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요리고 고인물-375화 (375/403)

375. 재전.-4-

장시간 조리 대결. 분명 제작진 입장에서는 쉬이 받아들이기 힘든 주제였으나 그들로서도 현 상황에는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두 명의 선수가 아무런 이의 제기도 없이 수락했다.

이걸 제작진 측에서 무작정 안 된다고 해봤자 이미 시합의 분위기에 도취된 관객과 시청자들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으리라.

그걸 본능의 영역에서 직감한 심판은, 하는 수 없이 진행을 잠시 멈추곤 그의 귀에 이어진 무전기를 통해 물었다.

"이거 어떻게 합니까?"

"…… 잠깐 기다려봐요."

그와 무전으로 연결된 제작팀 본부실에서 상황을 관찰하던 메인PD가 침울한 음성으로 대기를 지시를 내렸다.

심판이 당황하여 상급자를 찾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기실, 심판이라는 이름을 대긴 했지만 이 대회의 심판은 어디까지나 대회에는 참석하지 않은 요리계의 원로 중 지원자를 뽑아 대회규칙에 대한 교육을 한 후 투입하는 것일 뿐이었으니까.

물론 그들에게도 심판다운 권한은 있다. 괜히 요리계의 원로 셰프를 모집한 게 아니다. 일반인을 한참 뛰어넘는 지식은 곧 판정에 대한 신뢰로 이어지는 법이기에.

그러나 그런 그들도 이런 사태에 대한 매뉴얼만큼은 따로 전달받은 바가 없었다.

한 사람의 심판이 혼자 오롯이 짊어지기엔 너무 무거운 책임의 무게에 심판이 굳어 있을 무렵, 제작진은 그들대로 긴급회의를 진행하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이거 어떻게 하죠."

"그러게 말입니다……."

"일단 두 선수가 서로 합의를 마친 이상 저희도 허가를 해줘야 하는 게 아닌지……."

"허가를 해주면, 그 선수들 경기한다고 오늘 하루 일정을 통째로 날리자고요? 다음 시합이나 3위 결정전 스케줄까지 미루면서요? 안 돼요. 손해 이전에 관객이나 시청자들 불만이 장난 아닐 겁니다."

"그렇다고 안 된다고 하시게요? 그럼 불만에 더해서 프로그램의 신뢰성까지 잃게 돼요! 당장 얼마 전만 해도 그런 일이……!"

"그만! 그 이야기는 꺼내지 말자고 하지 않았습니까!"

비밀서약서에 서명한 통역가를 대동하고 펼쳐지는 그들의 논의는 평행선을 달렸다.

누군가는 실행해야 한다, 누군가는 취소해야 한다. 서로의 합의점이 쉽게 맞물리지 않고 팽팽하게 맞서지만, 문제는 이 논의를 평생 이어나갈 순 없단 것이었다.

아니, 오히려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굉장히 짧은 편이었다. 늦어도 5분 이내에는 해답을 찾아내어 합의를 보아야 할 상황.

그러나 스케줄과 관객, 그리고 대회 자체의 당위성이란 부분에 걸린 무게는 결코 만만하지 않다.

고작 300초에 불과한 시간 만에 결정하기에는 너무 중대한 주제. 한국 특유의 인터넷 통신 기술을 활용한 회의 자리는 기적적으로 빨리 만들어졌지만, 그 기적의 위력을 십분 발휘하기에는 주제가 너무 어려웠다.

째깍, 째깍.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를 환청으로 듣는 와중에도 그들의 입에서는 침음성만 나올 뿐, 누구 하나 쉬이 입을 여는 이가 없었다.

바로 그때였다. 생소한 목소리가 갑자기 그들 사이에 팽배한 침묵을 세차게 깨부순 것은.

"저기…… 잠시 제가 따로 말 좀 해도 괜찮을까요?"

"응?"

그 목소리는, 사실 이 회의에 참석한 이들에게 그렇게 생경한 인물의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회의가 시작된 이후 지금까지 계속 이 회의에 참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네가?"

"아, 네. 제가 지금 좋은 생각이 떠오른 것 같거든요?"

"왜?"

현장 제작진 중 가장 높은 직위를 가진 본부장의 입에서 나온 말은 모처럼 해결책을 제시하겠다고 나선 이에게 돌려주는 것이라기엔 부적절한 언사였으나, 이 자리에 그것을 지적하는 이는 없었다. 다른 이들 또한 사실 그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어…… 좋은 생각이 떠올라서요?"

그 이유는 바로 회의실의 침묵을 깬 이가 여태껏 통역가라는 이유로 긴급하게 불러온 연출팀의 신입 막내PD. 아주 대놓고 말해 말단 중에서도 말단이었으니까.

