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 히어로 001화
프롤로그
21세기 대한민국.
최첨단 과학이 지배하는 세상.
그 안에서 살고 있던 내게 어느 날 주어진 천재일우의 기회.
‘선행을 쌓으면 초자연적인 영혼의 힘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
그게 지금 내 인생의 팩트다.
선행 셔틀
“야, 빵 셔틀!”
중학교 때까지만해도 저 단어가 나와 상관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가 갈리게 만든다.
까드득.
어쩔 수 없이 일어나 태진이에게 갔다.
책상에 두 다리를 걸치고 의자를 뒤로 살짝 눕혀 앉아 있는 태진이의 입에 비릿한 미소가 걸려 있다.
녀석과 가까워지는 몇 걸음 동안 머릿속에선 의자로 놈의 정수리를 내려찍는 상상을 몇 번이나 한다.
그것만으로도 손발이 차가워지고 머리가 핑핑 돈다.
진짜 그런 행동을 한 것도 아닌데 숨이 가빠졌다.
난 겨우 충동을 눌러 참았다.
아니, 사실 그런 행동을 할 용기가 부족한 것이다.
태진이의 앞에 서자 녀석이 내게 물었다.
“4교시 수업 뭐냐?”
“……체육.”
“쉬는 시간 몇 분 남았어?”
“2분.”
“그럼 매점 가서 고로케 세 개랑 딸기 우유 세 개 사 와.”
……씹새끼.
죽이고 싶다, 진심으로.
“……지금?”
“그럼 뭐, 하교할 때 사 올 걸 지금 미리 사두라고 할까?”
매점까지 가는 데만 2분이 걸린다.
그것도 달려가야 그렇다.
이번은 체육 시간이고, 담당 선생은 게슈타포다.
별명처럼 교권이나 학교 정책에 반하는 학생들을 무섭게 탄압하고 몽둥이로 다스린다.
게슈타포에게 반항이나 하극상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키는 190이 넘고 우락부락 근육질 몸매에 서구적인 얼굴이 특징인데, 전신에서 함부로 다가가기 힘든 아우라 같은 것이 풍겨진다.
그러다 보니 학교에서 좀 논다는 학생들도 감히 게슈타포에게는 대들지 못했다.
이제 고3의 끝자락이고 수능이 앞으로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러나 게슈타포는 기어코 학생들에게 체육 활동을 시켰다.
그런 게슈타포가 특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었다.
자기가 운동장에 나오기 전에 학생들이 미리 나와 오와 열을 맞춰 줄을 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게슈타포의 몽둥이가 불을 뿜는다.
그런데 2분 동안 매점을 갔다 오라고?
진심으로 태진이를 갈기갈기 찢어놓고 싶다.
나한테 힘만 있었다면 홀딱 벗겨서 밧줄로 묶어 학교 운동장에 던져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나한테는 그럴 힘이 없다는 게 문제다.
태진이가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 툭 던졌다.
그것은 팔랑거리며 내 발 앞에 떨어졌다.
“거스름돈 잘 받아 와. 난 나가 있는다.”
허리를 숙여 지폐를 줍는 그 동작 한 번이 너무나 힘들었다.
교실에 있는 모든 학생이 날 보고 있는 것 같다.
속으로 다들 비웃겠지.
이런 내가 너무 초라해 미칠 지경이다.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걸까?
기억을 더듬어봤다.
그래, 사실 시작은 별게 아니었다.
태진이와 같은 반이 된 1학년 시절, 교실에서 실수로 녀석과 어깨가 부딪혔다.
그때까지도 난 또래보다 키가 좀 더 큰 조용한 학생이었다.
그런데 태진이는 나를 본보기라도 삼듯 무섭게 구타했다.
반 학생들이 다 보는 와중에 난 저항 한 번 못 해보고 심하게 짓밟혔다.
그날 이후, 태진이는 이유도 없이 날 괴롭혔다.
내가 그 녀석에게 무슨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
그냥 그놈은 날 장난감 삼아 다른 학생들에게 경고를 주고 있는 것이었다.
누구라도 내 입장이 될 수 있었다.
내가 재수가 없었던 것뿐이다.
