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요리고 고인물-376화 (376/403)

376. 쇼는 계속된다.-1-

Show must go on. 어떤 일이 있든 방송은 진행되어야 한다. 방송사에서 표방하는 대표적인 슬로건 중 하나인 이 말은 그런 방송사 수십 곳이 모여 공동 주최한 이 대회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이었다.

방송의 존망이 걸린 사태가 일어나도, 제작진이 대비하지 못한 사태가 일어나도 쇼는 이어진다.

그건 당연히 지금도 마찬가지다.

잠시 예상하지 못한 소요가 있긴 했으나, 최대한 빠르게 멘탈을 다잡은 MC는 비어 버린 오디오를 가만 놔둘 생각이 없었다.

"아아! 예상치 못한 상황에 선수도, 관객 여러분도 많이 당황스러우신 듯합니다. 물론 이해하죠. 하지만 여러분! 너무 실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좋아하는 간식을 잠깐 아껴두는 기분으로 다시 찾아올 대결을 기대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러나 너무 아쉬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곧 시작될 두 시합은 디저트를 더욱 돋보이게 해줄 메인이벤트니까요! 배가 가득 차지 않으시도록, 여러분 모두 성대한 응원으로 칼로리를 불태워주십시오!"

서로를 잠시 바라보곤 돌아서는 찬혁과 로랑. 그들의 등으로 환호성과 박수갈채가 날아든다.

아쉽게도 당장은 불발로 그칠 수밖에 없었으나 두 사람의 대결은 저 수많은 방송사와 대기업조차 한발 물러서 줄 정도로 인정을 받고 있단 것을 관객 또한 깨달았다는 것이다.

"자, 그럼 더 시간 끌지 말고 바로 시작해볼까요? 한국 대 프랑스, 프랑스 대 한국 두 번째 시합! 단체전의 주제 추첨을 시작하겠습니다!"

MC의 호령이 끝남과 동시에, 이번에는 전광판에서 룰렛이 세차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오."

그리운 이펙트다. 찬혁이 무심코 감탄사를 뱉었다.

매 경기 때마다 스테이지를 이 나라 저 나라 옮겨 다니며 수많은 연출을 봤지만, 역시 가장 처음 본 것이 눈에 남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나라라 더 익숙한 것도 있고.'

하지만 그 익숙함이 항상 호감으로 다가오진 않는다.

랜덤과 확률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것인지 요 세 달 동안 뼈저리게 실감한 장본인이 바로 찬혁이었으니까.

"내 이럴 줄 알았다."

그리고 오늘 또한 역시, 운은 찬혁의 편이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고 프랑스팀의 편인 것 또한 아니었지만 말이다.

룰렛 위로 떠오른 한마디의 문자열은, 그만큼 양 팀의 셰프들에게도 대단히 낯선 것이었다.

"특수육류?"

특수육류라니, 대체 저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단어에 일동이 난해함을 느끼던 그때, 잠시 뒤로 빠져 있던 심판이 그들의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나섰다.

"특수육류는 추가 규칙이 존재하는 주제이므로 이제부터 설명을 시작하겠습니다!"

추가 규칙. 아예 룰 자체가 바뀌는 특수 규칙과는 달리 기존의 룰을 유지하며, 거기에 규칙이 추가되는 형태의 주제다.

이 추가 규칙의 룰은 주제마다 제각각이긴 하지만, 적어도 최소한 이전과 같은 기반을 유지하는 추가 규칙 주제는 특수 규칙 주제보다는 조금 더 규칙의 이해가 편했다.

'그게 곧 쉬운 주제라는 건 아니지만…… 일단 좀 더 들어보자.'

고민스런 눈초리로 심판을 바라보는 가운데, 그가 말을 잇는다.

"특수육류 주제는 말 그대로 일반 소비자 사이에서 소비되는 일이 드문 특수한 육류에 대한 주제입니다. 정확한 수치로는 국가의 식육 소비량에서 점유율이 1%를 넘지 않는 육류와 가금류. 이를 이용한 세 가지 요리를 완성하십시오."

다른 재료는 물론 이용할 수 있다.

생선, 채소, 조미료, 소스, 유류, 난류. 얼마든지.

그러나 특수육류는 반드시 들어가야 하며, 이를 제외한 육류 및 가금류의 사용은 금지한다.

"주제의 특수성에 따라 식육 소비량의 수치는 각 팀의 국적을 기준으로 차등 적용합니다. 조리시간은 150분. 이상, 조리를 시작해주십시오."

이번에도 난처한 주제다. 찬혁은 이 대회의 악랄함을 또다시 체감하며 자그마한 한숨으로 마음속 불합리함을 쫓았다.

***

"요컨대 지비에gibier로구만."

후에 전해진 추가 규칙에 대한 설명문을 받아든 루이의 요약에 헬레나가 고개를 젓는다.

"그거랑은 조금 다르지 않나요?"

지비에란 가축이 아닌 수렵한 동물의 고기를 말하는 것이다.

