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4. 끝장전.-2-
"내가 곰곰이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나온 결론인데."
"응."
"류찬혁 이 새끼, 아무래도 또라이거나 미친놈이거나 병신 중에 하나는 확실한 것 같아."
"……."
참으로 오랜만에.
아니, 사실상 거의 처음으로 나현주는 김철정의 뻘소리에 차마 반박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솔직히 마음속 한구석에선 김철정의 말을 듣기도 전부터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이 있었다.
준비기간을 합쳐 1년에 가까운 대장정의 끝자락에 다다른 글로벌 푸드 서바이벌.
그 결승전의 대미를 장식하는 자리에서, 설마 경기가 시작하자마자 맨바닥에 드러누울 것이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으니까.
베개 하나만 달라져도 쉽게 잠들지 못하는 버릇이 있는 나현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아니, 버릇 이전에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아무리 자고 싶어도 꾹 참고 볼 텐데…….'
학창시절부터 몇 번이나 기행을 선보이던 찬혁이지만 오늘은 그야말로 레전드였다. 새로운 기록경신이다. 그다지 축하해주고 싶은 기분은 들지 않았지만 말이다.
"야, 반 톡방 터졌다 터졌어. 찬혁이 나오자마자 막 올라가더니 이젠 채팅도 안 쳐져. 서버 터졌나 봐."
"…… 터지기도 하는 거였어, 그거?"
"나도 태어나서 처음이다. 이거 봐봐. 스트리밍 사이트도 실시간 채팅 제한 걸었다."
하긴 그럴 만도 하다. 김철정은 생각했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한국 스트리밍 채널 실시간 시청자가 500만 명인가 그랬었지?'
말이 5백만이지, 조금 말을 바꾸면 전국민의 10%. 한국사람 열 명 중 하나는 이 방송을 보고 있단 뜻이었다.
누군가와 같이 본다거나 하는 경우의 수를 합하면 그보다 훨씬 늘어날지도 모른다.
심지어 이조차 국내에 한정한 이야기. 해외의 시청자까지 생각하면 못해도 그 열 배는 될 터.
그런 많은 사람이 승부의 길항을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는 와중에 수면을 택하다니. 본인 인생이 걸린 자리에서 저럴 수 있는 것 자체가 어느 의미 재능이었다.
"뇌신경이 뭐 쇠심줄로 된 것도 아니고. 왜 저렇게 태연해? 방금 브이 한 거 봄?"
"짐승도 저것보단 예민할 텐데."
"…… 야, 네가 말하니까 현실감 쩐다 그거."
도축업자 부모님 아래서 자란 소녀의 신랄한 평가에 김철정이 어깨를 움츠렸다.
"그나저나, 이제 일어난 건 좋은데 찬혁이 쟤 뭐 하는 것 같아?"
"아직 잘 모르겠어. 준비한 건 삼겹살 같아 보이는데."
농담을 멈춘 나현주와 김철정의 눈매가 가늘게 변한다.
대화하는 것만 보면 평범한 고등학생인 두 사람이지만, 이들 또한 국내 최고의 요리전문 학교에서 최고급 영재교육을 높은 성적으로 수료한 인재들이다.
요리에 대한 경험 자체는 아직 일천할지 몰라도 지식과 열정만큼은 현장에서 뛰는 프로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
하지만 그런 이들조차, 찬혁이 무슨 요리를 만들 생각인지 알 수가 없다는 건 그만큼 그들 사이에 커다란 능력 차이가 있다는 증거일까.
어느새 저 멀리까지 앞서 나가 버린 친구의 모습을 쓸쓸한 눈으로 바라보는 김철정이었으나, 이내 그 눈에는 흥미만이 남아 찬혁이 만드는 요리를 살핀다.
"포장 뜯긴 게 냉장고에서 나온 거 보니까 수분 제거는 얼추 끝냈나 보네."
"자기 전에 그 정도는 해두고 잔 거겠지. 척수까지 순수해진 것 같진 않아서 다행이다."
"…… 뭔가 워딩이 좀 쎄지 않냐, 너 오늘."
"쎈 건 쟤 낮짝이지."
"오키, 인정."
절로 납득이 가는 반론에 재빨리 고개를 끄덕인 김철정은 다시 시선을 돌려 찬혁의 화면을 살핀다.
고운 소금을 살짝 도포하여 삼투압 효과로 고기 내부의 불필요한 수분을 어느 정도 용출한 뒤 키친타월 따위로 깨끗하게 닦아내고, 습기가 억제되는 냉장실에서 미세한 습기마저 깔끔하게 제거한다.
