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 히어로 002화
그런데.
화르르륵!
거대한 화염이 지척에서 일었다.
“헉!”
놀라서 뒤로 넘어졌다.
갑자기 치솟은 불길은 골목을 가득 채우며 내 앞을 가로막았다.
타탓.
패닉에 빠진 내 어깨 위에 무언가가 올라탔다.
검은 고양이였다.
녀석이 내 귓가에 입을 대고 악마처럼 속삭였다.
“이건 꿈이 아니야. 네가 미친 건 더더욱 아니고.”
그 순간 높이 솟구치던 불의 장막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비록 여기선 이런 모습이지만 난 저쪽 세계에서는 대마법사 카시아스라고 불렸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이게 다 꿈이 아니라고? 내가 미친 것도 아니라고? 그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건데?
“넌 그런 내게 선택된 행운아고. 네 인생이 갑자기 왜 불행해졌는지, 무엇 때문에 이다지도 힘든 하루하루를 견뎌내야 하는지 궁금하지 않아?”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검은 고양이의 그 말은 내 폐부를 찔렀다.
그리고 하루에도 몇 번씩 애써 잊어 넘기려 하는 기억들을 꺼내놓았다.
지금도 병실에 누워 병마와 싸우고 있는 엄마.
파리만 날리는 음식점을 지키면서 감당 못할 병원비로 불어나는 빚더미에 힘들어하는 아버지.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작은 회사 경리직에 들어간 누나.
그리고…… 정신 차려 보니 빵 셔틀이 되어 버린 나.
이러한 비극은 어느 한순간에 찾아왔다.
아버지의 음식점은 대박은 아니지만 생계를 유지할 만큼은 잘되었고, 엄마는 그런 아버지를 도와 주방일을 맡았다.
그런데 어느 날 엄마가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엄마는 병원 치료를 받으면서 건강이 점점 악화되어 주방일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주방 아주머니를 들이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손님의 발길이 뚝 끊기고 말았다.
엄마의 치료비는 점점 감당하기 힘든 수준이 되었다.
아버지가 가게를 접을 순 없는 노릇인지라 우리는 살던 전셋집을 빼서 지금의 허름한 월세 집에 들어오게 되었다.
아버지에겐 가게가 수입을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러나 갈수록 가게를 찾는 손님은 줄어들었고, 그만큼 빚은 늘어갔다.
미술 쪽에 재능이 있어 그쪽 방면으로 제법 촉망받던 누나는 미대 진학을 포기하고 박봉이나마 가계에 보태기 위해 직장인이 되었다.
서로의 아픔을 건들지 않기 위해 입을 다물고 있지만, 사실 전부 알고 있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우리 가족이 짊어져야 하는 빚의 크기도 무거워진다는 걸.
대체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걸까.
나는…… 우리 가족은 무엇 때문에 이토록 힘들어야 하는 걸까.
“우주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엔 이유가 있다. ‘그냥’이라는 건 없지. 네가 왜 힘들어야 하는지, 어떠한 연유로 갑자기 불행이 들이닥친 건지 알고 싶다면…….”
내 어깨에 올라탄 검은 고양이와 나는 한 뼘도 안 되는 거리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검은 고양이의 날카로운 눈동자는 내 모든 것을 꿰뚫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돈을 벌고 싶다면, 지금의 인생을 바꾸고 싶다면 내가 내미는 손을 잡아.”
……다른 건 모르겠다.
그저 돈을 벌어 인생을 바꾸고 싶지 않느냐는 말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맴돌았다.
고양이가 꼬리를 내 앞에 내밀었고, 나는 무엇에라도 홀린 듯 그의 꼬리를 잡았다.
고양이가 다시 차가운 미소를 머금었다.
“잘했어.”
* * *
내가 어렸을 때, 십수 년 후엔 자동차가 하늘을 나는 세상이 올 거라고 했다.
아니다. 십수 년 후엔 고양이가 말을 한다.
“지금까지 내가 한 말 이해했지?”
“…….”
당장 이 상황 자체가 이해되지 않는데, 갑자기 방언처럼 늘어놓은 그 수많은 정보를 어떻게 이해하란 말인지.
“이해 못했어? 보기보다 멍청하군. 담배 있지?”