야생에서 자란 동물 특유의 강한 향취와 희귀함 탓에 현대에 와서는 쉬이 구할 수 없게 된 식재료이나, 그 꾸밈없는 야생의 맛에 도취된 이는 지비에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고 할 정도의 맛을 자랑한다.

물론 그것도 요리사의 실력에 따라 다르고, 여기 모인 프랑스팀의 셰프 군단 중 지비에를 조리하지 못하는 이는 없다.

다만 지금의 주제와는 조금 궤가 다르다는 것이다.

"'소비되는 비율이 적다'라는 의미에서야 지비에도 나름 방법일 수는 있겠지만, 굳이 꼭 지비에를 쓰란 법은 없잖아요?"

"예를 들어 멧돼지를 식재료로 사용한다면 그건 돼지고기로 치는가…… 라는 문제?"

"비슷하죠."

사실 멧돼지고기와 돼지고기는 업계에선 전혀 다른 취급을 받지만, 생물학적인 관점에서는 기껏해야 점박이 돼지냐 분홍색 돼지냐 털이 억센 돼지냐 정도의 차이.

이것이 규칙에 걸릴지 걸리지 않을지는 정확히 모르는 이야기지만 본래 '해도 되나?'라는 생각이 드는 건 하지 말란 말도 있다.

"게다가 지비에는 좀…… 대중적인 입맛은 아니잖아요?"

"그렇긴 하지."

지비에를 찾는 미식가가 많은 건 사실이지만 미식가의 선택이 언제나 대중의 모스트 픽이라는 생각을 해선 안 된다.

미식이란 결국 경험과 지식, 훈련의 영역이다. 지비에의 가장 큰 특징인 강렬한 향취가 평범한 사람에게는 참을 수 없는 악취가 될 수도 있다.

심지어 지비에는 노련한 미식가 사이에서도 꺼리는 사람이 많은 식재 중 하나. 심사위원 중 그런 사람이 없으리란 보장도, 지비에를 완전히 소화할 자신도 없다면 그냥 시도를 그만두는 편이 낫다.

그렇다면 이기기 위한 식재료는 무엇인가?

'이건 답이 없는 문제지.'

시험을 잘 보려면? 교과서 위주로 공부하세요. 어이가 없는 소리지만 틀린 말이냐면 그렇지도 않다.

결국 자신이 잘 하는, 잘 아는 요리를 해야 승산이 생기고, 거기에 상상력이라는 마법의 조미료를 넣으면 승리의 길이 열리는 법.

루이는 작게 숨을 뱉곤 입을 열었다.

"그럼 이번엔 우리 에이스 이야기나 한번 들어볼까. 이봐, 로랑."

프랑스팀의 에이스라면 누가 뭐라 해도 로랑 마틴. 찬혁과의 맞대결이 밀린 탓에 심기가 불편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그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답한다.

"예."

"이번 주제에 뭔가 하고 싶은 말 없나?"

"이 팀은 나 없으면 어떻게 굴러갈까 몰라."

"그래서 지금까지 온 거 아니냐. 네가 있어서."

말이나 못 하면. 어이가 없어 인상을 찌푸린 로랑이 답했다.

예전 같았으면 대꾸도 없었을 것이 분명한 그가, 약간 까칠하긴 해도 제법 말문이 트였다. 같은 목적을 갖고 함께 고생한 사람들 사이에서 싹튼 일종의 전우애였다.

"어설픈 걸 꺼내 봤자 아무런 소용도 없을 겁니다. 이럴수록 심플하게 해야지."

"단순한 게 최고다Simple est le meilleur?"

"그것보단, 최대의 최선을 노리자는 거야."

최선을 다하자는 말이 아니다. 개인과 팀의 기량을 면밀히 검토했을 때 최선의 결과를 도출할 수 있는 확실한 플랜을 정확히 파악하고 움직여야 한단 뜻이다.

"이봐요, 아저씨. 팀장인데 뭐 더 할 말은 없어?"

"이럴 때만 팀장이지. 하아, 그래 뭐. 미리 말해두자면 이번 주제에서 주의해야 할 건 류찬혁이 아니다. 반대로 다른 팀원들을 훨씬 경계해야 해."

"이유는?"

"나이가 많기 때문이야."

"…… 셰프, 혹시 막 동질감 느껴서 그런 거 아니죠? 상대 팀장한테?"

"아니야! 크흠. 물론 나이가 훨씬 많으니 기술이 더 뛰어나다는 뜻으로 한 말은 아니다. 여기까지 오면 시간으로 익힌 기술 같은 건 개입할 여지가 없지.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이번 주제에 한해선 노인의 경험을 무시할 수 없단 소리다."

"?"

헬레나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프랑스팀 중에서도 로랑 다음으로 젊은 그녀는 노익장을 과시하는 루이의 말을 쉬이 이해하지 못했다.

"특수육류…… 말이 좋아 특수육류지 다시 말하면 사람들이 잘 안 먹는 고기…… 그것도 보통 안 먹는 게 아니라 다른 고기를 백 번 찾아 먹을 때 한 번 먹을까 말까 한 고기라는 뜻이야. 그러면 문제. 이런 고기를 취식 하는 사람은 무슨 이유로 이걸 먹었을까?"