번거로운 과정이지만, 이 과정을 통해 고기 자체가 가진 감칠맛을 훨씬 강화함과 동시에 구울 때 생기는 오차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다.
냉장 유통 생고기를 사용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현명한 방법중 하나다.
'하지만…….'
그러나 나현주는 생각한다.
왜 굳이 찬혁은 삼겹살을 선택한 걸까.
고기 자체의 맛에 집중할 생각이라면 돼지고기보다는 소고기가 낫다.
돈육과 우육 사이에 상하관계가 있다는 뜻이 아니라 고기 자체의 취급 방법 때문이다.
드라이 에이징이라고 불리는 기법이 있다.
고기를 세균, 수분, 산소 접촉이 최대한 적은 환경에서 최소 한 달 이상 장기간 숙성시켜 고기 본연의 맛을 극한까지 끌어내는 기법이다.
고기가 썩기 직전의 상태일 때 분비되는 단백질, 지방 분해 효소로 인해 고기 자체에 깊게 자리 잡은 아미노산의 감칠맛이라든가 하는 난해한 화학적 지식 이야기는 잠시 미뤄두자.
보통 고기를 드라이 에이징 할 때 자주 사용하는 고기는 쇠고기다.
돼지고기로 드라이 에이징을 할 수 없는 건 아니지만, 문제는 고기가 아니라 그 제조 방법 자체다.
건조 숙성 후 오염되어 먹을 수 없는 겉 부분을 상당량 도려내야 하는 드라이 에이징.
고기 맛의 감초 역할을 해주는 지방이 대부분 근육의 결 사이사이에 위치한 쇠고기는 그렇게 도려내도 큰 문제가 없지만, 드라이 에이징이 가능한 부위의 지방의 대부분이 껍질과 피하지방에 위치한 돼지고기는 그것이 아주 커다란 피해로 돌아온다.
'돼지고기가 소고기와 차별화되는 점은 껍질과 지방에서 나오는 식감과 맛의 다양함. 그런데 그걸 다 잘라 버리면…….'
드라이 에이징으로 맛을 얻기 위해 가장 강력한 무기 두 개를 자기 손으로 버려야 한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이미 안정성, 기술력, 이름값. 다양한 부분을 선점한 쇠고기를 사용하는 편이 훨씬 낫다.
'그런데도 일부러 돼지고기 냉장육을 썼어. 드라이 에이징의 함정은 이미 알고 있었단 뜻이야.'
자신이 선택한 식재료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해라. 학교에서 누누이 들었던 말이다.
"대체 어떤 요리가 나올 건지 모르겠네……."
고기를 간단히 처리한 찬혁은 그것을 진공포장기로 밀봉하여 다시 냉장고에 넣는다.
시즈닝은 없이 간단한 드라이 허브와 몇 가지 향신료. 고기 자체에 약간의 향을 더해주기 위한 처치로 보였다.
그다음, 찬혁은 커다란 냄비를 꺼내 화구 위에 올려놓는다.
'물이라도 끓일 생각인가?'
설마 저렇게 해놓고 수육을 할 생각은 아니겠지. 속으로 꺼낸 농담에 나현주가 작게 헛웃음을 지을 찰나였다.
"어?"
갑자기, 찬혁이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한다.
화구 위에 올린 육수용 냄비.
그것을 향해 다가가는 찬혁의 손에 들린 물건이, 어딘가 눈에 익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물이 아니다. 철통이었다.
그 철통에는 이러한 글자가 쓰여 있다. aceite de oliva virgen extra.
스페인어다. 딱히 나현주가 스페인어를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너무 자주 본 탓에, 딱히 해석을 하지 않더라도 저게 무엇인지 알아볼 수 있을 뿐이다.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 오일……?"
그렇다. 찬혁의 손에 들린 커다란 철통에는 올리브 오일이 담겨 있었다.
그것도 올리브 열매를 가장 처음 압착하여 뽑아냈음을 뜻하는 엑스트라 버진. 유리 지방산 함량이 0.2% 이하인 스페인산 최고급 올리브 오일의 상표.
학교에서도 중간, 기말고사 실기 시험 때처럼 중요한 순간이 아니면 손댈 기회도 몇 번 없는 물건이다.
700ml 병 하나에 자그마치 십만 원을 넘는 가격을 호가하는 고급품.
단순 계산으로 찬혁의 손에 들린 저 10리터 들이 철통 하나의 가격은 물경 백만 원 이상이라는 뜻이었다.
"잠깐, 설마."
나현주가 자신의 의심을 채 입 바깥으로 꺼내기도 전에, 찬혁은 행동을 개시했다.
─주르륵!
10리터가. 100만 원이, 황금빛으로 빛나는 저 고귀한 액체가 그 어떤 존중도 없이 냄비 속으로 쏟아진다.
