라서…….”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여기서 한번 먹어보면 중독된다?”
“에이, 설마. 그리고 난 매운 것도 별로 안 좋아하는데?”
“여기는 그냥 무작정 매운 게 아니야. 적당히, 맛있게 매워. 그리고 매운맛도 우리가 조절할 수 있어. 총 다섯 단계거든. 우리는 오늘 2단계로 먹으면 되겠다. 지웅이가 초보자니까.”
“그래, 누나. 그러자.”
솔직히 닭발은 그다지 끌리지 않았지만, 남매의 추천에 어쩔 수 없이 끌려 들어갔다.
내부로 들어서서 빈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랑이가 주문을 하는 동안 난 주변을 둘러봤다.
가게 한편에 용용닭발은 인공 조미료를 사용하지 않고 과일과 야채를 갈아 만든 특제 비법 소스로 맛을 냈다는 문구가 자랑스레 적혀 있었다.
‘하아, 아무래도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어.’
애초부터 오늘 약속에 이랑이가 낀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셋이 모이더라도 무언가 조금은 설레는 자리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이건 설렘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저 전투적으로 맛집을 탐방하고만 있다.
이거 데이트야, 맛집 탐방이야?
양념의 비법
드디어 아랑이가 주문한 뼈 없는 국물 닭발이 나왔다.
아랑이랑 이랑이는 뼈 있는 닭발을 좋아하는데, 내가 처음이라서 배려를 해준 것이다.
무뼈 국물 닭발은 작은 철 냄비에 붉은 양념 국물이 무뼈 닭발과 함께 담겨 나오는 형태였다.
사이드 메뉴로 동치미와 주먹밥, 그리고 계란찜이 함께 나왔다.
“먹어봐, 지웅아.”
아랑이가 기대하는 눈으로 말했다.
“응.”
솔직히 배가 너무 불러 이제는 더 먹기도 싫다.
그러나 아랑이를 실망시키는 것이 더 싫다.
그래서 닭발 하나를 젓가락으로 집어 입에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