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1. 속전속결.-5-
열 개 들이 찜통으로 스물하고도 둘. 거기에 더해 낱개로 셋.
총합하여 무려 223개에 달하는 만두.
찬혁이 약 15분 동안 단 1초도 쉬지 않고 죽을 각오로 손발을 놀린 결과물이 바로 이것.
제자리에서 대략 개당 4초에 달하는 말도 안 되는 전력질주를 쉼 없이 달린 찬혁의 몸은 반쯤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 있었다.
"후우, 후우, 쓰읍……!"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다리와 꿈틀꿈틀 자그마한 경련을 반복하는 팔.
젊으면 고생도 사서 한다지만 이래서야 고생을 구매할 때 습관처럼 업소용으로 대량구매를 한 꼴이었다. 찬혁은 숫제 회춘이라도 한 기분이었다. 회춘한 시기가 갓 태어난 새끼사슴 정도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문제지.
오죽하면 주저앉은 찬혁을 보고 깜짝 놀란 심판이 급하게 달려올 정도였다.
"류찬혁 선수. 괜찮습니까? 의료팀을 호출해드릴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잠깐만, 잠깐만 쉬고 일어날게요."
"…… 알겠습니다. 혹시 상태가 악화된다면 지체하지 말고 바로 호출을 요청해주세요."
"예. 감사합니다."
걱정스런 눈길을 남기며 자리로 돌아간 심판. 그러나 찬혁의 시선은 이미 자신이 만든, 정확히는 한국팀 전원이 만든 만두가 놓인 조리대 위를 향한다.
'얼마나 만든 거야?'
이는 놀람의 의미가 아니다. 말 그대로 자신의 팀이 만든 만두의 총량이 궁금할 뿐.
이번 라운드의 주제인 고속조리는 아주 심플한 룰을 가졌다.
하나라도 더 많이 만들어낸 측의 승리. 피가 찢어지거나 소가 너무 적어 모양이 망가지는 등, 만듦새에 대해 검사는 할지언정 맛에 대한 심사는 없다.
시합에 이기기 위해선 일단은 질보다 양.
자신의 몸 상태보다 만두의 총량에 더욱 신경이 쓰이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223개. 다른 분들은…….'
평균적으로 15층 남짓. 찬혁에 비해선 훨씬 적은 양이었다.
당연한 사실이었다. 시합 내내 자리를 바꾸지 않고 몰두한 찬혁과는 달리 한 사람씩 자리를 바꿔가며 휴식을 취한 다른 팀원들이 만든 만두의 개수가 모자라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다만…….
'역시 이론상 최대치에는 좀 많이 못 미치네.'
처음 생각했던 것에 비하면 조금씩 모자란 모양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프랑스팀은…… 보기엔 비슷한데."
프랑스팀의 경우에는 한국팀과 조금 놓아둔 모양새가 다르다.
토르텔리니는 만두와 달리 찌지 않고 삶아 먹는 파스타인 탓에, 그들은 찜통이 아닌 손잡이가 달려 포개기 쉬운 쟁반에 완성품을 담아두고 있었다.
한 쟁반당 개수는 40개. 저마다 제 앞에 4~5개씩의 쟁반을 쌓아둔 모습을 본 찬혁이 작게 혀를 찬다.
눈대중으로는 당장의 승패를 가늠할 수 없을 듯 보였다.
"후우, 으쌰."
다 늙은 사람 같은 추임새와 함께 몸을 추스른 찬혁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니, 그제야 여태껏 이쪽을 보고 있던 심판과 심사단, 관객들이 안심했다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이 신호가 됐을까, 심판이 두 팀을 향해 외친다.
"각 팀의 선수들은 조리대에서 물러나 주시기 바랍니다! 이제부터 집계를 시작하겠습니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어디선가 나타나 스테이지 위로 올라오는 여섯 명의 진행위원.
세 명씩 두 팀으로 갈라진 그들이 양 팀의 조리대로 나아가 완성된 메뉴 앞에 선다.
앞가슴 주머니에 꽂힌 작은 수첩과 다색 볼펜. 그리고 허리춤에 달린 카운터까지. 날카로운 눈매와 강건한 몸으로 무장한 그들이 조리대 앞에서 인상을 굳히고 있자니 없던 긴장감까지 생기는 듯 보일 지경이다.
"자…… 이제 어떻게 되려나."
자신의 팀과 프랑스팀의 결과물에 한 차례씩 시선을 주고 스테이지 끝단까지 물러선 찬혁이 작게 읊조렸다.
명확한 승패가 보이지 않는 작금의 상황. 과연 이 레이싱에서 보다 빠른 랩타임을 기록한 것은 누구인가.
길고 짧은 것을 대놓고 비교하는 시간이 돌아왔다.
마지막 3라운드에 가느냐. 아니면 이곳에서 끝나느냐.
두 팀 선수들의 긴장감 어린 시선이 '0/0' 이라는 숫자가 출력된 전광판 화면으로 향했다.
***
"어떻게 될 것 같아요?"
헬레나의 질문에 로랑이 냉소적으로 답했다.