그게 다였다.
이 상황을 벗어나는 방법은 두 가지밖에 없다.
내가 학교를 그만두든가…… 아니면 태진이를 조져 버리든가.
* * *
게슈타포가 선글라스를 벗었다.
그리고 호랑이 같은 눈으로 늦게 온 나와 내 손에 들린 검은 봉지를 번갈아 봤다.
두근두근두근.
이러다가 심장 터지는 거 아닐까.
게슈타포는 성난 황소마냥 내게 다가왔다.
“유지웅.”
“……네.”
“배 많이 고팠나?”
“아니요…….”
“근데 매점에서 뭘 그렇게 많이 사 왔나?”
“…….”
“유지웅.”
“네.”
“너 한 놈이 늦게 오는 바람에 다른 학생들이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며 기다려야 했다. 그 시간을 네가 보상할 수 있나?”
“……죄송합니다.”
게슈타포가 내 손에 들린 봉지를 거칠게 빼앗아 머리 위에 대고 거꾸로 털었다.
후두두둑.
고로케와 초코 우유들이 몸을 두들기며 우르르 쏟아졌다.
“혼자서 이걸 다 먹으려고 했나?”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난 슬쩍 태진이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놈이 시린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고 싶으면 말해보라는 제스처다.
진짜 저 개새끼를…….
“그게 아니면!”
게슈타포가 다시 물었다.
“……유지웅.”
저 인간이 내 이름을 부를 때마다 숨이 턱턱 막힌다.
“대답 안 하나!”
“네.”
“엉덩이 열 대. 운동장 서른 바퀴. 둘 중에 선택해.”
저 인간의 불몽둥이 열 대를 맞으면 죽을지도 모른다.
“운동장 서른 바퀴 뛸게요.”
“실시!”
난 억울하다며 반항할 생각도 못 한 채, 운동장을 뛰기 시작했다.
그런 내 뒤로 태진이 패거리의 비웃음소리가 들려왔다.
* * *
운동장 서른 바퀴는 내게 너무 벅차다.
인정하기 싫지만 내 몸은 건강함과는 거리가 멀다.
키는 제법 크지만, 몸에 근육은 하나도 없어 깡말랐다.
“헉헉!”
아직 10바퀴도 뛰지 않았는데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다.
다른 친구들은 그런 날 거들떠도 안 본 채 게슈타포를 따라 수업을 하고 있었다.
아니, 단 한 명.
나만큼은 아니지만 친구들이 상대를 안 해주는 은따 상덕이만 애매한 얼굴로 힐끔힐끔 날 살폈다.
상덕이는 중학교 때부터 내 친구다.
고등학교 와서도 유일하게 나랑 친구를 하는 놈이다.
다만, 학교에서는 남인 척 지내는 게 흠이지만.
같이 왕따당할까 봐 겁나서 곁에도 안 온다.
친구라는 놈이 너무한 거 아닌가 싶다.
그나저나 서른 바퀴를 언제 다 채우나.
입에서 단내가 난다.
* * *
학교의 모든 수업이 다 끝났다.
난 종이 치자마자 얼른 교실을 빠져나왔다.
뒤도 안 돌아보고 달려서 교문을 나섰다.
버스 정류장에서 막 출발하려는 버스를 잡아타고 다섯 정거장을 가서 내렸다.
넓은 대로변을 따라 걷다가 오른쪽으로 꺾어지는 골목에 들어섰다.
사람 하나 없이 한적한 이 길의 주변으로는 오래된 주택만 가득했다.
신축 건물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오래전부터 이곳에 살았거나 사정이 여의치 않은 사람들만 이사를 오는 동네다.
우리 가족은 후자였다.
사실 일 년 전까지만해도 이런 동네에 내가 살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그러나 일 년 사이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 때문에 우리 가족은 바닥으로 추락했고, 이 동네로 이사 오게 되었다.
모든 것은 그놈의 돈 때문이었다.
온 가족이 힘들게 사는 것도, 내가 하루하루 더 위축되어 가는 것도, 그 빌어먹을 돈 때문이었다.
