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3. 라떼는 말이야.-6-
프랑스팀이 준비한 마지막 요리는 디저트였다.
토끼의 피에 크림과 카라멜, 생과 농축액 등을 섞어 만든 푸딩을 바삭한 쿠키로 덮어 퐁당 쇼콜라와 비슷한 모양새를 한 블러드 디저트.
요리하는 데에 피를 재료로 쓴다면 모를까, 피 자체를 주재료 삼은 요리는 유럽에서도 제법 드문 요리에 속하는데, 그 와중에 디저트라는 코어한 장르를 택한 프랑스팀의 담력이란 그야말로 보는 사람의 간담이 절로 서늘해질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런 노력을 들인 보람은 있는지, 심사단은 스튜, 메인, 디저트로 이어진 세 번의 심사를 끝마치자마자 이제 막 완주를 끝마친 마라토너처럼 퍼지고 말았다.
특기해야 할 점은, 그들 모두가 1등으로 결승선을 끊은 것 같은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이겠지.
그런 심사단의 모습을 살핀 소년. 아니, 이제는 청년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선 각지고 듬직한 체구를 가진 남자가 말했다.
"이야. 찬혁이 쟤 조진 거 아니냐? 심사위원들 아예 뻑이 가버렸는데?"
무엇을 숨기랴.
그 남자의 정체는 다름 아닌 김철정. 그리고 그 말이 향한 상대는 겨울방학 이전보다 조금 더 신장이 커져, 한국 남성의 평균 키를 웃도는 찬혁보다 머리가 반 뼘은 더 높은 곳에 있는 나현주였다.
물론 이곳에 온 건 그들 둘뿐만이 아니다.
모처럼 한국에서 치러지는 결승전. 개인 사정으로 어쩔 수 없이 불참한 몇몇을 제외한 성심고 3학년 1반의 거의 대부분이 찬혁과 교장인 안영길을 응원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모였다.
평소 찬혁이 쌓아온 인연 덕분이었다. 필경 회귀 이전의 찬혁이었다면 이만한 숫자의 친구들이 모이진 않았을 것이다.
각설하여, 그런 김철정의 엄살을 들은 나현주가 안 그래도 날카로운 눈매를 더더욱 가늘게 좁히며 대답했다.
"…… 괜찮아."
"아니 괜찮아가 아니라……."
"조용히."
"아, 네."
나현주의 고요한 호통에 김철정이 꼬리를 말았다.
엄살이라 표현은 했지만, 김철정 본인도 반쯤은 진심으로 프랑스팀의 저력에 놀라고 있었다.
발상과 솜씨는 두말할 것 없이 완벽하고, 정신적인 면에서도 그러하다.
앞서 선보인 두 메뉴에 비해 조금 빈약한 디저트만 봐도 알 수 있다.
'그거, 분명 의도한 거야.'
요리가 보다 뛰어나지면 뛰어나질 수록, 역설적으로 먹는 이의 부담은 가중되는 법.
병목까지 물이 차오른 병에 억지로 물을 더 넣으려 해봤자 들어가지 않는다. 오히려 그 탓에 원래 들어있던 물까지 같이 흘러넘쳐 버리지 않으면 다행이지.
때문에 프랑스팀은 일부러 보다 단순한 맛과 식감을 연출하여 심사단에게 쉴 틈을 선사했다.
오히려 그렇게 함으로써 이전 먹었던 요리를 행복한 기분으로 되새길 수 있도록.
'요리사인 이상 모든 요리를 완벽하게 조리해야만 프로. 그러나 코스 요리는 모든 음식이 최고여선 안 된다. 그게 코스의 완벽함이다. 였나?'
언젠가 무뚝뚝한 아버지가 술에 취해 흘리듯 자신에게 한 충고를 떠올리게 한다.
"괜찮다고 그냥 넘어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말이다……."
찬혁아. 너 진짜 괜찮겠냐?
지금은 닿지 않을 걱정을 담아, 김철정은 관중의 벽 너머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찬혁을 바라봤다.
***
"다음은 한국팀의 심사가 있겠습니다! 한국팀 여러분, 준비하신 요리를 제출해주십시오!"
식은 요리를 다시 재단장하여 준비하는 잠깐의 시간 뒤, 드디어 우리의 요리를 심사할 차례가 돌아왔다.
'아니 근데 제대로 심사는 할 수 있는 거 맞지?'
쉴 시간이 잠깐 주어진 덕분인지 심사단의 상태는 아까와 비교하면 제법 괜찮아진 상태였지만, 솔직히 내가 보기엔 지금도 그다지 정상처럼 보이진 않았다.
'그만큼 프랑스팀의 요리가 대단했다는 거겠지.'
순서가 뒤로 밀려난 건 우리가 완성이 조금 더 늦었으니 별수 없다.
말에서 국수의 국물용으로 사용할 수 있을 만큼 진한 육수를 뽑아내려면 그만한 시간이 필요하기도 했고, 그 결과도 만족스러우니 괜찮다.
하지만…….
"저 여운을 아예 밀어내야 한다, 그건데."
여태껏 해온 수많은 시합. 후공은 처음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기에 더더욱 후공이 가진 어려움을 안다.
