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3. 재전.-2-
장장 석 달. 예선을 합치면 반년 가까이 진행되어온 글로벌 푸드 서바이벌 시즌2가 드디어 최후의 한 시합만을 남겨둔 현재, 사람들의 반응은 그 어느 때보다도 뜨거웠다.
특히나 요 근래 연달아 터진 사건은 거기에 추가로 기름을 뿌렸다.
얼마 전까지는 중국팀의 부정행위 사건.
그것이 중국팀의 자진사퇴라는 결말로 끝난 뒤로는 프랑스팀의 화려한 복귀가 눈길을 끌었고, 그들이 끝내 미국팀에 이어 이탈리아팀까지 이기고 결승전 무대에 서는 것이 결정된 그때, 대중은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와, 1회전 탈락하고 결승으로 부활하는 거 실화냐.
─진짜 근성도 이런 근성이 없다.
─하긴 대진표가 이상해서 그렇지 일찍 떨어지기엔 너무 아까운 팀이긴 했다.
─현지 쪽 애들 말로는 패자전도 전승으로 이기고 올라왔다던데.
└진짜? 그거 토너먼트가 아니라 포인트제잖아. 거의 탈락한 팀 전부랑 한 판씩 해야 할 텐데?
└└그런데 그걸 진짜 했다잖아.
└└└완전 미친놈들이네…….
누군가의 말마따나 영화화나 드라마화를 해도 될 것 같은 역전극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평범한 역전극이었다면, 대중들도 이들의 귀환에 이토록 커다란 환호를 보내진 않았을 것이다.
프랑스팀의 결승전 진출이 커다란 화제가 된 결정적인 이유. 그것은 다름 아닌 상대팀 때문이었다.
─여기서 또 한국팀이랑 붙네.
─1회전에서 붙고 결승에서 다시 만나는 팀이 있다?
─한국팀 그 개똥 같은 대진운으로 결승 또 간 것도 신기한데 거기서 프랑스랑 다시 만나네ㅋㅋㅋ
─이게 진짜 왜 이렇게 되지?
작금의 상황을 찬찬히 둘러본 사람들 사이에서 막말로 '가장 큰 손해를 본 건 토토쟁이'라는 공공연한 농담이 오갈 정도로 지금의 사태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와 근데 진짜 이걸 누가 예상함?
─심지어 토토 사이트 조건 설정 항목에도 결승전 한국 대 프랑스는 있지도 않음ㅋㅋㅋ
─독일 대 브라질 7:0이나 한국 대 독일 2:0에도 거는 정신 나간 역배충들조차 상상하지 못한 재대결;
─이 정도 인연이면 깔끔하게 둘이 우승 준우승하면 되겠네.
└선생님 그건 원래 그렇게 됩니다.
그들 사이에서 나도는 말대로, 애당초 이런 대진 자체를 미처 예상하지 못한 사람이 훨씬 많았던 만큼 한국팀과 프랑스팀의 재전은 현재 글로벌 푸드 서바이벌 시청자들 사이에서 가장 활발히 오가는 떡밥이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단연 격한 논란 주제는 역시 '누가 이길까'에 대한 것.
사자 대 호랑이, m16 대 ak47, 메이위더 대 파키아오, 메 대 호 등. 원체 무언가를 시합 붙이기 좋아하는 생물인 인간들에게 공식적인 일전을 앞둔 상상력 대결은 더할 나위 없는 유흥거리이자 시간 죽이기에 딱 알맞은 주제였으니까.
하지만 그런 열정적인 토론도, 결과적으로는 얼마 지나지 않아 보다 간단한 해답으로 귀결됐다.
─아니 근데 뭐, 결국 한국팀이 이기는 거 아냐?
─그럴 것 같긴 해. 처음 시합 때도 결국 2연승으로 이겼었고, 아무리 패자부활전 전승이라지만 한국팀도 여태까지 쭉 전승이었고.