"어…… 맛있어서?"

"음…… 그야 현대 기준에선 그게 정답이긴 하지. 근데 이번에는 조금만 원초적으로 가보자. 왜 예전 사람들은 현대에선 특수육류라고 불리는 식재료를 먹기 시작한 걸까?"

"음…… 죄송해요. 잘 모르겠어요."

"정답은 먹을 게 없어서야."

먹을 게 없어서? 헬레나의 의아함에 더더욱 무게가 실린다.

"그래. 젊은 너는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 현재 프랑스에서 가장 대표적으로 소비되는 육류나 가금류는 소, 돼지, 양, 닭, 오리, 메추라기, 거위 정도다. 한 명의 사람이 1년에 소모하는 100kg이 넘는 육류 대다수는 이런 가축의 부산물이다…… 만."

숨을 고른 루이가 말을 이었다.

"사람들이 이렇게 규칙적이게 육류를 소모하게 된 건 생각보다 얼마 안 된 일이다. 아무리 많이 잡아봐야 100년 내외. 산업화와 무역의 발달로 가축의 생산과 공급이 사람들의 소비를 따라잡기 시작한 뒤에야 이런 규칙이 생길 수 있게 됐지."

"거기다 세계대전 같은 굵직한 사건도 포함하면 그보다 더 줄어들고."

"그래. 정답이야."

로랑의 첨언에 루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 이전의 사람들에게 특수육류라는 건 정말 못 먹을 동물이 아닌 이상에야 존재하지 않았지. 그게 참새든, 들쥐든, 뱀이든, 사냥할 수 있는 짐승이라면 뭐든 잡아먹었어. 지금이야 고기가 남아서 버리는 실정이다마는."

"쉽게 정리하자면, 사회가 문명화 될수록 특수육류를 접할 기회는 적어진다. 제4세계 부근의 나라와 선진국을 비교하면 명명백백하지."

"…… 아, 과연."

이제야 말뜻을 이해한 헬레나가 놀란 눈치로 감탄을 뱉었다.

"반대로 말해서, 구시대를 산 사람일수록 지금의 특수육류를 실제로 접해본 일이 많다. 그게 류 셰프가 아닌 다른 팀원을 조심해야 할 이유라는 거군요."

"이제야 좀 말이 통하네."

"야 좀."

로랑의 비아냥에 빈축을 넣은 루이가 이어서 말했다.

"소만 해도 한 마리의 소에서 나오는 고기를 수십 가지 부위로 나눌 수 있지. 부위마다 맛도, 식감도, 올바른 취식 방법도 전혀 달라. 이것만큼은 경험이 없는 사람은 결코 따라가지 못할 부분이야."

왜냐하면 굳이 특수육류에 대한 공부를 할 이유는 없으니까.

메이저한 식재료나, 마이너 중에서도 나름 채산성이 있는 몇 가지를 배우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찬 게 현대의 셰프다. 아무리 괴물 같은 능력을 보여준 찬혁이라 한들 이번 주제에서까지 똑같을 리는 없다.

"물론 이건 우리한테도 그대로 통하는 말이다. 나도 제법 나이가 있는 편이다마는, 실제로 그런 시대를 살았느냐 묻는다면 그렇다곤 할 수 없는 몸이야."

"쓸모없는 늙다리."

"…… 아무튼, 그런 우리라도 충분히 이 방면에 능통할 상대와 겨룰 수 있을 식재료를 찾는 것. 이게 우리의 최우선과제다."

"그런 게……."

그런 게 있을 리가 없다. 허탈감을 참지 못하고 끊겨 버린 헬레나의 말.

그러나 그것은 성급한 생각이다. 그녀와는 다른 생각을 최초부터 갖고 있던 사람이 한 사람 있었으니까.

"그래서 말했잖아. 심플하게 가자고."

로랑이 바로 그러한 사람이었다.

"특수육류고, 우리한테도 익숙하고, 조리법도 확실히 숙지하고 있으면서, 고기 자체 맛도 제법 나쁘지 않은 고급 식재료가."

그런 꿈같은 식재료가 마침 존재하고 있다고? 헬레나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곤 로랑을 닦달한다.

"뭐야? 뭔데 그게?"

"그거."

"?"

짧은 대답과 동시에 자신을 가리키는 로랑의 손가락을 본 헬레나가 당황한다.

'인육?'

아니, 미친 게 아니라면 그럴 리가 없지. 충분히 미친놈이긴 하지만 그 정도는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가 자신의 옷차림을 내려다본 그 순간, 그녀의 눈에 무언가의 형상이 들어온다.

그녀가 평소 입는 조리복에 세트로 포함된 붉은 스카프.

자신의 것이라는 뜻으로 하얀색 실로 자수한 무언가의 형상.

동그란 얼굴과, 그 위로 쫑긋 솟은 한 쌍의 기다란 귀.

"토끼……?"

자기 이름 대신 새겨놓을 정도로 좋아하는 그녀의 최애 픽이, 아이러니하게도 젊은 요리사에게 영감을 선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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