요리라는 것은 비유하자면 먹는 이가 소유한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는 일이다.
어떤 그림을 그리느냐는 화가인 요리사의 손에 달린 일이겠지만 그 그림이 마음에 드느냐 아니냐는 도화지의 주인이 판단할 일.
그리고 요리 시합에서 후공이 하는 일은 바로 한 번 그려진 그림을 자신의 그림으로 덧칠하는 것이다.
새하얀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는 것과, 마르지도 않은 물감이 가득한 도화지 위에 그림을 그리는 것.
어느 쪽이 더 어려운 일인지는 굳이 따질 것도 없이 자명한 일이나, 문제는 골치를 썩이는 일이 이게 전부가 아니라는 거겠지.
만약 그 도화지의 주인, 즉 먹는 이가 처음 제 도화지에 그려진 그림을 정말 마음에 들어 한다면 이야기는 곱절로 복잡해진다.
안 그래도 어렵게 그림을 그려야 하는데, 그렇게 그린 작품이 이전에 그려져 있던 것보다 못하다고 빈축이라도 사봐라. 그만큼 가슴 아픈 일이 없다.
하물며 프랑스팀이 그려낸 작품은 저명한 화가들의 작품과 비교해도 전혀 모자람이 없는 수준.
내 요리에 자신이 없는 건 아니지만, 과연 그보다 더 나은 그림을 그려낼 수 있을까.
"…… 해봐야, 아는 거지."
지금은 그저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고?
그게, 지금 이렇게 말하자니 굉장히 부끄럽지만 말이야…….
'나, 우리 팀 요리에 어떤 요린지도 제대로 모른다고.'
내 요리에 너무 집중한답시고 잠시 소통이 단절된 탓에 생긴 비극이었다.
***
수많은 사람의 기대와 불안이 하나로 엮이는 스테이지 위. 드디어 한국팀의 요리가 심사대 위에 오른다.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심사단 앞에 모습을 드러낸 요리는 안영길과 이영율의 합작. 가늘게 채 친 마둔살로 만든 육회.
군대의 선봉이 출전하는 것을 바라보는 지휘자의 심정을 담은 시선을 보내는 찬혁이다.
'역시 후공에서 가장 중요한 건 제일 처음 나가는 메뉴야.'
선공에게 제일 처음 나가는 메뉴란 그림 전체의 밑그림을 잡는 것이다.
그렇다면 후공이 제일 처음 선보이는 메뉴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상대가 그려둔 그림을 지우는 것.'
그것이 먹 뭍은 붓으로 새까맣게 도배하는 것이든, 하얀 물감을 통째로 뿌려 도화지를 다시금 새하얗게 만드는 것이든 상관없다.
당장 중요한 것은 어찌 됐건 지우는 것이다.
선공이 남긴 그림이 뒤에 그려질 작품에 그림자를 드리우지 못하도록. 흔적 하나 남지 않게 깔끔히.
그걸 해내느냐 해내지 못하느냐에 승패가 갈린다고 봐도 좋다.
그리고, 찬혁이 보건대 그들이 출품한 가장 첫 번째 메뉴는 우선 겉보기로는 충분히 합격점을 줄만 한 수준에 들어있었다.
"어우야."
같은 팀인 찬혁마저 놀라게 만드는 마성의 플레이팅.
무를 종잇장처럼 얇게 저며 식초, 소금, 설탕에 절여 종이접기하듯 연꽃 모양으로 접은 장식.
꽃이나 열매, 잎사귀 따위에서 용출한 천연 색소가 섞인 무 연꽃은 부처님 오신 날 절 앞에 걸린 연등 못지않은 화려함을 뽐낸다.
그리고 그 연꽃의 중심에 소복하게 담긴 육회.
말 그대로 육회의 꽃.
그것이 정체를 알 수 없는 형형색색의 가루로 만들어진 샌드가든의 중심에 오롯이 피었다.
"역시 장난 아니시네. 하하."
찬혁은 앞서 요리를 그림으로 비유했었으나, 실제로 캔버스 속 그림을 그대로 현실로 뽑아낸 것 같은 예술적인 위용 앞에서는 감히 입을 다물지 못했다.
'국내…… 아니, 세계에서 한식으로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셰프 두 사람이 힘을 합치면 저런 것도 할 수 있는 건가.'
자신 또한 회귀한 뒤로 제법 많은 성장을 했다고 실감했으나, 저 경지에 닿기에는 역시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단 예감이 드는 찬혁이었다.
'그런데…….'
찬혁의 시선이 음식으로 향한다. 진즉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보다 더 면밀히 살피겠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는 찬혁.
요리를 목도하고 뒤로 자빠질 듯이 놀라는 심사단의 반응은 이미 안중에 없다. 저런 걸 보면 심사단 할아버지가 와도 놀라지 않곤 못 배길 테니까.
찬혁이 그보다도 더 흥미가 가는 것은, 바로 저 플레이팅에 어떤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요리사의 플레이팅은 단순히 멋을 위해서만 있는 게 아니야. 모든 요소에 요리사의 의도가 숨어 있다.'