"이긴다."
"흐응. 꽤 자신 있나 보네요."
"이길 생각으로 했으니까."
"그럼 뭐, 지금까진 이길 생각이 아니었던 거예요?"
"……."
헬레나의 장난기 섞인 반문에 말문이 막힌 로랑이 살짝 그녀를 째려보자, 헬레나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간다.
아까부터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갑자기 변해 버린 그녀의 태도에 로랑이 적응을 마치지 못하는 동안, 헬레나가 재빨리 말꼬리를 잡는다.
"이기려고만 했단 사람이 재료는 또 왜 그렇게 골랐어요? 정말 빠르게 하려고만 했으면 훨씬 수월하게 이길 수도 있었을 텐데."
"……."
새우와 문어를 사용하자는 건 다름 아닌 로랑의 의견이었다.
다른 팀원들은 당연히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해산물은 손질에 시간이 걸리거니와 그 시간을 다른 데에 쓰면 당연히 속도가 더 빨라질 테니까.
그러나 팀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로랑은 거의 강행하다시피 재료와 레시피를 결정했다.
하다못해 새우만이라도 빼자는 제안에는 '내가 새우 전담할 테니까 신경 꺼'라는 말과 함께 일축하기도 했다.
'실제로 그걸 해냈다는 점에서야 대단하긴 한데…….'
말이 새우 손질이지 물경 백 마리를 넘는 양을 10분도 안 되는 시간에 껍질을 벗기고 살을 으깨 소로 사용할 수 있게끔 한 것이다.
한국팀도 한국팀이지만, 로랑의 속도는 그야말로 타의 초종을 불허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느냐는 질문에는 여전히 명확한 답을 내지 못하고 있다.
'근데, 이제 좀 알 것 같긴 하네.'
직접 만든 다음 보니 알겠다.
'핸디캡을 갖고 싶었던 건가.'
상대팀의 면면은 한 사람을 제외하면 전원이 이쪽의 최연장자보다 비슷하거나 연상.
체력이 약한 그들에게 이 시합이 불리하다는 사실을 헬레나는 지금에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딱히 요리사에게 체력이 중요하단 걸 모르고 있었단 게 아니다.
상대의 체력 안배 같은 것에 신경을 써주기엔, 상대가 너무 강했을 뿐.
'이게 자기하고 우리들의 차이라는 건지…….'
아무리 이빨 빠진 호랑이라 한들 그런 맹수와 싸우게 된다면 호랑이의 걱정을 할 사람은 없다.
사람은 총을 들어야 비로소 가장 강력한 무기를 잃은 그 짐승과 대등하다. 제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상대를 신경 써줄 여유가 어디 있을까.
하지만 로랑은 그렇지도 않았다.
상대를 신경 써줄 여유가 있었다.
'아니, 이건 여유라기보단…….'
자존심에 가까울 것이다. 다 늙은 경쟁자에게 젊음을 앞세워 이겨봤자 자신의 프라이드가 용납하지 않는다는 자존심.
"그런 자존심을 세울 수 있는 게 여유가 있다는 뜻이겠지만."
"뭐?"
"아니. 여유로워 보여서 세상 좋겠다고요, 당신은."
"…… 진짜 왜 그러는 건데?"
정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인상을 쓰는 로랑의 얼굴에서 시선을 돌린 헬레나가 전광판을 바라본다.
0/0이란 숫자가 출력되고 있던 전광판.
그 화면의 숫자에, 드디어 변화가 생긴다.
1/1
카운트가 시작된다. 드디어 두 번째 시합의 승자와 패자를 판가름할 때가 됐다.
***
각 팀에서 숫자를 집계하고 있는 카운터와 전광판에 출력되는 화면이 서로 연동되어 있는 것일까.
진행위원이 만두를 세며 카운터의 스위치를 누를 때마다 숫자가 가파르게 올라가는 게 보인다. 거기다 세 명이서 동시에 집계를 하고 있으니 그 상승세가 더더욱 빠르게 느껴졌다.
껑충껑충 널뛰기를 하는 숫자. MC의 흥을 돋우는 외침이 귀를 찌른다.
"아아! 한국팀이 먼저 200 고지를 넘습니다! 프랑스팀도 이에 질세라 바로 추격합니다! 지금! 두 팀 모두 200개의 선을 넘었습니다! 올라갑니다, 아직도 올라갑니다!"
높게 쌓아 올린 찜통을 하나하나 분리하며 속에 담긴 만두의 개수를 세는 진행위원들.
사실 저게 맞지. 괜히 열 개씩 된다고 대충 떼어 세다가 안에 숫자가 모자라거나, 더 들어가 있거나 하면 그런 낭패가 또 없다.
"새삼 보니 엄청 많이 만들긴 했네."
사실 하루에 이보다 더 많은 요리를 만들어 본 적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단숨에 수백 개를 만든 적은 처음인지라 사실 나도 해놓고 조금 얼떨떨한 기분이다.
마지막 3분 정도가 남았을 때는 정말 기계가 된 기분이었다.
금속피로가 한계까지 달해서 옆에서 툭 치면 부품이 부러져 나갈 지경에 온 기계였지만.