─터키팀이랑 개인전 할 때 터키팀이 존재감 없는 아저씨 지목하는 거 보고 이거 지겠다 싶었는데 그것도 이겼잖아.
─아무리 같은 전승이라도 한국팀은 여태껏 이기고 올라온 팀들 상대한 거고, 프랑스팀은 탈락 팀 상대한 거니까.
─그래도 난 역배로 간다. 세상에 없던 역배도 뚫었는데 남은 역배 한 번 못 뚫겠냐! 프랑스팀 우승 가즈아!
└대가리 깨진 토토충+역배충ㅋㅋㅋㅋㅋ
이상의 대화를 보면 알 수 있다시피, 대다수의 시청자들은 이미 이 승부의 결과가 한국팀의 승리로 끝나리라 짐작하고 있었다. 비율로 따지면 대략 8:2 정도일까.
사실 이건 어쩔 수 없는 수치이긴 했다. 애당초 시청자들이 직접 눈으로 보고 그 실력을 확인할 수 있던 팀은 한국팀뿐이었다.
허장성세라는 말이 있듯이 겉으로 보이는 게 좋다고 무조건 대단하다는 건 아니지만, 짧은 시간 안에 내실의 구조나마 확인할 수 있는 수단은 결국 겉모습을 보는 수밖에 없다.
보여줄 겉모습이 담긴 영상자료조차 변변찮게 남지 않은 프랑스팀으로썬 크게 억울해할 일은 아니었다.
다만, 그렇다고 모두가 그 말에 동의한다는 뜻은 또 아니다.
특히 이 화제의 중심에 선 인물들에게 이러한 세간의 평가는 그리 달갑게 다가오지 않았다.
"우리가 질 거라네. 어떻게 생각해?"
연습 후 쉬는 시간. 주방에서 핸드폰으로 인터넷을 살펴보던 프랑스팀 팀장 루이 라벨이 주방 한구석에서 숫돌로 칼을 갈던 로랑 마틴에게 물었다.
─스윽, 스윽
숫돌이란 건 마치 사포처럼 일정한 입자의 굵기가 정해진 물건이며, 보통 방수라고 불리는 입자가 세밀해지고 밀집하게 될수록 비싸진다.
500방 정도의 물건은 시장에서 만 원 정도면 적당한 물건을 얼마든 구할 수 있지만 1만, 3만방 등은 그보다 열 배가 넘게 비싸며, 전문가용 중에서도 극소수나 사용한다는 5만방 정도의 물건이 되면 재질이나 메이커에 따라 수십에서 수백을 호가할 때도 있다.
그런 고급 숫돌의 특징은 칼을 돌에 문질러도 거의 소리가 나지 않고, 마치 매끄러운 빙판 위에 칼날을 대고 미는 것처럼 미끄러진다는 것이다.
"……."
그리고 지금, 로랑 마틴이 사용하는 숫돌이 딱 그러했다.
500방부터 시작하여 1000, 1500, 3000, 5000, 10000, 30000, 50000.
과연 이토록 최선을 다해 칼을 갈아본 게 얼마 만일까. 벌써 몇 시간째 칼을 정비하던 로랑은 마침내 숫돌에서 떨어트린 칼을 물과 린넨 행주로 조심스럽게 닦아낸 뒤, 그것을 얼굴 가까이 들이댄다.
물론 자해를 위해서가 아니라 칼날이 갈린 상태를 점검하기 위함이다.
"……괜찮네."
칼날의 가장 날카로운 부분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나눠지는 칼날의 각도, 대칭, 그리고 오랫동안 써온 탓에 도신 이곳저곳에 남아 있던 작은 흠집조차 보이지 않는다.
마치 거울처럼 빛을 반사하는 도신 저편. 미남이라 평가받던 얼굴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며칠은 굶은 것처럼 뺨이 홀쭉하게 들어간 사내가 대신한다.
"이봐, 로랑. 내 말 들었어?"