다름 아닌 안영길 본인이 찬혁을 가르칠 때 한 말이었다.
'그렇다는 건 저 플레이팅에도 분명 의도가 담겼다는 건데…….'
연꽃 모양으로 장식한 무절임의 의도는 알 수 있다. 육회에 별첨되는 배처럼 저 꽃조차 장식이자 요리의 일부라는 것은 짐작이 가는 찬혁이었다.
그러나 거기까지 이해 한 찬혁조차 아직 잘 모를 요소가 하나 남았다.
'저 모래 같은 건 뭐지?'
접시 바닥에 깔린 형형색색의 가루.
암적색, 녹색, 백색, 흑색의 가루는 서로가 서로의 영역을 지킨 채 섞은 듯, 섞지 않은 듯 절묘한 모양으로 접시를 점령했다.
의문을 지우지 못한 찬혁은 가만히 그 모양새를 살피다가, 문득 알 수 없는 기시감에 덮쳐졌다.
'어라?'
이상했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이상하게 익숙한.
그런 느낌이 드는 찰나, 플레이팅에 대한 감탄사를 간신히 멈춘 심사단이 비로소 식기를 든다. 중동 출신 인사와 유럽 출신의 심사단이 둘.
그러나 음식을 먹는 방법에 대한 공부는 이미 경지에 달했다는 듯, 현지 사람보다도 더 우아한 손놀림으로 젓가락을 다룬다.
각자의 접시에 약간씩 육회를 덜어서, 그대로 한입.
찬혁이 예상했던 대로, 그들의 반응은 아주 좋았다.
"음! 이거예요! 토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맛! 말이 아니면 이런 고기는 쉽게 먹지 못하죠!"
"아주 담백한 맛과 정반대로 턱을 튕겨내는 것 같은 살의 탄력. 이게 말고기의 매력 아니겠습니까!"
"거기다 간장을 베이스로 만든 이 양념은 감칠맛이 특히 훌륭해요! 간장과 참깨의 짭짤함과 고소함, 배와 엿기름에서 나오는 포근한 단맛, 거기에 이 무를 절여 만든 장식을 살짝 곁들여 먹으니 더더욱 맛이 좋습니다!"
호평이었다. 그것도 아주 커다란.
"쯧."
그러나 그런 심사단의 호평을 들은 찬혁은 좀처럼 만족할 수 없었다.
그들의 호평이 앞서 프랑스팀의 심사를 할 때 보여주던 환호에는 도저히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찬혁의 그런 우려는 현실이 됐다. 젓가락을 손에서 내려놓은 심사단이 기다렸다는 듯 한국팀을 향해 아쉬운 점을 토로하기 시작했으니까.
"하지만, 이상하네요. 아주 맛있습니다만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 있습니다."
"살짝 간이 약하다고 해야 할까요? 이상하게 먹어도 무언가 채워지는 느낌이 드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끊임없이 먹고 싶어지는 기분도 아니에요."
마치 다 맞춰진 퍼즐에서 중요한 피스 몇 개가 빠져 버린 것 같다.
심사단의 공통된 의견.
그 평가가 나오자마자 한국팀을 비롯한 한국인 관객의 얼굴에는 수심이 차올랐고, 반대로 프랑스인 관객들의 얼굴에는 자부심과 환희가 차올랐다.
"역시 미식으로는 프랑스에게 이길 수 없지!"
"처음엔 조금 방심해서 졌지만 두 번은 어림도 없다!"
첫 요리부터 이렇게 반응에 차이가 나다니. 첫 시합은 지게 되는 건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감에 한국팀을 응원하는 관객들이 잠식당하기 시작한 그때였다.
"실례하겠습니다. 죄송하지만 아직 저희 요리를 전부 시식하지 않으셨네요."
여태껏 옅은 미소를 짓고 있던 안영길이, 심사단 앞으로 나섰다.
"예?"
의아한 것은 심사단 쪽이다. 분명 충분히 음식을 맛봤고, 이거면 끝일 텐데.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심사단의 착각이었을 뿐.
안영길과 이영율의 합작. 4색 마둔살 육회의 진가는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심사단 여러분은 이제야 저희 요리의 1할 정도를 맛보셨을 뿐입니다."
"1할이라고요?"
그게 무슨 뜻인가. 이미 잘 버무린 육회를 먹었는데, 육회에 이 이상의 취식방법이 있다는 것인가?
의아함을 표출하는 심사단 앞에 선 안영길이, 돌연 접시에 손을 뻗는다.
그 행동에 깜짝 놀란 심사단의 이목이 집중되고, 그들의 시선이 모인 곳. 안영길의 손끝은 여태껏 장식이라고만 생각했던 가루를 가리키고 있었다.
"저희가 공들여 만든 총 네 종류의 특제 소금. 이걸 같이 뿌려 드셔야만, 저희 요리를 완식했다고 할 수 있겠죠."
특제 소금!
그 생소한 단어에 찬혁의 눈가가 흠칫 떨리곤, 이내 부드럽게 휘어진다.
'거 참, 이 아저씨들 진짜.'
사람 놀리는 거에 습관이 든 스승의 속내가, 이제야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