뭐 어쨌든, 그렇게 고생을 한 보람은 있는지 전광판 속 숫자는 끝을 모르고 제 몸을 불려나간다.
200을 찍고, 또 순식간에 300을 넘어 400, 500, 600…….
'…… 아니, 진짜 어지간한 만두공장 라인 하나랑 맞먹겠는데?'
30분 동안 정말로 이만큼을 뽑아냈다고? 솔직히 이거랑 같은 룰로 공장 한 라인이랑 대결하면 이길 것 같은데.
"라고, 말은 하지만 말이야."
우스운 건 그만한 속도를 뽑아냈는데도 정작 프랑스팀에게 확실하게 이기리란 보장이 없단 거다.
저쪽도 저쪽대로 상당한 괴물집단이다. 이쪽 체력이 후달리는 걸 감안해야겠지만.
카운터는 여전히 멈추지 않는다.
어떻게 된 게 만드는 시간보다 세는 시간이 더 오래 걸리는 것 같을까.
사실 결코 개수가 틀리지 않도록 하나하나 세심하게 세고 있으니 더더욱 그렇겠지만.
전광판에 표기된 숫자가 700을 넘어가고 800의 초입에 다다른 순간, 나는 슬슬 이 시합의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했다.
뭐, 미래를 볼 수 있는 엄청난 초능력 같은 게 발휘되고 그랬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주어진 시간 안에 얼마만큼의 만두를 만들 수 있느냐는 이론상 최대치에 가까워졌단 걸 느낌적인 느낌으로 알았을 뿐이지.
그 증거로, 우리 팀에서 쌓아 올린 찜통 탑은 이미 거의 다 해체되어 밑동만 간신히 남은 수준이었다. 꼭 해체된 피사의 사탑을 보는 기분이다.
기울지도 않았고, 그게 해체되면 엄청난 문화적 손실이니 쉽게 볼 수 있는 광경도 아니겠지만.
'그러고 보니 그거 한 50년쯤에는 거의 바로 섰었지?'
더 기울어지지 않게 만드는 보수 공사가 너무 잘 돼서 그렇게 됐다는데, 그때엔 또 그걸 어떻게 자연스럽게 기울어지게 만드느냐에 초점이 쏠려 있었다.
그렇게 하릴없는 잡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카운터가 800의 중반을 넘어서 있었다.
하나씩, 시작할 때에 비해선 한없이 느려진 속도로 올라가는 전광판의 숫자.
847, 848, 849…… 853…….
조금씩, 조금씩 올라가다 어쩔 때는 동시에 여러 번 올라가기도 하는 카운터를 멍하니 바라본다.
한국팀과 프랑스팀의 숫자는 아직 비슷하다.
프랑스팀이 조금 뒤처져 있지만, 단순한 카운트 속도의 차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차이.
하지만 프랑스팀의 카운트가 여전히 조금씩 탄력을 받는 와중에, 한국팀의 카운트는 점점 그 속도가 줄어들고 있다.
850개의 선을 넘어가고, 860개에 들어간 뒤, 아주 잠시 후.
비로소, 한국팀의 집계가 멈춘다.
869개.
1초, 5초, 10초.
단순히 진행위원의 손이 잠깐 멈췄다고 보기에는 너무 긴 시간.
그제야,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전광판에서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
"끝났구나."
869개. 869개라.
"아 씨, 기분 나쁘네. 하나만 더 만들걸."
왜 하필 저기서 끊기지?
잠깐이나마 승패보다 거기에 더 시선이 쏠렸단 사실에 조금 자괴감이 들기도 잠시, 이윽고 다시 고개를 들어 전광판을 바라본다.
프랑스팀의 집계는 아직 멈추지 않는다.
860개를 넘어, 869에서, 우리와 같은 수에서 잠깐 멈칫하는 숫자.
그러나 몇 초 지나지 않아, 숫자는 더더욱 늘어나기 시작한다.
870을 찍고, 거기서 더더욱 숫자를 늘려, 결국에는 내가 이론상 최대치의 한계선이라고 본 900개까지.
마지막으로 914라는 수를 찍고 멈춘 화면을 보며, 나는 몰래 생각했다.
저쪽도 꽤나 기분 나쁠 것 같다고 말이다.
"…… 아니, 그렇지도 않은가."
숫자야 조금 마음에 안 들어도 그 정도는 참고 넘길 수 있겠지.
왜냐하면…….
"글로벌 푸드 서바이벌 시즌2! 결승전 제2라운드! 그 승자는!! 914개의 토르텔로니를 완성한 프랑스팀입니다! 뜨거운 접전을 보여준 두 팀에게 박수 부탁드립니다!!"
이번 라운드의 승리는, 그들의 것이 됐으니까.
45개 차이의 패배.
이 대회에서 처음 맞이하는 패배.
그건 생각보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느낌이었다.
"…… 죽겠다."
왜냐면, 그런 걸 느낄 만큼 체력이 안 남아 있었거든.
이제 진짜 모르겠다. 빨리 좀 쉬게 해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