자신의 말을 듣기나 했는지 모르겠다는 듯 묻는 루이의 부름에 로랑이 보인 행동은 간단했다.
"……."
"워, 워. 알겠다. 알겠으니까 그거 치워. 무서워."
지금이라면 무엇이든지 자를 수 있을 것 같은 칼의 첨단을 루이에게로 향하는 로랑.
그러나 그에 대한 루이의 행동은 더욱 별나다. 무서워 죽겠다는 듯 두 손바닥을 가슴께로 들어 보이면서도, 말투에는 여전히 경박함이 묻어 나온다.
루이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차피 로랑의 성격이 지랄 맞은 건 이제 와선 프랑스 사람이라면 그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었으니까. 그렇다고 로랑이 진짜 찌르리라곤 전혀 생각하지 않기에 이토록 태연할 수 있는 거다.
저 행동은 일종의 투정에 가깝다. 괜히 옆에서 쫑알쫑알 기분 싱숭생숭하게 하지 말란 의미다.
요 반년. 아니, 수년 가까이 얕든 깊든 로랑과 알고 지내온 루이이기에 알 수 있는 험악한 바디랭귀지였다.
마치 허공에 붙들린 듯 옴짝달싹도 않는 칼날에 담긴 의지는 명백하다. '나는 이길 수 있다.'
본선에서 탈락한 뒤로 약 두 달. 고작 60일 동안 스무 번이 넘는 경기를 치른 로랑은 이미 눈빛부터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전의 로랑에게서 보이던 것이 야망에 대한 욕구였다면, 지금의 로랑에게서 보이는 것은 보다 더욱 순수한 호승심. 그리고 향상심.
'젊구만, 역시.'
대다수의 젊은이가 모르는 사실이나, 그들은 사실 그 무엇보다 위대한 특권을 하나 가지고 있다.
'도전'이라는 이름의 특권.
그 누구도 젊은이의 특권에는 참견할 수 없고, 그 누구도 젊은이의 도전이 실패한다고 비웃을 수 없다.
합당한 계산과 열정, 그리고 어느 정도의 치기와 무모함, 거기에 용기라는 효과 좋은 마약 몇 스푼을 곁들인 도전을 비웃는 어른은, 본인에게 주어진 선물의 존재를 모른 채 어른이 되어 버린 불쌍한 사람에 불과하다.
로랑 마틴은 자신의 특권을 그 누구도 참견하지 못할 만큼 유용하게 활용하고 있었고, 그것은 곧 젊은이를 바꾸는 계기가 된다.
그렇다. 로랑이란 사내는, 지금 한창 우화의 때를 맞이한 번데기와도 같았다.
과연 그 껍질을 벗어던진 그에게 우람한 뿔이 돋아 있을지, 그렇지 않으면 화려한 날개가 자리해 있을지는 누구도 모르는 일이지만. 루이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거 참, 엄청난 녀석이 나오겠어."
그에게 일언반구도 없이 주방을 떠난 로랑이 칼을 갈던 자리.
물이 고인 싱크대에서 나뭇잎 한 장을 주운 루이가 중얼거렸다.
나뭇잎의 줄기를 잡은 루이의 손.
잠시 후, 나뭇잎을 들고 몇 초의 시간이 지나 루이의 손아귀 안에서 이변이 일어난다.
─툭
눈앞으로 들어 올릴 때까지만 해도 멀쩡히 팔랑거리던 나뭇잎이, 갑자기 가로로 두 동강 나더니 루이의 손에 잡히지 않은 윗부분만 조용히 땅으로 떨어졌다.
"허……."
말 그대로 귀신같은 솜씨로다.
먼 옛날. 과거의 대장장이 중에서도 자신의 제작품에 제 이름을 새길 수 있는 영예를 가진 명공이 자신이 만든 병장기의 예리함을 시험하기 위해 어떤 실험을 하곤 했다 전해진다.