돈만 있었다면 이렇게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저런 상념에 젖어 골목길을 걷는데.
‘……?’
갑자기 인 생소한 기운에 정신이 휙 휘말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골목길이 어딘지 모르게 평소와 달랐다.
분위기라고 해야 할까?
내가 매일같이 발 도장을 찍는 곳인데도, 낯설고 기이했다.
이상하리만치 공기도 무거웠다.
지금은 가을의 끝 무렵이건만 마치 한여름의 내리쬐는 태양을 맞는 것처럼 몸이 처지고 숨 쉬는 것도 불편했다.
한 발 한 발 내딛기가 꺼려지는 마음을 추슬러 앞으로 계속 걸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집이다.
그런데.
휙!
무언가 작고 검은 물체가 내 앞을 바람처럼 지나갔다.
“으악!”
놀라서 뒤로 넘어지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고개를 돌려 조금 전 그 물체를 찾았다. 없었다. 시야를 조금 높였다.
담벼락 위에 고고하게 선 작은 생명체가 파랗고 시린 눈으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이없게도 그건 검은 고양이였다.
한데…… 고양이에게서 풍기는 기운이 마치 호랑이를 대면한 것처럼 무시무시했다.
이 압박감은 뭐지?
요새 하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살았더니 심적으로 약해진 건가?
늘 다니던 골목을 두려워하고, 고양이에 놀라다니.
‘저건 고양이야. 호랑이가 아니야.’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한다.
내 정신이 약해져서 별거 아닌 일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걸 거야.
무시하자.
우리 집 대문이 저 멀리 보인다.
뛰어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검은 고양이한테 놀랐다는 걸 들키기 싫다.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검은 고양이 한 마리만 날 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녀석에게 내가 놀란 모습을 내보이기 싫었다.
이상한 일이다.
터벅터벅.
최대한 침착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검은 고양이도 나를 따라 담벼락을 걷기 시작했다.
‘뭐야, 저놈?’
난 기본적으로 고양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는 고양이의 이미지는 지독한 이기주의에 사람을 관찰하는 기분 나쁜 눈, 소름 끼치는 울음소리, 그게 전부다.
‘신경 쓰지 말자.’
애써 마음을 다잡으며 걸음을 더 빨리하려는 그때.
“돈을 벌고 싶지?”
갑자기 내 귓속으로 들어온 중성적인 음성이 발길을 붙잡았다.
성별을 분간할 수 없는 특이한 음성 때문만은 아니다.
던져진 질문이 내가 지금 가장 간절히 바라는 욕망에 대해서기 때문이다.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오늘따라 더 외롭고 을씨년스러운 골목길엔 여전히 나 혼자였다.
그럼 대체 누가 말을 건 걸까?
설마 하며 위를 바라봤지만 구름 한 점 없이 깨질 듯 파란 하늘만 나를 반겼다.
담벼락의 검은 고양이의 소름 끼치는 눈동자는 여전히 나를 향해 있었다.
귀신에 씌기라도 한 건지, 골목길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모든 것이 이상했다.
잠시 멈췄던 걸음을 다시 떼려 했다.
“필요하잖아, 돈. 그것도 많이.”
“누구야!”
개는 사실 무서워서 짖는 거라고 한다.
나는 두려움에 떠는 개처럼 비명을 지르며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아무도 없었다.
그때.
“여기다.”
믿기 싫었지만, 그 소리는 몸을 돌린 오른쪽, 그러니까 담벼락 위에서 들려왔다.
서서히 고개를 움직였다.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었고, 두 눈엔 검은 고양이가 들어왔다.
이어,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벌어졌다.
검은 고양이가…… 웃었다.
사람처럼, 입꼬리 한쪽을 쭉 말아 올렸다.
너무 놀라면 다리에 힘이 풀리고 비명조차 나오지 않는다던데, 지금 내가 딱 그렇다.
도망가고 싶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머리카락이 쭈뼛거리며 섰고 정신이 멍해서 허공에 붕 떠있는 것 같았다.
턱.
겨우 한 발을 뒤로 뺐다.
그다음엔 다시 한 발을 움직여 몸을 돌렸고 집을 향해 절뚝절뚝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