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4. 재전.-3-
이제 와서 이렇게 말하자니 너스레를 떠는 것처럼 들릴 것 같아 좀 그렇지만, 사실 난 제법 쉽게 긴장하는 성격이다.
다만 타고난 무표정 탓에 그게 바깥으로 잘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예를 들어 회귀 전, 처음 정직원 면접을 볼 때엔 얼마나 긴장했었는지 그날 입었던 양복 와이셔츠가 땀으로 흥건했다.
그것도 이곳저곳 이직하면서 면접 경험이 쌓인 뒤로는 좀 나아졌다마는, 외국으로 처음 나갈 때엔 또 '내가 배운 말이 잘 통할까?'하는 불안감 탓에 비행기에서 식은땀을 너무 흘려서 스튜어디스가 걱정을 다 해주었을 정도였다.
'그때는 덕분에 말이 통한다는 걸 깨달아서 그럭저럭 괜찮아졌지만.'
내 전적은 그때 한 번이 전부가 아니다.
한 번 겪었던 스케일 정도라면 어찌저찌 괜찮지만 내 경험을 넘어서는 스케일에 처음 도전할 때에는 언제나 그랬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은, 장담하건대 내 평생에서도 더없는 스케일의 도전이었다.
"후……."
대체 무슨 덕을 쌓았기에 찾아왔는지 모를 두 번째 삶이라 한들 결국 살아가는 건 나니까, 이런 점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점에서 더욱 '내'가 살아 있음을 실감한다.
그리고 오늘은, 내 살아 있음이 단순히 '살고' 있는 게 아니라 '달성'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자리가 된다.
그런 자리로, 만들어 보이겠다.
***
한국팀과 프랑스팀.
어찌 된 인연인지 돌고 돌아 결국 다시 만난 두 팀이 서로를 마주한 곳은, 이전 서로와 헤어졌던 자리다.
스테이지 위에 올라 서로를 마주 보는 두 팀의 시선이 매섭다.
서로 죽을 고생을 해서 올라온 것이다. 기왕 올라온 이상 우승을 하겠다는 각오가 있다.
'저쪽은 거기에 하나 더 낀 것 같지만…….'
찬혁은 상대의 이상할 정도의 기백을 절절히 느끼고 있었다. 시선에 섞인 뼈가 저릴 정도의 투지.
같은 상대에게 두 번 질 수는 없다는 다짐이 그들의 각오 위에 얹혀 있기에 나오는 기백.
특히 그중에서도 찬혁을 바라보는 로랑 마틴의 눈에는 일종의 광기마저 엿보였다. 피부 위를 송곳 끄트머리로 지분거리는 듯한 따가운 감각.
눈매를 작게 찡그린 찬혁 또한 로랑을 마주본다. 그러나 그 눈동자 속에 담긴 기세는 겉치레를 한 꺼풀 벗은 광기에도 크게 밀리지 않는다.
광기에 물든 시선? 찬혁에게 있어 그건 그렇게 대단한 게 아니었다.
본래 어느 업계든 정상에 오르기 위해선 다른 사람이 보기에 미쳤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의 무언가가 필요하다.
그것이 노력이든, 재능이든, 재력이든, 사상이든. 그 무엇이 됐던 간에 평범한 사람의 상상을 초월하는 무언가가.
찬혁 또한 회귀 전과 후를 가리지 않고 나름 요리업계의 끝을 보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정진하는 요리사였다.
본래 다른 사람이 잘 찾지 않는 길을 걷다 보면 자신과 비슷한 사람의 흔적을 많이 찾을 수 있다. 유유상종. 자신이 걷던 길에서 발견한 흔적은 결국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의 흔적이니까.
그 정도쯤 가면 다들 어딘가 하나는 미쳐 있다. 나사가 빠졌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는 찬혁 본인 또한, 충분히 머리에서 나사가 빠진 사람이었다. 그것도 한두 개가 아니라 다발로.
그렇지 않으면 진즉 발을 뺄 수 있을 지옥에 다시 얼굴부터 들이미는 짓은 하지 않았을 테니까.
승리를 향한 광기가 깃든 두 쌍의 눈이 서로를 마주친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여러분! 글로벌 푸드 서바이벌 시즌2! 세 달에 달하는 여정이 곧 끝을 맺습니다! 이곳이 바로 세계 최고의 요리사를 가리는 자리! 지금이 바로 세계 최고의 요리사를 가릴 시간! 한국 대 프랑스! 프랑스 대 한국! 첫 번째는 우연, 두 번째는 운명! 운명이 이끈 두 셰프 군단의 승부가 지금 시자아악─합니다아아!"
재전再戰을 알리는 승부의 공이 울린다.
***
"양 팀의 선수들! 스테이지 중앙으로 나서주시기 바랍니다!"
