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8. 속전속결.-2-
"역시 만만치 않네. 오히려 저번보다 좀 더 나아진 것 같아."
대기실로 돌아가는 길. 로랑이 툭 던진 말에 프랑스팀의 모두가 흠칫 어깨를 떤다.
어딘가 가벼운 말투. 방금 막 아쉬운 패배를 기록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 만큼 담담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팀원들은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무리 아슬아슬한 접전이었다곤 하나 패배는 패배.
토끼고기라는 재료의 특징을 제대로 살려 조리한 로랑과 달리, 그러지 못한 자신들에게 패배의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미안해요."
"뭐가?"
"발목을 잡아 버렸어요. 당신 말대로."
예전에 들었던 로랑의 말을 반추하며 사과하는 헬레나. 맞는 말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실제로 방금 시합에서 자신들이 조금 더 잘했다면 승패가 뒤바뀌었을지도 몰랐으니까.
다른 팀원들 또한 말은 없어도 하는 생각은 같은 것인지, 그저 가만히 로랑을 바라볼 뿐이다.
"됐다. 신경 쓰지 마."
"예?"
그러나 로랑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들의 예상과는 판이했다.
그의 성질머리를 생각하면 좋은 소리가 나오지 않으리라 생각했고, 또 들어도 할 말이 없다고 각오한 바다.
하지만 로랑은 정말로 크게 개의치 않는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우리는 충분히 했지만, 저쪽이 만만치 않았다. 그게 다다. 우리 중 누가 더 못했느냐를 가릴 필요는 없는 일이야."
"로랑, 당신……."
"굳이 잘못을 따지자면 토끼를 주재료로 고른 내 탓이다."
헬레나는 그의 말에 제법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막 팀을 꾸렸을 때였다면 '내 선택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문제가 있는 건 네녀석들 실력이지.' 같은 소리나 뱉었을 이 남자가 이토록 순순히 자신에게 책임을 전가할 줄이야.
로랑은 이번 대회를 치르며 수많은 성장을 이루었으나, 그중에서도 가장 손꼽히게 성장한 것을 지목하라면 분명 인성적인 부분이겠지.
헬레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나이 차이는 채 다섯 살도 나지 않지만, 어떤 의미로는 대견함마저 느꼈다.
"그러니 쓸데없이 패배주의자처럼 굴지 말고 똑바로 해. 이젠 뒤가 없으니까."
"…… 착각이었나."
"뭐?"
"아니. 아니에요. 아무것도."
말을 돌리곤 쓱 앞서나가는 헬레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로랑이 아리송하단 얼굴로 뇌까렸다.
"뭐야 저 여자."
평소에는 보여주지 않던 모습에 당황스러웠지만. 제법 신선했다.
***
"두 번째 시합! 그 주제를 지금 발표합니다!"
짧은 휴식시간 뒤, 각 출연진과 관객이 제자리로 모이기가 무섭게 대회는 다음 스테이지로 나아간다.
관객들도 이미 이 대회에 많이 익숙 해졌는지 이제는 자연스럽게 이 급물살 위에 안착했다.
'그래서, 다음은 또 뭐가 나오려나.'
솔직히 이제 어떤 주제가 나오든 어지간해선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긴 하지만, 이 추첨이란 시스템에 어지간히 쓴맛을 봤어야지.
최악의 상황은 얼마든 상정하고 있다.
예를 들어 딱 한번 밖에 나온 적 없었지만, 지구상 어느 특정한 지역의 요리를 만들라는 주제가 갑자기 튀어나올 때도 있었다.
'그 한 번이 분명 아시아 요리 만들기였지?'
잠깐만, 다시 생각해보니 그때 그 주제로 대결을 한 팀이 중국이었던 것 같은데…….
설마 그것까지? 중국 또 너야?
…… 뭐 아무튼.
만약의 가정이긴 하지만 이번에도 갑자기 '유럽 요리 만들기' 같은 주제가 튀어나와도 이상할 건 없겠지.
심증뿐이긴 해도 그땐 아마 중국이 꼼수를 부린 거겠지만, 이 대회에서 나를 찾아온 불행을 생각하면 아주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젠 어떤 주제가 튀어나오더라도 대범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이, 어쩌면 내 실책일 수도 있단 걸 모른 채로 말이다.
─띠리리리리리링!
"행사장을 찾아주신 관객 여러분! 이 방송을 지켜봐 주시는 시청자 여러분! 전광판을 주목해주시기 바랍니다! 한국 대 프랑스, 프랑스 대 한국! 제2 시합의 주제느으은!"
─띵!
