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3. 끝장전.-1-
약 두 시간.
한국팀과 프랑스팀이 도합 2천 개에 달하는 만두와 토르텔로니의 물량을 전부 소진하는 데에 걸린 시간이었다.
말이 두 시간이지, 분으로 치면 고작해야 120분. 자격증 실기 시험에서 요리 두 접시를 만드는 데에 주어지는 시간이 고작 30~40분 남짓하단 걸 생각하면 엄청난 속도였다.
"로랑이 선작업을 해놓고 가서 생각보다 빨리 끝났네요."
"그러니까 말이다. 쉬림프 오일 같은 걸 만들어 놨을 줄은 몰랐어."
올리브 오일에 프레시 허브와 마늘, 그리고 새우를 손질하고 나온 새우 머리를 끓여 만든 쉬림프 오일.
언제 그런 걸 준비할 시간이 있었는지, 로랑이 자신의 조리대 화구에 올려놓고 떠난 통을 노크하듯 두드리는 헬레나의 말에 루이가 공감했다.
'뭐, 저게 없었어도 그냥 올리브 오일을 쓰면 됐겠지만…….'
그렇게 되면 시간 차이는 별로 없다 해도 맛의 차이가 크다.
"숫자만 채우면 이기는 시합에서 맛까지 챙기려 들다니. 난놈은 난놈이야."
"마틴이란 이름이 허명은 아닌가 봅니다."
"그것도 맞는 소리긴 하지만. 사자 새끼라고 전부 사바나를 호령할 수 있는 건 아니야."
짧게 대꾸한 루이가 말을 이었다.
"아무튼, 이쪽은 벌써 두 시간이나 지났으니 로랑 녀석은 이미 개인 조리실에 들어갔겠구만."
"이길 수 있을까요?"
"몰라."
"예?"
"모른다고. 애당초 난 우리가 이 대회 첫 시합에서 질 줄도 몰랐는데 결승전이라고 뭔들 알겠냐."
사실 어느 팀이 됐든 시작하자마자 패배할 거란 생각은 하지 않겠지만, 스스로를 미식의 나라라고 자칭하는 프랑스의 셰프들은 더더욱 그러했다.
그만큼 한국팀을 상대로 겪은 패배는 충격적이었다.
다만 길조였던 것은, 충격이 그저 무의미한 여파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
자신이란 이름의 알껍데기를 부술 정도의 충격을 이겨내고 우화함으로써 사람은 변한다. 로랑이 바로 그 대표적인 예다.
'그것도 좋은 방향으로 변했지.'
그 정도면 아주 드문 경우에 속하리라. 보통 패배로 인한 변화는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일이 적으니까.
루이는 생각을 이어나갔다.
'그렇다면…….'
여태껏 패배를 모르고 살았던 천재 소년.
그런 아이가 우승을 코앞에 두고 고작 한 걸음 차이로 패배했다면, 과연 그 충격은 자신들이 겪었던 것보다 더 작을까?
'아니. 그건 아닐 거야.'
사람은 어릴수록 경험에서 얻는 자극에 예민하다. 세월이라는 이름의 장벽이 마음을 채 감싸지 못했기 때문이다. 감수성이 풍부한 시기라는 말이 괜히 있을까.
첫 패배라는 충격에 더해 결승전의, 대회 전체의 결과가 온전히 제게 달린 무게감.
그만한 부담을 쉽게 떨쳐내진 못할 것이다. 루이는 그렇게 믿었다.
아니, 사실 믿는다기보다는 그게 상식이었을 뿐이다.
'물건을 놓으면 떨어진다'는 상식을 '믿는' 사람은 없지 않는가. 아예 우주로 나가서 사는 사람이 아닌 이상 말이다.
"팀장님. 제작진 쪽에서도 준비를 끝낸 것 같습니다. 곧 실시간 생방송도 송출될 것 같아요."
"좋아. 같이 볼 수 있게 TV에도 세팅 좀 부탁한다."
"예."
24시간 동안 치러지는 이번 개인전은 조리실 전체를 실시간으로 방송한다.
조리실 내 선수의 출입을 엄격하게 제한하고 통신 기구까지 수거한 건 바로 이 때문이다.
외부의 조력자가 상대의 정보를 흘려 경기를 돕는 것을 막기 위하여.
"고독한 싸움이로구만."
같은 개인전이라도 스테이지 위에서 하는 것과는 전혀 결이 다르다.
상대도, 응원해주는 관객도 없이 혼자서 이기기 위한 요리에 전력을 다해야 하는 상황.
'저러면 더 힘들어지지.'
바깥에서 답을 얻을 수 없을 때엔 자기 자신에게서 얻어야 하는 법.
