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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 히어로-17화 (17/153)

데일리 히어로 017화

선행이라는 건 조금만 관심을 갖고 주변을 둘러보면 얼마든지 쌓을 기회가 있었다.

편의점을 가는 동안 제법 눈에 띄는 쓰레기 열 개를 치웠고 그중 두 개를 선행으로 인정받았다. 하나는 페트병, 또 하나는 낡은 포대 자루였다.

그로 인해 얻은 링크는 3포인트!

포대 자루를 치울 때 2포인트가 올라갔다.

즉, 포대 자루를 누가 좀 치워줬으면 하고 생각했던 사람이 2명 있었다는 것이다.

평소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지나쳤던 쓰레기들이 지금 내겐 천만금보다 가치 있는 것이 되었다.

편의점에 도착해서 일을 하는 세 시간 동안에도 눈이 어두운 할머니가 원하시는 물건을 직접 찾아드리고, 여행객이 찾는 우리 동네 맛집의 위치를 자세히 설명해 주어 2링크가 추가로 적립되었다.

편의점 알바를 마친 뒤에는 아버지의 가게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는 동안 또다시 쓰레기를 치워 4링크를 적립했다.

덕분에 현재 보유 링크는 10이었다.

가게 앞에 도착하니 열 시 반.

아버지의 가게는 춘천에서 나름 유명한 애막골 상가 거리 한곳에 들어서 있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가 보니 손님은 한 명도 없고 아버지만 카운터에 앉아 TV를 시청하는 중이었다.

“어서 오…… 지웅이냐?”

인기척에 벌떡 일어서던 아버지가 실망한 얼굴로 다시 앉았다.

주방 아주머니는 주방에서 혼자 뭘 하시는 건지, 홀을 슬쩍 바라보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난 아주머니께 고개를 숙였지만, 아주머니는 별 대응도 없이 시선을 돌렸다.

완전히 무시당했네.

아무래도 아버지께서 주방 아주머니를 잘못 들인 것 같다.

음식 솜씨도 솜씨려니와 사교성도 그다지 좋지 않은 듯하다.

“오늘은 좀 어떠세요?”

“늘 똑같지, 뭐.”

굳이 묻지 않아도 뻔히 알 수 있는 걸 괜히 물었다.

“너는 수능 준비 잘하고 있냐?”

“그게…….”

공부랑은 담을 쌓은 지 오래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내 성적을 가지고 뭐라고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수능도 대단찮게 생각했다.

“별로 대학 갈 생각 없으면 억지로 공부하지 마라. 내 시대엔 성공하려면 대학이 필수라고 했다만, 살아 보니 그것도 아니더라. 아버지 봐라. 지금 이 꼴로 살고 있잖냐. 대학 나온 나보다 똥지게 지고 나르던 옆집 본춘이가 장사 머리가 빨리 트여 더 잘산다. 하물며 네가 살아가는 시대는 어떻겠냐? 무엇이든 네가 잘하는 거 하나만 있으면 돼. 잘하는 거 하나만.”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래서 너 뭘 잘하냐?”

“……네?”

“뭘 잘하냐고.”

가만…… 내가 진짜 뭘 잘하지?

잘 못하는 건 수도 없이 많지만 잘하는 건 뭔지 모르겠다.

대답 못 하는 날 가만히 바라보던 아버지가 한숨을 쉬었다.

“열아홉에 공부를 못하는 건 괜찮지만 잘하는 게 뭔지, 네가 좋아하는 게, 하고 싶은 것이 무언지 아직도 찾지 못했다는 건 한심한 일이다.”

“……죄송해요.”

“밥은 먹었냐?”

“네. 편의점에서 폐기 나온 음식들로 배 채웠어요.”

“폐기가 뭐냐?”

“그러니까……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이요.”

“그런 걸 먹어?”

“한두 시간 지난 거라 괜찮아요.”

“그렇구나. 근데 여기는 뭐 하러 왔냐?”

이제 본격적인 이야기를 꺼낼 시간이다.

난 아버지에게 가까이 다가가 소곤소곤 얘기했다.

“아버지, 만약에 제가 우리 가게를 다시 일으킬 수 있을 만큼 엄청난 메뉴를 만들어 오면…… 종목 바꿔보시겠어요?”