“……뭐?”
“요새 고딩들은 다 태우던데, 하나만 줘봐.”
이젠 고양이가 담배까지 달란다.
“안 피워.”
“숙맥이군. 그보다 대답은?”
“무슨 대답?”
“내가 들려준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했냐고 물었을 텐데.”
사실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난 최대한 기억을 되살려, 그것을 더듬더듬 입으로 뱉어냈다.
“그러니까…… 넌 데브게니안이라는 곳에서 왔다 이거지? 이름은 카시아스고. 그 대륙에서 대마법사였는데…….”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지구로 넘어왔지.”
지금도 이걸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싶다.
그러나 거대한 불길을 일으켰다가 없애 버리는, 말하는 고양이가 눈앞에 있다. 이제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다.
“그 피치 못할 사정이 뭔데?”
“그건 비밀. 아무튼 여기까지 이해했어?”
“뭐…… 그래, 어떻게든.”
“앞으로는 네게 벌어지는 상황들을 더 빨리 받아들이는 게 정신 건강에 편할 거다.”
“가능하겠냐. 너무 말이 안 되는데.”
“세상에 말이 되는 일이 얼마나 있을 것 같아? 그 말이 된다는 것의 기준은 지구에 사는 인간들이 정해놓은 고정관념과 틀을 갖다 댔을 때, 거기에 벗어나지 않는 범주를 말하는 거겠지?”
“…….”
갑자기 저런 말을 하니까 입이 턱 닫혔다.
나와 반대로 카시아스의 입은 계속해서 열렸다.
“한데 그 범주에서 벗어난 일들도 지구에선 왕왕 일어난다는 걸 알아? 항공학적으로 봤을 때 꿀벌은 날 수 없지. 하지만 날아다녀. 왜? 항공학이라는 걸 인간이 만들었으니까. 그들의 상식에서 벗어난 구조를 꿀벌이 지녔으니 본디 날 수 없다고 판단해 버리는 거고. 하지만 꿀벌은 날아. 왜? 인간의 상식과 관계없는 그들만의 과학을 가지고 있으니까.”
“꿀벌이 날아다니든, 말든…….”
“이런 사건도 있었지. 어떤 사람 둘이 큰 배의 냉동 창고에 갇혔어. 그리고 동사한 채 발견됐지. 그런데 사실 그 냉동 창고는 작동하지 않고 있었어. 과학적으로 이게 말이 될까? 안 돼. 하지만 동사했단 말이야. 왜? 그들이 냉동 창고가 작동하고 있다 믿었기 때문이야.”
“…….”
“고양이가 말을 해. 그리고 다른 세계에서 온 대마법사라고 하고 있지. 이것 역시 지구에서 왕왕 일어나는 인간의 상식을 벗어난 일 중 한 가지야. 이제 받아들일 수 있겠지?”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이 고양이, 말발이 장난 아니다.
“머리로는 이해를 한다 쳐도, 그게 쉽사리 받아들여지진 않아.”
“고집이 센 놈이군. 그럼 천천히 받아들여. 됐지?”
알았다고 대답할 뻔했다.
대마법사가 아니라 사기꾼이었던 거 아닐까.
일단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그런데 그 대마법사 고양이가 왜 나를 택한 거냐고.”
“인생 역전시켜 주려고.”
“……그게 다야? 그런 이유라면 나보다 더 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을 텐데?”
“농담이 통하지 않는 놈이군. 설마 고작 그런 이유 때문에 널 택했을까?”
“그럼 뭔데?”
“나중에 말해줄게. 지금 얘기해 봤자 또 믿지 못하겠다고 발광할 게 뻔하니까.”
“하아, 그래서? 어떻게 내 인생을 역전시켜 주겠다는 건데?”
말을 하면서도 이게 지금 뭐하는 짓인가 싶다.
골목길에서 말하는 고양이를 만날 확률이 얼마나 될까? 로또나 번개에 맞을 확률보다는 훨씬 낮을 게 분명하다.
“선행을 해라.”
“선…… 행?”
“선행을 할 때마다 그에 응당한 값어치를 포인트로 환산해서 적립해 줄 거야.”
“뭐?”