흐르는 강물에 나뭇잎을 띄우고, 나뭇잎의 진행 방향에 칼을 대어 오로지 강의 유속만으로 나뭇잎을 깔끔하게 베어내는 것.
그 시험에서 성공한 물건만이 마스터피스라는 이름을 가질 수 있었다던가.
"이게 딱 그렇구만."
현대에 와서도 그와 비슷한 실험법은 존재한다.
물이 가득 담긴 수조에 나뭇잎을 띄우고, 그것을 칼로 내리눌러 부력만으로 나뭇잎을 벨 수 있다면 어지간한 단조의 달인들도 만들기 힘든 천하의 명검이라고.
그러나 이것은 그 이상이었다.
이미 제 손발이나 마찬가지인 칼을 프로 셰프가 피땀으로 갈아내어, 거기에 제 솜씨를 더해 만들어낸 마술 같은 현상.
두 동강이 난 뒤에야 비로소 베였음을 깨닫는 신기.
"……변했어."
도전은 오만한 천재를 승리에 굶주린 괴물로 바꿔놓았다.
괜히 설레발을 쳐서 좋을 게 없음을 알고 있지만, 루이는 이렇게 생각했다.
'질 것 같지가 않구만.'
과연 자신의 이런 생각이 옳을 것인가.
그것은 다가올 시합에서 확인할 수 있겠지. 손에 들린 나뭇잎의 단면을 바라보며, 루이는 짧게 웃었다.
***
날이 밝는다.
장장 몇 번의 계절을 거쳐 이어진 대회.
겨울에는 끝나리라 믿었건만, 별 같잖은 사건사고를 거쳐 결국 입춘을 맞이한 다음에야 그 끝을 볼 수 있게 되다니.
아직 날씨는 찬데 새싹은 눈 녹은 물을 머금고 찬바람도 마다 않고 솟는다.
"재밌게 됐네, 이거."
정말 우스운 이야기다.
1회전에서 맞닥뜨린 상대와 결승에서 맞닥뜨리고, 심지어 그 무대마저 같은 곳이 되다니.
"지자체는 계 탄 기분이겠다."
"왜요?"
"관광객이 많이 올 거 아냐. 외화벌이 쏠쏠하잖아."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네요."
한국. 우리가 첫 번째 경기를 했던 장소.
본래 결승전 또한 이제껏 그래왔듯 다른 곳에서 치러져야 했겠으나, 그간 있던 사건의 뒷수습을 하느라 그쪽에 대한 준비가 비교적 미미하여 결국 회장을 재사용하는 것으로 결론을 봤다고 한다.
'마침 같은 상대, 같은 구도, 디펜딩 챔피언의 위상을 챙기기 딱 좋다.'
거 참. 웅변도 정도가 있지.
하지만 뭐, 우리야 편하게 됐으니 그러려니 할까.
다만 이전과 전부 똑같진 않을 것이다.
그야말로 불사조처럼 부활한 자국의 팀을 응원하기 위해 보인 프랑스 관광객의 숫자는 거의 올림픽 현장 저리가라 할 정도다.
홈 그라운드인 한국인과 비교해도 결코 꿇리지 않는 머릿수.
관객석을 넘어 행사장 바깥까지 뻗은 인파는 외부에 설치된 임시 스크린으로 차가운 바람을 핫팩으로 견디며 시합의 추이를 지켜본다.
'거기다…….'
무엇보다 다른 것이 또 하나.
"……저 사람들, 분위기가 전혀 다르네요."
"그렇군요. 아주 곤두서있어요. 총부리가 이쪽을 보고 있는 기분이네요."
교장 선생님의 말씀은 결코 허풍이 아니었다.
정말로 칼로 찌르다 못해 총구를 이마에 들이민 것 같은 잘 정련된 기세가 그들에게서 느껴졌다.
"다른 그 어느 때보다 힘든 시합이 되겠어요."
교장 선생님의 혼잣말에, 일동은 무심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로랑 마틴의 금갈색 동공이 맹금류의 그것처럼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