“종목을 바꿔?”

“네.”

우리 아버지는 낮에는 음식 장사, 밤에는 술장사를 하는 음식점을 운영 중이시다.

한마디로 낮에 밥에 먹었던 음식들이 밤에는 술안주가 되는 식이다.

그러나 음식들도 맛이 없고 그렇게 특색 있는 것 역시 아니어서 손님들을 끌기엔 무리가 있다.

어머니가 주방에 계실 땐 맛이라도 있었는데, 어머니가 입원하고 난 뒤엔 단골도 외면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게 뜬금없이 무슨 소리냐?”

“정말 이거다! 싶은 메뉴를 제가 만들어 오겠다구요. 아버지께서 맛보시고 괜찮은 것 같으면 그걸 우리 가게 대표 메뉴로 내걸자는 거예요.”

아버지는 이놈이 무슨 헛소리를 하느냐는 시선으로 날 바라봤다.

역시 말로 설득하는 건 무리가 있겠지.

“백문이 불여일견! 제가 조만간 그런 음식을 만들어서 올게요.”

“흰소리 할 거면 얼른 들어가, 이놈아.”

“흰소리 아니에요. 조만간 증명할 거라구요.”

“그래, 제발 증명해 봐라.”

아버지의 시선이 다시 TV로 향했다.

주방 아주머니는 여전히 주방에서 혼자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두고 보세요, 아버지.

아들이 반드시 우리 가게 일으켜 세웁니다.

* * *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난 상덕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몇 번 가지 않아 상덕이의 음성이 들려왔다.

―지웅아.

“응, 상덕아. 그 인간 또 왔어?”

―아니. 벌써 오고도 남을 시간인데 안 오네. 손님도 별로 없고…… 엄마도 오늘은 그만 장사 접고 들어가야겠대.

“그래, 알았다. 다른 날이라도 그 인간 오면 바로 전화해.”

―알았어.

오늘은 나도 조금 피곤했는데, 잘됐다 싶었다.

그만 집에 들어가서 쉬어야겠다.

데이트? 맛집 탐방?

금요일도 다른 날과 크게 다를 것 없는 하루가 지나갔다.

학교에 갔고, 편의점 알바를 했고, 집에 와서 누나랑 조금 투덕거리다가 잠들었다.

물론 그 사이에 선행을 계속 쌓아 지금 내게 적립된 링크는 32였다.

오늘은 그렇게도 기다리던 토요일.

아랑이와 데이트할 생각에 새벽까지 잠 못 이루다 겨우 잠들었는데 동이 트기 전 눈을 떴다.

한두 시간 정도 잤나 보다.

하지만 피곤한 줄도 모르고 아침을 맞이했다.

머릿속은 오로지 아랑이와의 점심 식사로 꽉 차,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침을 먹으라는 누나의 말을 무시했다가 국자로 얻어맞았지만 상관없었다.

선행하러 나가자는 카시아스의 말을 무시했다가 꼬리에 목을 졸려 졸도할 뻔했지만 괜찮았다.

오늘은 온전히 나를 위한 날이다.

약속 시간이 되기 한 시간 전에 집에서 나왔다.

조각 공원에 도착하니 11시 30분.

약속 시간까지는 아직 30분이 남아 있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두 사람을 기다리는데, 갑자기 여인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들렸다.

“소매치기야!”

뭐야?

이런 대낮에 이렇게 탁 트인 장소에서 소매치기가 일어나?

모르긴 몰라도 엄청나게 돈이 궁한 모양이었다.

소란이 이는 곳을 바라보니 왜소한 체격에 청재킷을 걸치고 모자를 푹 눌러쓴 사람이 한 손에 지갑을 들고서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다.

그 뒤를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자가 쫓는 중이었다.

하지만 저런 스피드로는 도저히 소매치기를 잡을 수 없었다.

불행 중 다행인 건, 소매치기가 내 쪽으로 달려오고 있다는 것 정도일까?

대부분의 사람이 소매치기와 미니스커트 여인을 보며 안절부절못하는 사이 내가 움직였다.

소매치기가 지척에 다다랐을 때.

턱.

길게 다리를 뻗어, 발목을 걸었다.

“……!”