물론 PD라는 직책 자체는 제작진 내부에서도 상당한 위치를 자랑한다 해도 최소가 본부장급인 이 회의에서 이 신입 막내PD의 위치는 갓 임관해 아무것도 모르는 소위보다 못했다. 말 그대로 통역만을 위해 본부장과 동행한 인물이다.

"……."

"저기, 말씀드려도 괜찮을까요?"

본부장은 이 바로 직전까지 제법 크게 망설였다. 애당초 이 회의에 발조차 들이지 못했을 신입. 자기 업무나 제대로 이해했을까 의심될 정도로 새파란 새싹의 의견. 거기에 아까운 시간을 사용할 이유가 있을까.

"…… 좋아. 말해봐."

그럼에도 본부장은 일단 그것을 들어보기나 하자고 마음먹었다.

원체 그 누구도 입도 벙긋 않는 회의에서 그나마 나온 의견이다. 마냥 신입이라고 묵살하기에는 그들이 너무나도 절실했다. 그야말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라고 할까.

"아, 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딱히 기대를 한단 뜻은 아니었다. 왜 지푸라기를 지푸라기라고 하겠는가? 다만 썩은 동아줄이든 삭은 동아줄이든 일단 뭐라도 잡고 난 다음 생각할 일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가장 큰 문제는 안 할 수도 없는데 허가하면 스케줄이 엄청나게 꼬인다는 거잖아요? 그럼 이렇게 하면……."

"…… 어?"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일까.

그 엉뚱하고 겁 없는 신입PD의 입에서 나온 말이, 어째선지 굉장한 현실성과 당위성을 갖고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복잡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자금이나 시간을 크게 소모할 필요도 없다는 점에서 신입PD의 발상은 그야말로 완벽 그 자체였다.

"아니, 그거 상당히 좋은 생각인데요?"

"근데 그런 설비를 당장 설치할 공간이……."

"그건 시합 중에 얼른 준비하면 생각보다 빨리 준비를 끝낼 수 있을 것 같은……."

회의에 참가한 수많은 중역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신입PD의 당돌한 제안을 긍정한다.

물론 그 PD를 통역사로 두고 있던 본부장 또한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그는 상당히 놀란 눈으로, 자신이 손에 쥐었던 것이 썩은 동아줄이 아니라 파라코드 다발로 된 와이어였다는 사실에 경악하고 있었다.

"아니, 왜 좋은데?"

"예?"

"예는 인마. 너 이름 뭐랬지?"

'자네'에서 '너'로 불쑥 가까워진 지칭이었으나 신입PD는 눈치채지 못하고 그저 뒷머리를 긁적이며 멍하니 대답할 뿐이었다.

"여동진이라고 합니다."

"어, 그래. 동진아. 기억하고 있을게. 잠깐 나가서 너네 메인PD 좀 들어오라 해라."

"예? 아, 네."

탈출구가 보인다. 본부장은 웃었다.

***

약 10분 정도의 기다림 끝에, 비로소 침묵을 지키던 심판이 외친다.

"회의가 끝났습니다. 장시간 조리가 정식 주제로 결정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호오. 이게 먹히는구나. 조금 의외네.

나도 그냥 흥미 반, 승산 반으로 한 번 받아들여 본 거였는데 말이다.

'근데 진짜 어쩌려고 그러지?'

보통 장시간 조리라고 하면 평범한 사람들은 기껏해야 열 시간 육수 끓이기 그런 걸 생각하겠지만, 프로 셰프의 세계에서 장시간 조리라는 건 그 정도 수준이 아니다.

적당히 시간을 들인다면 24시간. 어떨 때엔 쌩 사흘을 요리 하나에 쏟아붓는 반쯤 미쳐 버린 양반도 있다.

'열 시간 정도만 이 대결에 투자 한다 쳐도 상당히 손실이 클 텐데.'

말이 열 시간이지 거의 한나절에 가까운 시간이다. 그 정도면 일단 하루 일정이 죄다 캔슬 난다고 봐도 좋을 거다.

아무리 결승전이라지만, 한 번의 경기에 그런 도박을 감행할까?

그런 내 의구심은 이윽고 심판의 입에서 뒤이어 나온 말에 의해 해소됐다.

"이번 주제에는 특별 규칙이 적용됩니다!"

"특별 규칙?"

개인전에서 선수가 임의로 선택한 주제에 특별 규칙이 붙는다고?

나는 물론 주제를 선택한 로랑 마틴마저 당황스런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가운데, 심판이 말을 잇는다.

"특별 규칙 하나! 본 개인전의 순서는 이번 시합의 가장 마지막 순서로 변경됩니다! 때문에 순서가 돌아오기 이전에 스코어 2점을 선점하는 팀이 나올 경우, 본 개인전은 취소됩니다!"