"고, 고속조리! 고속조리입니다! 결승전 제2라운드! 그 주제는 고속조리입니다!"
…… 어? 뭐가 나왔다고?
대범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한 지 고작 수십 초.
나는 그 짧은 시간 만에, 내 의견을 철회할 필요가 있음을 느꼈다.
***
요리사에게 필요한 덕목 중 하나는 빠른 손놀림이다.
고객의 시간은 무한하지 않다. 같은 요리라 한들 단 1분이라도 먼저 완성할 수 있는 요리사가 보다 우수한 요리사인 법.
그리고 이 대회는 전 세계를 통틀어 최고의 요리사를 가리기 위한 대회. 고속 요리라는 주제가 대회의 주제 목록 중 포함되어 있는 건 그다지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근데 그게 왜 하필 지금 나오냐고."
아니, 고속조리도 특수규칙 주제잖아.
왜 특수규칙 주제가 이렇게 자주 나오는 거야.
…… 사실, 자주라고 하긴 뭐하다. 우리도 이 대회를 하면서 딱 두 번 치른 게 전부니까. 아까 치른 특수육류 조리가 원래는 추가규칙 주제라는 걸 생각하면 고작해야 한 번이고.
하지만 그게 결승전에 딱 맞춰서 나오다니.
다이스 갓은 결승이라고 여기 주사위를 특별취급이라도 하신다니?
'제작진은 노났다고 좋아하겠네.'
특수규칙 주제가 나온 시합은 평균 시청률이 상당히 높다고 하던가. 당장 저번에 일본과 했던 도시락 주제 생방송 때에는 시청률이 글푸서 방송 사상 최고치를 찍었다고 했었지.
그것도 어디까지나 한국과 일본을 한정한 시청률이긴 했지만.
어쨌든, 이번 주제인 고속조리에 적용되는 규칙은 이러하다.
"제한시간 30분. 심판이 지정한 한 가지 요리를 제한시간 내에 최대한 많이 만들라 이거지."
그것은 완성된 한 가지 요리일 수도 있고, 그도 아니면 일종의 요리의 일부일 수도 있다.
예를 들면 햄버거를 최대한 많이 만들어라, 혹은 햄버그를 최대한 많이 구워라.
대강 둘 중 하나를 골라 진행될 수 있단 소리다.
어쩔 때에는 각 팀에게 주제에 사용될 요리를 개별로 지정할 때도 있다고 룰북은 설명하고 있다. 단순히 추첨으로 뽑는 거라면 모를까 심판이 지정한 요리에 공정성이 적용되지 않으면 안 될 테니까.
"다만 이 경우는 각 팀의 동의가 있을 경우에 한정…… 인가?"
뭐, 각 팀에게 합리적인 선택을 한다고는 하지만 프렌치와 한식에서 크게 닮은 요리가 얼마나 있을까 생각하면…….
"대충 후보가 한정되긴 하는 데 말이야."
30분이라는 촉박한 조리시간과, 개수를 따져 승패를 가르는 만큼 개별적으로 조리해야 하는 음식임을 생각해보면 우선 스튜 계열의 요리는 패스.
그 외에도 너무 두꺼운 스테이크도 패스.
덩치 큰 해산물도 마찬가지의 이유로 패스.
그렇게 하나하나 패스하다 보니 점점 어떤 요리를 시킬지 대충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아마 볶음요리…… 아니면 주식?"
주식이라고 해도 빵이나 밥만 말하는 게 아니다.
밀가루나 쌀, 그것으로 만든 대다수의 요리를 포함시킬 수 있을 테니까.
'결국 가정에 불과하긴 한데.'
과연 이 가정이 얼마나 통할지는 아직 미지수니까.
그리고 잠시 후, 제작진 및 심사단, 심판진과의 협의 끝에 우리가 조리해야 할 요리의 정체가 공개됐다.
"오……."
미리 말해두지만, 내 가정은 생각보다 잘 들어맞았다.
다만 살짝 내 예상을 비튼 형태로 말이다.
"이번 시합, 각 팀이 만들 요리가 무엇인지 전달 드리겠습니다. 한국팀! 제한시간 내에 최대한 많은 양의 만두를 빚어주시기 바랍니다!"
한국팀은 만두. 그리고…….
"프랑스팀! 토르텔로니!"
프랑스팀은 토르텔로, 아니 잠깐.
"여기서 파스타가?"
프렌치 셰프한테 이탈리안을 시키다니, 무슨 생각이야 당신들?
***
"…… 라고 말은 했지만 말이지."