"무, 무슨 짓이야!?"
나현주는 기함을 질렀다. 아마 저 오일의 가치를 아는 이들이라면 누구든 그녀와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다.
저 정도면 가히 식재료에 대한 무례라고 불러도 된다. 세상에, 드레싱이나 소스에 한 큰술만 넣어줘도 요리 전체의 가치를 올려주는 존귀한 식재료를 어떤 바보 천치가 저렇게 다룬단 말인가?
올리브 오일은 공기와 닿는 시점부터 맛이 변한다. 저렇게 다 꺼내버리면 이미 그 순간 가치가 하락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찬혁의 기행은 이번에도 멈추지 않는다.
"아니야. 안 돼. 안 돼! 안 된다고!"
─화륵!
불을 붙였다. 그렇다. 불을 붙인 것이다.
괜히 냄비에 담아 화구 위에 올려둔 게 아니라는 듯. 찬혁은 아무 거리낌도 없이 가스에 불을 붙였다.
이제 정말 끝이었다.
저 올리브 오일은, 단 한 번의 요리에 자신에게 내재된 모든 능력을 사용하게 됐다.
아니, 사용할 수밖에 없게 됐다. 다름 아닌 찬혁의 손에 의해서.
"뭐야…… 설마 튀김이라도 할 생각인 거야……?"
보통 평범한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 오일은 발연점이 낮아 튀김에 쓸 수 없지만, 유리 지방산 함량이 낮은 고순도 오일은 튀김을 하는 데에도 사용이 가능하다.
특히 찬혁이 사용한 유리 지방산 함량 0.2% 이하인 저 최고급 올리브 오일의 발연점은 약 200도 이상.
화력 조절에 따라선 튀김을 하는 데에도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다.
"낭비잖아……."
하지만 그건 너무 돈낭비다. 올리브 오일로 튀기는 조리법을 가진 요리가 없는 건 아니지만, 대부분은 잔여물이 거의 없는 퓨어 올리브 오일을 쓰는 방식으로 해결한다.
심지어 저렇게 많이 사용할 필요조차 없다. 3리터 정도만 사용해도 충분했을 것이다.
'찬혁이 방식이 아냐.'
나현주는 안다. 본래 찬혁은 식재료의 낭비를 굉장히 싫어하는 편이다.
설령 조리법에 과장을 섞어 상대를 압박하기 위한 방식으로 요리를 한다고 해도, 결과물을 보면 결코 헛되게 재료를 사용하는 법이 없다.
'그럼 대체 저 많은 오일은 어떻게 쓸 생각이지?'
도통 알 수가 없는 찬혁의 속내. 나현주는 화면 너머에서 의미심장한 얼굴로 웃는 찬혁을 바라보며 묻는다.
그러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다. 이건 단방향 통신이니까.
작게 한숨을 내쉬며 화면에서 잠시 시선을 돌린 나현주.
그리고 고개를 돌려 옆에 앉아 있던 김철정을 바라본 순간, 그녀는 저도 모르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자신이 가져온 노트북을 놔두고 제 핸드폰 화면만 뚫어져라 바라보는 김철정.
그의 손에 들린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담긴 카페의 유리컵이, 무식할 정도의 악력에 빠득거리는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야! 손!"
나현주는 말로 제지할 새도 없이 김철정의 손목을 움켜잡는다.
비슷할 정도의 악력으로 힘을 분산해주자, 그제야 비틀리는 소리를 멈춘 컵.
손목을 조이는 힘에 퍼뜩 정신을 차린 김철정이 자신을 바라본 다음에야 나현주는 그의 손목을 놔줄 수 있었다.
그러나 김철정의 표정은 여전하다.
마치 벌에 쏘이기라도 한 것 마냥, 치켜뜬 두 눈의 눈꺼풀이 내려올 생각을 않는다.
"뭐야. 왜 그래?"
영문을 알 수 없는 반응에 나현주가 질문을 건네자, 잠시 말을 고르던 김철정이 답했다.
"…… 야, 아무래도 찬혁이 얘 엿된 것 같은데."
"…… 무슨 소리야?"
나현주의 반문에, 그는 별다른 대꾸도 없이 자신이 보던 핸드폰의 화면을 그녀를 향해 돌리곤 답했다.
"로랑 마틴. 아무래도 지금 뭘 만들고 있는지 알아낸 것 같아."
마른침을 꿀꺽 삼킨 그가 이어 말한다.
"…… 오르톨랑이야. 오르톨랑을 만들고 있다고, 지금."
그 낯선 단어에, 나현주가 소리 없는 비명을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