“링크라는 이름의 포인트인데, 넌 그것으로 데브게니안 대륙에서 죽은 영혼의 힘을 살 수 있어. 싸구려 영혼의 힘일수록 적은 링크로 살 수 있지. 반대로 말하자면 강한 영혼의 힘은 많은 링크로 사야 한다는 건 알 수 있을 거고.”
“잠깐.”
난 고양이의 말을 막았다.
“내가 왜 선행을 해서, 링크인지 뭔지를 왜 모아야 하고, 그걸로 영혼의 힘을 왜 사야 하는 건데?”
녀석이 씩 웃었다.
“그 영혼의 힘은 네 것이 될 테니까. 죽은 영혼들이 살아생전 갖고 있던 능력 중 가장 뛰어난 것이 네 것이 된다고.”
“영혼의 능력이…… 내 게 된다고?”
“싸움질을 잘하던 영혼이라면 싸움의 기술이, 똑똑한 영혼이라면 그의 두뇌가! 요리사였던 영혼이라면 끝내주는 손맛이! 음유시인의 영혼이라면 노래 솜씨가! 그 모든 게 네 것이 될 수 있단 말이야.”
“……!”
이건…… 확실히 구미가 당기는 말이다.
그 어마어마한 능력들이 다 내 것이 될 수 있다고?
특별히 잘하는 것도, 잘난 것도 없는 내가 그런 만능형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거야?
“그럼 혹시…… 의술에 뛰어났던 영혼도 있을까?”
“그건 장담할 수 없어. 네가 링크를 모아 영혼을 하나둘 사면서 확인해 봐.”
“그래…….”
만약 현대의 의학을 뛰어넘는 의술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그게 내 능력이 된다면.
난 엄마의 병을 고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검은 고양이…… 아니, 카시아스는 지구에서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기적 같은 일들을 보여주고 있다.
일단 다른 세상의 존재가 지구로 넘어왔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다.
그리고 고양이가 말을 하는 것도, 불길을 일으켰다 없애는 것도, 이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기적과 다름없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고치기 힘든 병도 카시아스가 살던 세상의 힘을 얻는다면 충분히 고칠 수 있을지 모른다.
여태껏 난 어둠으로 가득한, 끝이 없는 터널을 하염없이 걷는 듯했다.
그런데 그 터널의 끝에 희미한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난 그 빛을 놓치기 싫다.
잡고 싶다.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어. 내가 하자는 대로 하면.”
하지만 정말 괜찮은 걸까?
세상 모든 일이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게 마련이다.
“내가 잃게 되는 건 없어?”
“있지.”
“그게 뭐지?”
“더 이상 너는 네가 속한 세계에서 평범하게 살 수 없을 거다.”
“뭐? 그게 다야?”
그게 리스크가 될 수 있는 건가?
“평범함이 사라진다는 것, 그게 얼마나 힘들고 피곤한 일인지 너는 아직 몰라. 큰 힘엔 큰 사건이 꼬이고, 큰 대가가 따르게 마련이다. 그 대가는 좋은 일일 수도, 나쁜 일일 수도 있겠지.”
그렇게 말하니 고민이 된다.
아직 내가 겪어보지 못한 삶을 고양이는 얘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차피 지금도 평범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고 있잖은가?
‘더 나빠질 것도 없어.’
“계약하겠나?”
그래, 끝까지 한번 가보자.
난 고개를 끄덕였다.
“하겠어.”
“돌이킬 수 없다.”
“돌이킬 생각 없어. 어차피 이대로 살아봤자 나아질 건 아무것도 없어.”
“좋군.”
카시아스의 앞발이 내 뺨에 닿았다.
푹.
“윽.”
녀석이 발톱 하나를 세워 살을 살짝 뚫었다.
그러고는 반대쪽 발을 제 입으로 물어 피를 냈다.
피가 난 카시아스의 발이 상처 난 내 뺨에 닿았다.
우리 둘의 피가 섞였다.
내가 무얼 하는 거냐고 물을 새도 없이 카시아스가 입을 열었다.
“계약을 시작한다.”
“계약?”
“이제 너와 나는 피의 맹약을 맺게 된다. 넌 레이브란데의 인과율에 따라 선행을 쌓을 때마다 링크를 얻을 것이며, 그것으로 영혼의 힘을 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