애당초 프렌치 자체가 이탈리안의 영향을 아주 강하게 받아 태어난 요리라, 프렌치 셰프로 유명한 사람 중에 이탈리안을 못 하는 사람은 없다.
아니, 사실 프렌치 전문가라고 하면 이탈리안 전문가라고 말을 조금 바꿔 쓸 수도 있지.
당장 나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예를 들어 한식 전문가가 볶음밥을 잘 하는 것과 비슷한 논조다. 한중일 세 나라에서 볶음밥은 가장 흔하고 자주 먹는 요리 중 하나 아닌가.
'물론 영, 프, 독, 이처럼 유럽으로 싹 묶인 나라들 관계는 그 정도가 아니지만…….'
거길 옛 조선과 명나라, 일본 정도의 관계성으로 정리하면 안 된다. 먼 중세부터 시작된 유럽 국가의 관계성은 어지간한 단일국가 이상이다.
이 나라 왕인 사람이 저 나라의 공작이고, 요 나라의 백작은 그 나라의 공주인 경우가 아주 많았으니까.
그 정도면 요리문화는 어떻겠는가? 물론 발달하며 각자 갈라진 방향은 다를지 몰라도 어느 정도 공유하는 부분이 있다. 파스타나 빵 같은 주식도 비슷하고.
어라? 잠깐만. 근데 왜 같은 뿌리에서 나온 영국은……?
…… 뭐, 어쨌든 말이다.
'애당초 우리나라 만두도 시초는 중국을 거쳐서 전파된 요리였고.'
그렇게 생각하면 딱히 이런 선택에는 크게 의구심이 들지 않는다.
토르텔로니란 이탈리아의 파스타 일종.
파스타라고 해도 이탈리아의 파스타는 중국에서 면이란 것을 부르는 것과 같다. 밀가루로 만든 거의 대부분의 것을 파스타라고 부른다.
그중에서도 한국의 만둣국에 들어가는 형상의 만두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파스타가 있다.
그게 바로 토르텔리니Tortellini.
사실 한국의 만두와 다른 거라곤 피의 구성과 속을 채우는 내용물, 그리고 크기 정도.
우리나라의 만두가 평균적으로 골프공만한 크기라면, 토르텔리니는 대략 엄지손가락 한마디 남짓 정도의 크기로 비교적 작다.
그리고 그 토르텔리니를 조금 더 크게 만든 것이 토르텔로니Tortelloni.
"솔직히 만두지 그건……."
처음 봤을 때는 왜 서양 레스토랑에서 만두볶음을 팔고 있나 싶었으니까.
진심을 말하자면, 아주 적절한 배치가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한다.
괜히 똑똑한 사람들이 모인 게 아니라는 것일까. 두 나라의 요리문화를 면밀히 관찰하고 고른 선구안이라는 게 느껴진다.
"하지만……."
문제가 아직 안 끝났다.
이번 주제의 가장 큰 문제.
뜻밖의 주제에도 불구하고 절로 칭찬이 나올 만큼 공평한 배치.
그럼에도, 이번 심사는 우리에게 아주 불리하다.
그 이유는 바로 이번 주제의 평가 방식에 있다.
두 팀이 만두와 토르텔로니를 제한시간동안 만들어서, 타이머가 끝나는 시점에 하나라도 더 많은 수량을 만든 팀의 승리라는, 심사조차 필요 없는 이 단순한 규칙.
바로 그 단순함이 우리의 불리함을 만든다.
아주 단순한 문제다.
"…… 이쪽 체력이 버텨줄까?"
30분의 시합.
일정한 속도로 달려 몸이 무리하지 않는 선을 최대한 유지하며 골인을 노리는 마라톤이 아니다.
시작부터 RPM을 레드존으로 꼬라박고 달려야 하는 전력질주.
그 30분 동안의 전력질주에 대응하기에 아주 커다란 장애물이 있다.
한국팀, 평균 연령이 대략 50대 초중반.
프랑스팀, 약 40대 초중반.
별로 안 커 보이나?
여기서 각 팀에서 가장 젊은 사람을 빼면 어떻게 될까?
한국팀의 평균연령은 순식간에 60대를 돌파하는 반면, 프랑스팀은 40대 중후반을 유지한다.
그렇다. 이번 심사에서 가장 큰 걸림돌.
그건 바로 시간이다.
이미 쌓인 시간이든, 앞으로 쌓을 시간이든.
"…… 거 진짜."
시간은 만인에게 평등하다. 하지만 나는 그 특혜를 받아왔었다.
그러나 이번은 다르다.
시간이란 놈이, 오랜만에 날 향해 이를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