그러나 스스로 답을 얻는 건 남에게 물어서 얻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답을 얻는 과정 속에서 마모되는 멘탈을 과연 얼마나 지킬 수 있을 것인가.
루이가 팔짱을 낀 채 숙소의 소파에 앉자, 노트북과 동기화한 TV 화면에서 인터넷 생방송 화면이 송출된다.
화면에 먼저 모습을 드러낸 것은 로랑이었다.
"재료는 벌써 다 고른 건가? 방송이 시작되기 전부터 준비를 시작한 것 같은데."
"메추리에 과일…… 장시간 조리를 할 수 있는 식재료인가요?"
"모르지."
털 정리조차 되지 않은 메추리를 세심하게 손질하는 로랑의 모습에 헬레나가 의아함을 드러낸다.
보통 장시간 조리에 사용하는 식재료는 육고기를 주로 사용하며, 그것도 소분하지 않은 덩어리 고기일 때가 많다.
장시간 조리라는 이름이 붙을 만큼 오랜 시간 조리해서 제대로 된 형태를 남겨놓을 수 있는 재료가 기껏해야 그 정도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메추리라니…… 응?'
그 순간, 헬레나는 화면에서 무언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여태껏 메추리라고 생각했던 그 고기가, 본인이 아는 것보다 훨씬 작다는 사실을 눈치챈 것이다.
"…… 메추리가 아니잖아?"
훨씬 사이즈가 작은 새. 이제는 깃털까지 전부 제거한 탓에 정확한 종류를 알아보기도 힘들지만, 일단 메추리가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대체 뭘 만들 생각인 건지."
헬레나의 불퉁스런 혼잣말에 다른 팀원은 어깨를 으쓱일 뿐이다.
화면이 잠시 암전되고, 이번에는 화면 한쪽 구석에 작게 비치고 있던 찬혁의 조리실이 확대된다.
루이가 기다린 순간이었다. 과연 찬혁이 어떻게 행동하고 있을까. 폰의 움직임을 보면 킹의 행방을 알 수 있는 법. 초동을 살피면 결과 또한 알 수 있을 것이다.
"응?"
그렇게 생각하던 루이의 눈에 이상한 것이 보인다.
루이는 찬혁이 지금쯤 숨 가쁘게 움직이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부담감을 이겨냈든 그러지 못했든, 이기기 위해서 온힘을 다하는 것이 찬혁의 평소 행실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들 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자고…… 있잖아……?"
자고 있다. 그렇다. 찬혁은 자고 있었다.
바닥에 대충 펼친 신문지와 박스 위에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접이식 매트릭스를 깔고, 그 위에서 모포를 뒤집어쓴 채 잠들었다.
방송국에서 설치한 마이크에선 코고는 소리마저 들린다.
말 그대로, 누가 업어 가도 모를 만큼 세상모르게 깊은 잠에 빠진 것이다.
"허, 허허."
정상이 아니다. 루이는 저도 모르게 입 속으로 웅얼거리곤, 잠시 후 깨달았다.
안 그래도 상식을 벗어난 세상의 기재가 많은 이 대회.
그중에서도 가장 비상식적인 인물이, 바로 화면 너머의 저 소년이라는 사실을.
***
자! 당신에게 자기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그 누구도 방해하지 않는 시간이 24시간이나 주어졌습니다! 당신은 가장 먼저 무엇을 하실 건가요?
·일한다
·논다
·잔다
삑, 삑삑.
·일한다
·논다
> 잔다
뭘 물어보고 있어. 잘 거야 다 저리 꺼져.
그렇다. 이것이 바로 네 시간 전에 내가 고른 선택지였다.
"…… 괜찮나."
아니, 자기로 결정한 건 내가 맞긴 한데 말야. 자고 일어나니까 갑자기 무서워졌다.
이거 분명 전부 방송하고 있댔지? 그럼 나는 경기 시작하자마자 네 시간 동안 잠방 때린 거네?
'…… 지면 인생 종치겠네 이거.'
정말로 지면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날 거다.
현대에 다시 나타난 토끼와 거북이? 국가대표가 시합 중 수면으로 결승전에서 패배하다! 같은 타이틀이 붙어서.
와. 다시 생각하니까 소름 돋네 이거.
"어우, 정신 차려야지."
일단 일어나서 침구류를 조리실 구석 아무것도 없는 곳에 쌓아둔 뒤, 조리복을 적당한 곳에 걸어두고 세수로 정신을 깨운다.
물은 차가운 물. 2월에 냉수마찰이라니 제정신이 아니로구만.
"후우. 난방이 잘 돼서 다행이지."