소매치기의 발이 허공으로 뜨고, 상체가 바닥을 향해 기울어졌다.

그런 소매치기의 허리를 한 손으로 감아 올렸다. 다른 손으로는 지갑을 빼앗아 미니스커트 여인에게 던져 주었다.

띠링!

―지나가던 소매치기를 붙잡아 선량한 시민을 도와주었네요? 누가 좀 소매치기를 잡아주었으면 하고 속으로 바랐던 사람들의 마음도 시원해졌을 것 같아요. 참 잘했어요. 선행을 쌓아 12링크가 주어집니다.

여인을 포함, 소매치기를 잡았으면 했던 이가 12명이나 되었나 보군.

내가 잠시 딴생각을 하는 새, 소매치기가 중심을 잡고 서서 도망치려 했다.

난 손을 번개 같이 내질렀다. 부리나케 멀어지는 소매치기의 뒷덜미를 쥘 셈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튀어나온 투박하고 주름 가득한 손이 나보다 먼저 소매치기의 뒷목을 낚아챘다.

“큭!”

소매치기가 헛숨을 들이켰다.

순간 소매치기를 잡은 것과 똑같이 생긴 또 다른 손이 녀석의 명치를 가격했다.

탁!

“크헉!”

그것은 딱히 힘이 들어간 공격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누가 봐도 그저 가볍게 두들긴 것 정도였다.

하지만 소매치기는 사지를 축 늘어뜨리더니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대낮에 이런 짓을 벌이다니. 정말 먹고 살기가 힘든 모양이지만, 그렇다고 남의 것을 탐하는 짓을 해서는 아니 되지.”

소매치기를 단숨에 제압하고 그리 말하는 이는 놀랍게도 나이 칠십은 족히 되어 보이는 노인이었다.

노인은 개량 한복 차림에 백발의 머리와 하얀 수염을 길게 기르고 있었다.

그 모습이 꼭 도인 같았다.

나와 노인의 주변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미니스커트의 여인이 빼앗겼던 지갑을 품에 안고서 우리에게 인사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 괜찮…….”

내가 괜찮다고 말하려 했는데, 노인이 갑자기 끼어들어 내 말을 잘랐다.

“허허허,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을. 공치사하려던 게 아니니 감사하다는 말은 넣어두시게.”

“아…… 네.”

여인은 더없이 감동한 얼굴이 되었다.

그런데 노인이 그런 여인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더니 진지한 음성으로 물었다.

“혹 배우자가 있는가?”

“네……? 아, 아니요.”

“그러하다면 미래를 약속한 사람이 있는가?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지금 교제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어, 없는데요.”

“그럼 나는 어떠한가?”

“……네에?”

여인의 표정이 감사함에서 경악으로 바뀌었다.

“이래봬도 여든아홉밖에 되지 않았다네. 아직 팔팔한 팔십대라 이 말일세. 팔 근육 한번 보겠는…….”

“그, 그럼 전 이만!”

여인이 꽁지가 빠져라 도망쳤다.

노인은 그런 여인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빙그레 미소 지으며 혼잣말을 했다.

“쑥스러워하기는. 귀여운 면이 있는 여인이구만. 헛헛헛.”

……뭐지, 이 노인?

소매치기를 제압하길래 대단한 노인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그냥 노망난 할아버지 같다.

아무래도 나 역시 이 자리를 빨리 피하는 게 상책인 듯했다.

이제 곧 아랑이와의 데이트가 있을 텐데, 괜히 이상한 일에 연루되긴 싫었다.

한데 노인이 이번엔 날 바라봤다.

“이보게, 청년.”

“네, 네?”

“운동신경이 보통이 아니더군.”

“감사합니다.”

대충 인사를 건네고 넘어가려 했는데 노인은 계속 말로 날 잡았다.

“게다가 몸도 보통이 아니야. 어지간한 충격에는 끄떡도 하지 않겠군.”

아니 그걸 어떻게 알았지?

내 몸이 보일 리가 없는데.

한겨울인지라 옷으로 꽁꽁 싸매고 나왔으니 투시라도 하지 않는 한 저런 말을 한다는 건 무리다.

그냥 대충 넘겨짚는 건가?

가만…… 그런데 이 할아버지…… 왜 얼굴이 낯설지가 않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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