나름 결승전인데 크게 바뀌는 건 없구나.
무심코 그런 감상을 느끼곤 작게 고개를 저었다. 형식이 익숙한 탓에 잠시 잡생각이 들어간 참이다.
'그러고 보면 그런 걸 배운 적이 있었지.'
형식을 가꾼다는 건 마음이 아니라 몸에 각인하는 과정. 마음이 어지러워도 몸이 형식을 기억하고 있다면 손이 흔들리지 않는다.
군대에서 제식이나 주특기를 반복적으로 훈련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고, 운동선수의 루틴 또한 반복적인 행동으로 마음과 신체에 시동을 거는 것과 같다.
'이럴 때 시합을 여러 번 치른 덕을 볼 줄이야.'
아까까지 가슴 바깥으로 튀어나올 듯 두근거리던 심장의 고동이 조금이나마 진정된 것 같았다. 호흡이 편해진 기분이다.
그렇게 되자, 상대의 모습이 조금 더 선명하게 보인다.
석 달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선 다섯 명의 셰프. 그러나 그 속에 잠든 무언가는 분명 그때와는 전혀 다르다.
미묘하게 겉으로 배어 나오던, 상대에게 개의치 않는 모습이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아니, 어떤 의미로는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다는 태도긴 한가.'
누가 됐든 반드시 이기겠다는 모양새였으니까.
패배와 승리는 사람을 이토록 크게 바꿀 수도 있는가.
'잘 알지.'
나 또한, 숱한 패배를 겪고 깨달은 사실이다.
패배란 확실히 인생에 남는 오점 중 하나다. 아주 큰 오점이고, 치우기도 쉽지 않은 것이지.
그러나 오점이 곧 실패를 뜻하지는 않는다. 패배로 인해 명예는 실추될지언정, 그렇게 떨어진 것은 거름이 되어 곧 성장을 위한 영양분이 된다.
'난 그걸 깨닫기까지 한참이 걸렸는데 말이야.'
역시 재능 있는 사람은 다르다는 건가.
'…… 아니, 오히려 재능이 있기에 깨닫지 못해.'
그들은 그저 강한 사람일 뿐인 거다. 원래 저렇게 강한 건지, 아니면 이 대회를 통해 강해진 건지는 알 수 없지만.
강한 사람과의 다툼은, 당연하게도 굉장히 어렵고 힘들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그런 힘든 싸움에 나선다고 생각하자마자, 오히려 몸에 살짝 남아 있던 긴장감마저 쭈욱 빠져 버렸으니까.
탈력감? 아니. 그런 게 아니다. 이건 보다 조금 더 단순한 것이었다.
'육체가 깨달은 거야. 몸에는 더 이상 긴장할 리소스가 남지 않았다는 걸.'
긴장할 정신이 있다면 상대를 경계해라. 몸에 축적된 에너지를 오롯이 상대를 이기기 위해 사용해라.
뇌가 아닌 척수에 남은 무의식의 명령이었다.
"좋아. 해보자고."
반드시 이긴다. 이를 악물고 그렇게 다짐했다.
***
다시 마주한 상대의 얼굴은 상상 이상으로 평온하게 보였다. 적어도 로랑 마틴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얕보고 있는 건가?'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사라진다.
상대를 얕보는 인간의 시선은 저토록 곧지 않다. 저토록 맑지 않다. 과거의 본인이 그런 부류의 인간이었기에 더더욱 명백히 아는 사실.
다만 마음에 한 점 흐림 없는 시합을. 그것을 바라는 이의 시선이었다.
"코인토스를 시작하겠습니다. 양 팀 대표. 방향을 선택해주시죠."
"뒤."
"앞."
루이 라벨과 안영길의 코인토스를 한 걸음 뒤에서 바라보고 있자니 로랑의 머릿속에 이전의 시합의 한 장면이 스쳐 지나간다.
그때도 저 두 사람이 나서 코인토스를 진행했고, 그 결과 로랑은 찬혁을 상대로 지목했으며, 찬혁은 닭 요리라는 주제를 지목했다.
다만, 이번의 양상은 살짝 다르게 움직인다.
"코인의 방향은 앞! 앞면입니다! 따라서 한국팀이 상대를 지목하겠습니다!"
이번에는 반대. 코인토스의 면을 맞춘 것은 그들이었다.
잠시 고민스런 표정으로 코인을 바라본 안영길은, 이윽고 아무 말도 없이 심판에게 등을 돌린다.
"아, 안영길 선수. 선택을……?"
그런 그의 모습에 당황하며 손을 뻗는 심판도 아랑곳없이, 안영길은 이미 정해진 일이었다는 듯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
"류찬혁 학생. 이번 대결 상대를 지목하도록 하세요."
"네!"