그래도 냉수로 적당히 몸을 만져주니 살짝 몽롱하던 정신이 제법 돌아왔다. 시계를 보니 시합 시작 후 이제 막 네 시간가량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알람 울리기 전에 깼네……."
4시간 반이 지나면 울리게 맞춰놨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핸드폰을 확인하니 알람 10분 전이라 다시 자기도 애매하고 일어나기도 애매한 기묘하게 기분 나쁜 느낌이 엄습한다.
"흐흠."
목덜미로 들러붙는 미묘한 기류를 물기와 함께 떨쳐내고 다시 조리복을 갖춰 입었다.
머리가 좀 엉망이긴 해도 조리모를 눌러 쓰면 크게 티는 안 난다. 요리사에게 청결은 필수. 그중에서도 겉으로 보이는 청결은 요리사에게 필수 그 이상이다.
괜히 2라운드가 끝나자마자 샤워실로 달려가서 싹 씻고 옷까지 예비 조리복으로 갈아입은 게 아니라 이거야.
"어디 보자……."
주변에 설치된 카메라는 총 다섯 대.
조리실 천장 모서리 네 군데에 설치된 카메라. 그리고 조리대를 바로 위에서 비추는 카메라 하나.
그중에서 내 정면에 있던 카메라의 렌즈를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이제 막 네다섯 시쯤 됐지만 아침인사를 해주는 기분으로.
"브이브이."
거기에 가볍게 브이 사인까지. 시종일관 진중한 스테이지 위에서는 못 할 장난이었다.
딱히 장난을 치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다. 그것보다는 시청자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의 의미가 더 크지.
이렇게 자다 일어났지만 전부 계획이다. 그러니 걱정 말고 마음 편하게 보라는 신호.
솔직히 나도 마라톤을 직관하는 중에 출발도 안 하고 출발선에서 자다 일어난 선수를 보면 욕이 나오든 걱정을 하든 일단 평정심을 지키진 못할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너무 걱정 말라는 신호 정도는 보내줘야 사람들도 안심하고 내가 요리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겠지.
'근데 어쩔 수 없었다니까.'
쉬지도 않고 바로 달리기엔 2라운드가 너무 힘들었다.
안 그래도 요즘 이상하게 성장통이 심해져서 그냥 서 있기도 힘들 때가 많은데, 그렇게나 난리를 쳐놓고 몸이 멀쩡하길 바라면 욕심이지.
'예전엔 이만큼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적당히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어주니, 다행히 2라운드 때 고생한 여파가 꽤 깔끔하게 사라졌음을 알 수 있었다.
젊은 몸이 좋긴 좋아. 나이를 먹는 게 서글프다.
"자, 그럼……."
이번에 준비한 재료부터 보고 가자.
장시간 조리라는 게 원체 고를 수 있는 메뉴의 가짓수가 많다.
말이 장시간 조리지, 결국 그 시간 안에 완성할 수 있는 메뉴라면 뭐든 만들어도 된다는 게 이 주제의 기본 골자이기 때문이다.
무슨 만드는 데에 몇 시간 이상 든 요리만 만들라는 규칙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단순히 오랜 시간 마리네이드한 고기를 레어 스테이크로 순식간에 구워 나간다 해도, 그 또한 어느 의미로는 장시간 조리한 음식인 것이다.
'이 경우야 마리네이드에 걸린 시간이 꼭 필요하다는 전제가 있어야겠지만.'
뭐, 그렇다고 내가 그런 요리를 한다는 건 아니고.
다만 말하고 싶은 건 그런 것도 장시간 조리의 일례에 들 수 있다는 거다.
아무튼, 이야기를 좀 원래 주제로 돌려서.
그렇다면 내가 이번에 만들고자 하는 요리는 무엇이냐.
이번 대회에서 주제에 맞춘 요리의 레시피를 고민하는 데에 가장 오랜 시간을 썼다고 본다.
개인전의 차례가 가장 마지막 순번으로 밀린 덕에 여유가 생긴 탓이지만, 생각할 시간이 많다는 건 결코 나쁜 게 아니니 오히려 좋지.
내가 할 수 있는 요리의 가짓수.
수많은 경우의 수와, 내게 주어진 기회.
그 모든 걸 종합하여, 내가 내놓은 결론은 퍽 심플한 것이었다.
"삼겹살이나 구워드리지 뭐."
근데, 그게 아마 평범한 삼겹살은 아닐 거다. 한국인의 쏘울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을 테니까.
오늘 시합 내내 동굴에 틀어박혀 계시던 웅녀 어르신이, 이제야 겨울잠에서 깨어났음을 느낀다.
그래. 2월이다.
봄이 되어 새싹이 올라올 시기였고.
류찬혁이 콘크리트 바닥 위에서 몸을 일으킨 날로 기억될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