"허?"

"뭐라고!?"

본래 첫 번째 순서인 시합 순서의 변경, 그것만으로도 놀랄 일이지만, 뒤이어 나온 규칙은 그보다 더욱 놀랍다.

"둘! 본 시합의 제한시간은 24시간! 조리 시작 후 24시간 이내에 요리를 완성하여 제출해야 합니다!"

24시간이라니. 하루를 통째로 주겠다는 건가? 그만한 시간이 있다면 그야 못 만들 요리는 거의 없다고 봐도 좋겠으나 스케줄에 대한 생각은 아예 없는 건가?

그리고 그런 생각은 나의 기우로 그친다.

제작진에서 내놓은 이 주제를 해결하기 위한 답은 생각보다 완벽한 모범답안이었기 때문이다.

"셋! 본 시합이 취소되지 않고 시작할 시, '당일의 시합'은 종료됩니다! 두 선수는 제작진에서 제공하는 독방에서 요리를 만들어주십시오. 통신 기구는 수거되며, 시합 종료 시 반환됩니다. 조리실 내부는 24시간 촬영되고 있으며 생방송으로 진행상황이 공개됩니다. 외부에는 마찬가지로 스태프가 상시 대기하고 있으니 외부출입 때에는 항상 대동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오호라. 이제야 알겠구만.

'그런 거였어.'

쉽게 정리하자면 그거다.

2라운드가 끝난 뒤에도 결판이 나지 않았을 경우, 그 시점에서 당일의 시합을 종료하며 바로 3위 결정전을 시작한다.

개인전을 3라운드로 취급하긴 하지만, 24시간 동안 조리하여 제한시간 이내에 요리를 끝내고 심사는 그 다음날. 즉 메달 수여식과 폐회식이 있는 당일에 공개하겠다는 것.

'누군지는 몰라도 머리 좀 굴렸는데.'

이러면 이 개인전이 실제로 시작될 시 엄청나게 걸린 게 많아지게 된다.

'아니 뭐, 사실 실질적으로 걸린 거야 똑같겠지만…….'

눈으로 보이는 것의 차이라고 할까.

1회 초의 만루 홈런과 9회 말의 만루 홈런은 척 보기에도 무게가 조금 달라 보이지 않는가?

점수는 같은 점수임에도 객석의 환호성이 다른 건 분명 승패가 갈리는 모습이 아주 직관적이고 알기 쉽게 그들에게 다가가기 때문이리라.

'만약 이번 시합이 1:1로 갈려서 개인전이 된다면…….'

장담컨대, 아마 그 개인전 심사는 이 대회 최고의 볼거리가 된다. 이건 예감이라기보다 예상에 가깝다.

'다만…….'

그 볼거리 안에 내가 끼어 있지만 않았다면 훨씬 좋았을 텐데 말이지.

"와, 끝내주게 메슥거리네."

이것이 신경성 위경련? 진짜 마지막까지 가버리면 그땐 진짜 거하게 한 바가지 게워내는 거 아닌가 몰라.

조금씩 움찔거리는 것 같은 위장을 옷 위로 쓰다듬으며 나는 살짝 죽은 표정을 감췄다. 뭐, 그때는 그때대로 어떻게든 되겠지.

지금은 그저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었다.

***

"마지막이라…… 젠장."

한껏 끓어오른 피를 달래며 로랑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제야 기다렸던 결판을 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하필 자신이 선택한 주제로 결판의 시간이 밀려나 버린 탓에 상상 이상으로 짜증이 치솟았다.

그렇다고 합당한 조치를 취한 제작진들에게 그 짜증을 풀 수도 없는 노릇이라 인상은 찌푸려지기만 할 뿐이다.

사실, 여기서 본인에게 짜증을 돌린다는 점에서 로랑은 이미 과거와는 제법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고 봐도 좋았다.

옛날 같았다면 아무 거리낌 없이 남에게 화풀이를 했을 테니까.

"그래, 상관없지."

이렇게 된 이상 압도적으로 이기든, 아니면 정말 마지막에 승부를 보면 될 뿐이다.

어느 쪽이 됐건 이 꿉꿉한 심정을 끝낼 수 있는 건 마찬가지일 테니까.

불완전연소 된 두 젊은 요리사의 투지가 점차 불꽃의 크기를 줄인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재가 되는 것이 아니다.

장작에 불을 붙이고, 일부러 산소의 공급을 차단하여 탄소화시키는 것으로 순도 높은 숯을 만들어내듯.

그들의 투지는 오로지 압축되고 압축되어, 제 몸에 다시 불을 지필 날을 기다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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