마치 첫 시합 때 루이가 로랑에게 상대를 지목할 권한을 넘겨주었던 것처럼. 이번에는 안영길이 찬혁에게 그 권한을 넘긴다.
사방의 관객이 놀란 표정을 짓는 이때, 조금도 놀라지 않은 얼굴을 한 사람이 두 명.
"제가 선택할 상대는, 당신입니다."
찬혁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에, 만면 가득 피어오른 웃음을 감추지 못하는 남자가 한 명.
"très bien."
로랑은 찬혁의 선택을 온몸으로 반겼다.
"아아! 류찬혁 선수의 선택은 바로 프랑스팀의 최연소 셰프 로랑 마틴 선수! 그의 복수전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것일까요! 기묘한 구도입니다만, 이번 대회 최연소! 그러나 이번 대회 최고의 승률을 유지 중인 디펜더가 복수의 칼을 든 도전자를 선택합니다!"
그 선택을 진정으로 반기는 이는 비단 로랑만이 아니다.
옆에서 이 상황을 중계하던 MC 또한, 이 장면이 이번 대회 최고의 명장면 중 하나가 될 것임을 감히 의심할 수 없었다.
되풀이되는 최초의 대결. 되풀이되는 최초의 개인전.
과연 그 결과 또한 되풀이될 것인가! 그런 수많은 의문 앞에서 마음의 정리를 끝낸 로랑이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이번엔 내가 주제를 선택할 차례네. 맞습니까, 심판?"
"에, 아! 그렇습니다. 로랑 마틴 선수, 주제를 선택하십시오!"
심판의 호령에 로랑이 고개를 끄덕이곤 찬혁을 마주본다.
과거, 찬혁은 로랑을 상대로 닭 요리라는 주제를 골랐다.
전통 프렌치 셰프를 상대로 닭 요리를 주제로 삼아 대결한다는 만행. 그때는 단지 건방진 도전이라고 생각했던 로랑이었으나, 결과를 놓고 보자면 찬혁은 이미 자신만의 확고한 승리의 플랜을 세우고 그에게 그런 주제를 제안한 것이겠지.
프랑스를 상대로 닭 요리로 승리 플랜을 세운다.
그것 자체가 이미 경솔한 판단일지도 모르지만, 찬혁은 제 판단이 옳았음을 결과로 내보였다.
그 점에 착안하여 로랑 또한 계획을 준비했다.
마치 따라 하는 것 같아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이번 시합에선 자신이 도전자의 위치에 있음을 알고 있었기에.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호불호에 따라 승리하기 위한 플랜을 조절할 정도의 여유가 로랑에게는 이미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자신의 호불호, 가능성에 대한 탐구, 그리고 본인의 역량과 상대의 역량.
그것을 최대한 면밀히 검토한 결과, 로랑이 도출한 답은 이것이었다.
"장시간 조리 요리. 그게 내가 선택한 주제다."
이것이, 류찬혁이라는 강자를 쓰러트리기 위한 로랑 마틴의 계획. 그 첫 번째 단계다.
***
장시간 조리 요리. 그 말이 나왔을 때 찬혁은 살짝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시간 조리 요리라고?'
보통 요리라는 건 시간을 들일수록 맛있어지는 거라고 사람들은 종종 말하지만, 의외로 그건 사실이기도, 사실이 아니기도 하다.
분명 대부분의 요리는 들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충분한 맛을 뽑아낼 수 있기에 비교적 맛있어지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효율이라는 면에서 볼 때, 거기엔 분명히 한계가 존재한다.
예를 들어 한 음식이 낼 수 있는 맛의 총량이 100이라고 하면, 두 시간을 들여 음식을 만들면 60의 맛을, 세 시간이면 70의 맛, 다섯 시간이면 80의 맛을 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10시간이 되면 대략 85 남짓이고, 거기서 더 길어진다고 무조건 맛있어지지도 않는다.
20시간을 들여 만든 요리의 맛이 90이 될 수도, 도로 80으로 되돌아올 수도 있다는 것.
그러나 결론만을 따졌을 때, 한계치의 맛에 도전한다는 점에서 장시간 조리는 분명 뛰어난 요리를 만들기 위한 방법임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시합의 구조. 길어도 세 시간 안에 음식을 완성하여 승부를 보아야 하는 작업에 그런 주제가 어울리는가.
이것은 찬혁만이 아니라 제작진에게까지 갑자기 던져진 숙제이기도 했다.
최고의 요리를 만든다는 점에서는 이 주제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방송을 생각하면 이 주제를 받아들일 수 없다.
당황한 심판이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고 뒤로 물러서고, 모두가 숨죽여 이 선택의 결론을 기다리던 그때였다.
"하긴, 장시간 조리도 안 해보고 제대로 된 우열을 가렸다고 볼 순 없겠죠. 해봅시다, 그거."
도전자가 당당하게 내민 도전장을, 챔프가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